페르시아

소생 후기와 팀발표 후기

작성자
손지
작성일
2018-08-01 15:20
조회
101
- 낯선 것을 공부하는 태도

이슬람을 공부할 때도 그렇고, 낯선 것을 공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대상화’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에 관한 책을 읽고 인상 스케치나 감상을 나누는 것에서 그치면 시간 죽이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서로를 촉발시키는 공부가 될 수 있으려면 지금 공부하는 철학적 법칙들에 입각해서 이해하고 질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령 이즈쓰 도시히코가 이슬람은 모든 걸 신의 뜻에 맡기는 ‘타력종교’라고 할 때도 곧바로 ‘그럼 이슬람은 주체 없이 어떻게 윤리가 가능한가?’라고 묻지 말고, 그동안 배웠던 탈주체 철학과 연결시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푸코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은 주체가 없이도 다른 삶의 태도와 윤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1차적 감상에 그칠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있는 담론들과 ‘연결’시키며 전방위적으로 질문하고 나누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

이슬람에는 기독교의 개념이 들어와있기는 하지만, 기독교와는 맥락이 상당히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현세는 내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내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현세에서 어떻게 신의 뜻을 구현할까에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은 은둔하거나 세상을 등지는 태도를 인간의 올바른 생활방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특징으로 이슬람에는 속세와 떨어진 채 수행만을 하는 수도원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에 의하면 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능동적인 자기 포기’에 있습니다. 이슬람과 가톨릭, 불교는 이 점에서 통합니다. 어떻게 세속적 가치를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에는 그러한 ‘포기’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생활을 하면서 결혼, 섹스, 재산축적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정당한 것으로 허용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영성까지 갖고자 하지요.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통하는 점은 바로 이런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 종교적 삶과 일상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점은 종교적 삶을 일상으로 끌어온다는 것입니다. 매일 하루 다섯 번 신을 향해 자신을 굽히고, 삶에 세세히 들어와 있는 생활규범의 실천을 통해 일상에서 신을 만납니다. 기독교가 일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영성을 추구했다면, 이슬람은 일상과 종교성이 합치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슬람은 어떤 종교보다도 ‘은둔’이 없는 종교이기도 합니다. 이슬람이 현세와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법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슬람에서 법학들은 곧 종교학자입니다. 우리에게는 법과 종교가 분리되어 있고 그것들이 담당하는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무슬림에게 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 안의 종교성을 실현하는 행위였습니다.


- 법, 해석에 따른 차이와 갈등

서양에서는 노모스(사회규범, 코드화된 법 체계)와 피시스(자연, 감성과 본능)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서양에서 본성과 법 체계는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해서 서양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가 국법으로 자리잡은 법률과 어긋날 때, 어떤 것을 행위규범으로 삼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오이디푸스>의 안티고네는 나라의 법보다는 관습을 따르는 걸 자신의 행위규범으로 삼았지요.

반면 이슬람에서는 모든 법적 명령과 금지가 모두 신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법과 종교가 하나로 합치되지 더 심플하다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또 나름으로 고민의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신의 말씀인 코란(이자 법률)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문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그 깊은 의미를 ‘심층적으로’ 받아들일지에 따라 이슬람 안에서도 수니파, 시아파와 같은 분파들이 나뉘게 됩니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도 아니고, 타고난 본성도 아닌, 신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신의 의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신이 결정한 문제이기에, 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개인에게 부과되어 있던 무게를 덜어주고 더 가볍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신의 뜻’은 하나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하는 것은 모두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즉 <코란>은 하나이지만, 이것을 어떻게 의미화해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삶으로 드러납니다. 오늘날까지 시아파와 수니파가 긴장된 관계로 있는 것은 바로 이 해석의 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종교와 사회적 법체계의 일치(울라마), 종교와 내면적 영성의 일치(우라파)

