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프로젝트 8월 2일 후기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8-06 11:31
조회
75
이번 세미나 시간에는 <의식과 본질> 1, 2, 3장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눴는데요, 중점적으로 토론했던 장은 1장과 2장입니다. 1장은 의식과 본질의 관계, 2장은 다른 류의 본질(마히야, 후위야)이 주요 주제였습니다.

 

채운샘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것’이라고 부르는 사물은 무엇일까? 내 바깥에 있는 것들이 사물이라면, 나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물이라는 관념을 성립시키는 동시에 나라는 관념 또한 세웁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발화하는 말, 하는 행동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어떤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나’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식하는 ‘사물’은 그 사물이 맞는 걸까요? 그 사물의 진동이 나와 마주쳐 내가 만들어 내는 그것에 대한 해석은 그것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면 한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관념에 의해 세계를 조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성하는 이 관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조직합니다. 그렇다면 세계가 있어서 의식이 있는 것일까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나의 인식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푸코는 질문했다고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자인가?” 모든 의식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의 규정과 함께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의식은 인식의 문제와, 우리의 의식이 인식하는 사물의 본질은 존재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양 극단의 인식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는 이런거야’라는 규정성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덧씌워지는 규정성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미끄러지면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 <의식과 본질>입니다. “본질의 그물을 통해서 분절되어 조망되는”(37) 분절의 세계와 존재가 분절되기 이전의 무분절의 세계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차이를 알아보았습니다. 이 책의 1장에는 본질의 실재성과 비실재성의 문제에 대해 다룹니다. 우선 이즈쓰 도시히코는 의식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표층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심층의식입니다. 표층의식은 너와 나 또는 사물 A와 B 등과 같은 개체들로 세계를 분절하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의식 일반을 말합니다. 반면 심층의식은 세계를 개체로 나누지 않고 “이름을 통해 대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44) 의식 아닌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메타 의식이라고도 하죠. 이 의식에는 어떠한 본질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어 탈락, 본질 탈락’의 세계. 이 세계를 동양에서는 ‘도’ 내지 ‘기’라는 표현으로, 서양에서는 ‘신’이나 ‘이데아’의 단어들로 표현합니다. 토론에서 나왔던 흥미로운 지점은 ‘신’이라는 심층 의식을 이슬람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심층 의식인 신을 표층 의식의 수단인 언어로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어요. 이것이 ‘나 이전의 차원’을 언어로 사유하기인 것일까요?

 무분절의 세계와 분절의 세계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일까요? 나는 어떻게 나 이전의 나와 관계맺고 있을까요? 나와 사물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주로 동양에서는 분절의 세계와 무분절의 세계가 공존합니다. 서양에서는 현대철학에 들어서야 니체를 선두로 분절의 세계를 깨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분절적 세계가 아예 가짜라고 봤습니다. 연기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분절되어 보일 뿐이라고 본 것이죠. 베단타 철학은 또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절대적 실체, 즉 브라만이 존재합니다. 불교와 같이 베단타 철학 또한 경험적 사물의 본질을 부정하지만, 분절의 세계를 공의 세계에서 출현한 가상 세계라고 보는 대신 절대 무분절의 실재자(브라만)가 제한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봅니다. 모든 곳에 신이 존재하는 범신론에 가깝죠. 베단타 철학은 자기 개체성을 부정하고, 일상적인 신체성을 버림으로써 절대적 실체와 나를 일치시키고자 한다고 합니다.

 2장에서는 마히야 후위야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물의 일반적인 규정성을 빠져나가는 개체성을 본질로 보는 후위야에 대한 논의를 많이 했는데요, 와카의 시인들은 ‘흐리게 바라봄’으로써 사물의 마히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규정성을 빠져나가는 개체성을 캐치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마히야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인정하는 행위이며 다만 마히야의 한계를 넘어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바쇼는 이와는 조금 다른데요, 마히야를 부동적인 실체로 보는게 아니라 동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마히야와 후위야가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히야가 후위야로 변모하는 과정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심을 벗어난다’는 표현을 씁니다…….. 허허. 무엇인가를 자꾸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의 의식 안으로 들여오려 하는 욕심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일까요?

 저는 이때까지 분절적 세계를 철썩(?)같이 믿으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그 사람과 있어서 편하거나 기쁘면 그는 좋은 사람이고, 불편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나쁜 사람으로 단정지어 버립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뀔 때마다 상황/사람에 대한 제 판단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그 상황/사람이 좋거나 나쁘기 때문에 내 기분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 작용이 그에 대한 상을 만드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만들어 놓은 상은 그의 ‘가상의 모습’일 뿐인 걸까요? 그럼 나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그의 상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걸까요? 흠 어쨌든 책을 더 읽어나가면서 이런걸 토론해 보면 재밌겠다고 나온 이야기로는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이 세 종교는 어쨌든 유일신 종교인데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그에 따라 어떻게 세계관이 달라졌는지’가 있었습니다. 물론 어렵겠지만...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의식 습관이라던지 그에 따른 나와 세계의 관계를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 2

  • 2018-08-07 10:44
    인식에 이렇게 다양한 문제들이 걸쳐있는지 몰랐습니다. 허허. 그냥 보이고, 느껴지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군요.
    그동안 의식이나 본질을 따지는 것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뚜렷한 문제의식 속에서 접근하지 않는 게 공허해지는 거였어요.
    이슬람의 사유를 따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책 읽는 법을 목표로~

  • 2018-08-08 20:20
    와우! 후기를 읽다보니 지난주에 배운 내용 정리도 되면서 채운샘 강의도 새록새록 되새겨지네요. 작은 지은 샘.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