이즈쓰 도시히코에 따르면 이슬람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사회 제도적 차원의 법체계(샤리아)를 발전시킨 ‘울라마’와 내면의 영성을 탐구하는 ‘우라파’. 울라마들이 종교를 법과 일치시켜 ‘공동체적 종교’에 관심을 둔다면, 우라파들은 종교를 내면과 일치시켜 ‘개인적 수행’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울라마들은 이슬람을 법 체계에 집약시켰기 때문에 제국의 기초를 확립하고, 더불어 그때그때의 정치권력과 결속하였기에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우라파는 정치적으로는 반체제를 지향하기에 국가로부터 늘 박해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들뢰즈식으로 하면 우라파는 사회체제에 있어 일종의 도주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너무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면 억압이나 족쇄로 느끼게 됩니다. 법은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이기는 하나 그보다 더 깊은 내면의 울림을 체험하지 못할 때 마음이 헛헛해지고 갈증이 생깁니다. 많이 안다고, 법을 준수한다고 내면이 충만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과 예술의 발달

어쩌면 시아파와 같은 내면을 추구하는 우라파가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망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를 해체하여 다른 힘과 접속하는 지점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법과 같은 외적 형식을 취하는데 집중하여 충만함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우라파들을 더 강하게 집결시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피즘의 빙빙 도는 춤처럼 모든 판단을 내련호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무아의 경지로 나아갈 때 종교는 예술과 같이 궁극적 합일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수피즘이나 밀교과 같은 신비주의가 예술과 접속되는 것도 이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술가들은 강도높은 체험을 통해 마약에 준하는 무언가를 경험하길 좋아하죠.

같은 이슬람이라고 해도, '현실주의적인 아랍인'에 비해 '이란인은 현저하게 환상적이고 신화적'입니다. 이즈쓰 도시히코는, 내면에 집중하는 시아파는 "근본적으로 이란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티벳에서 만다라와 같은 시각작품이 발달하거나 페르시아에서 아름다운 양탄자와 도자기, 건축과 같은 예술이 발달한 것은 이런 내면의 발달과 관련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예술이 발달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 훨씬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지요. 예술이 발달하고 형상이 다채로워지는 것은 어쩌면 종교적 규율이 느슨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참 모순적인 존재예요. 강한 규정성(혹은 영토를 만들기)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도주선을 만들고 자신을 해체하려는 욕망이 있으니까요.


이상 수업 후기였고요, 다음은 <철학팀>과 <예술팀>의 팀별 발표내용 후기입니다.

발표와 피드백을 들으면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를 재밌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어떻게 사람들과 나눌지를 염두하며 공부하면 더 쫄깃한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발표하는 형식에 관한 피드백을 먼저 정리해볼게요.

- 어떤 토픽을 중심으로 정리할지가 발표의 제목으로 나와야 한다.

- 그 토픽을 중심으로 생겨난 질문을 구체화한다.

- 그럼 발표 목차를 짤 때의 기준이 생기고, 그를 중심으로 발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 또 어떤 점은 꼭 전달하고 싶은지 강조하는 핵심을 짚어줘야 한다.

- 디테일보다 중요한건 전체. 전체 흐름 속에서 디테일을 배치해야 한다.

각 팀의 구체적 피드백은 지영언니가 후기에 올려주셨네요. 철학팀의 경우, 코란을 해석해온 사람들이 계시의 어떤 점을 어떻게 해석하면서 이슬람의 해석의 지평을 열어갔는지에 대한 부분을 보충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또 예술팀은 이슬람의 종교적 마인드가 어떻게 공간과 연결되는지를 찾아서 보충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셨고요. 모스크도 고딕성당도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화한 것일텐데, 왜 고딕은 위로 뻗어 올라간 반면 모스크는 옆으로 확장되었는지, 그 공간에 스며있는 상징의 압축을 풀어보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다다음주에는 역사팀의 발표가 기다리고 있어요. 두 팀의 발표를 보았으니 탄탄하고 핵심이 있는 발표를 기대해봅니다. 후기가 늦어 정말 죄송합니다. 고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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