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1학기 8주차(4.10)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4-06 01:23
조회
104
 

 

유고를 읽다 보면 반복해서 눈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강함’에 대한 니체의 척도인데요. 니체 자신이 반복해서 적고 있기도 하고, 저와 선생님들이 선별해오는 구절에 매주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읽을 때마다 멈춰서 곰곰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이런 표현으로 등장했습니다.

“나는 인간을 힘의 양과 그의 의지의 충만에 의해 평가하지 : 그의 약함과 소거에 의거해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의지의 힘을 의지가 얼마나 많은 저항과 고통과 괴로움을 견뎌내며 이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의거해 평가한다 ; 이 척도에 따라서 삶으로 하여금 자신의 나쁘고 고통스러운 성격을 비난하게 하는 일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나는 삶이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욱 나쁘고 고통스러워지기를 희망한다.”(유고 20권, 224쪽)

대체 강하다는 것은 뭘까요? 니체는 서열을 결정하는 것은 힘의 양이라고 말하는데, 힘의 양과 의지의 충만은 대체 뭘 말하는 걸까요? 지극히 당연하게도 아픈 곳 없이 몸이 건강하고, 물리력이 강하거나 성격이 드센 것을 말하진 않겠죠. 그랬다면 우락부락한 헬스장 형님들이 가장 고귀해야 하는데, 그들의 생각과 마음의 힘도 어딘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오히려 쇠진했지만 자기 생활의 리듬과 규율을 가지고, 늘 뭔가를 배우며 간소하게 살아가는 노인에게서 더 단단함을 느끼게 됩니다.

니체의 평가척도에서 힘의 양은 비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비교가 용인되는 대상은 이전의 자기 자신뿐이죠. 따라서 평가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만, 정확히는 그 사람을 통과하는 힘들의 양상과 관련해서만 이뤄집니다. 저 젊은이(혹은 어른)보다 뭘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힘들을 얼마만큼, 몰락(체념, 포기, 저주)해버리지 않으면서 감당하고 있는가. 그것만이 문제됩니다. 물론 이때의 감당은, 저항과 고통과 괴로움을 단순히 낙타처럼 받아들이고 짐 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변화시킴에 있습니다. 고통이든 병이든 재난이든, 혹은 아주 사소한 일상의 사건이든 그것을 얼마만큼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것은 계속 낙타이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낙타는 자신의 질긴 몸으로 가해지는 중력을 받을 뿐이니까요. 문제는 그 중력과 더불어 어떻게 변화되는가인 것 같습니다. 니체에게 평생 중요했던 건강함 역시 병으로부터 자신의 몸의 리듬, 음식, 공기, 기후, 음악 취향과 심지어는 글쓰기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관계 전부를 변형시키는 능력에 다름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삶에서 무엇을 극복하고 있는가, 그것과 더불어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가, 니체에겐 이것이 강함의 척도이며, 나아가 그렇게 스스로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삶의 가혹한 면들을 얼마만큼이나 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긍정의 기준입니다.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적극적인active 것도 함께 이야기될 수 있겠네요. 자기 신체와 관념의 습관에 형태를 다시 부여한다는 점에서 조형적이고, 완고한 중심 없이 외부적인 것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무위(無爲)적인 태도 말이죠.

그런 자에게 고통은 부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무엇은 아닐 것입니다. 저희 조에서는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인 삶이 지금보다 더 나쁘고 고통스러워지길 희망한다는 말에 ‘굳이 그럴 것까지 있는가’하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는데요(약간 사이코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핏 느끼는 성취감이나 고양감 같은 경험(그것이 힘의 증대의 느낌이라 할 수 있다면)은 언제나 일종의 힘들고 괴로운 것의 극복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고통이 다 사라져 쾌적한 상태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통은 나쁜 것, 쾌감은 좋은 것이라는 도식이 너무 당연하지요. 그래서 온갖 불편을 없애는 기계와 서비스 상품들이 출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정말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힘이 커진다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왜소해지고 무력해지지요. 유고에서 반복되듯, 쾌감과 불쾌감은 대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차원에서 대립된다고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서 쾌와 불쾌는 사건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최종 현상이며 그에 앞서 힘의 느낌이 우선합니다. 그 힘의 느낌은 쾌를 주기도 하지만 고통과 그 극복이라는 불쾌 없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둘은 동시에 증대됩니다. 니체는 쾌감 일반이 불쾌한 자극들의 리듬이라고까지 말하지요. 이런 점에서 삶의 여러 불만족들은 삶을 혐오하게 하는 것 이전에 생명감정 및 삶에 대한 중요한 자극제가 됩니다. 그렇기에 삶의 가혹함은 삶을 비난해야 할 이유일 수 없으며 오히려 반대로 감사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불교 수업 때 배우는 자비 명상의 발원은 “모든 존재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가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얻게 되기를”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니체가 떠올라 혼란스러웠는데요. 니체는 자신의 가까운 사람들이 그저 쉽게 살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겪기를 바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자비심이 전혀 없는 걸까. 하지만 토론을 하다 보니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삶의 고통스런 면을 겪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그 경험으로부터 더 강해지고, 삶을 더 이해하고 긍정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의 원인을 얻는다는 것은 그저 무사무탈하게 순진하게 살다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의 원인은 바로 알아차림, 자비심, 지혜인데, 이때 지혜는 결과적으로 ‘세상의 공함’에 대한 통찰입니다. 고통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로 그 통찰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것을 바꾸는 길고도 고된 훈련이 동반됩니다. 니체의 자비심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모비딕>은 2주차를 지났습니다. 드디어 에이해브 선장이 등장했고, 피를 끓게 하는 위력으로 흰고래 모비딕을 잡겠다는 ‘피쿼드’호의 지극히 사적이고 비합리적인 목적을 공표했고, 첫 향유고래의 추적에서 죽을 뻔한 위험을 겪은 우리의 이슈마엘이 감회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저희 조는 항해사들과 작살잡이들의 식사장면에서 힘이 흐르는 장면과 에이해브가 모비딕에 쌓은 원한을 설명하는 대목을 많이 뽑았습니다. 토론은 주로 에이해브라는 인간은 어떤 자인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기세화 힘을 가졌다 해도 그는 어찌보면 지독한 원한에 의해 생의 동력을 얻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강자라고 할 수 있을까? 에이해브의 원한은 니체가 비판하는 약자의 원한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약자들은 복수할 능력이 없기에 앙심을 품지만, 에이해브는 전력을 다해서 복수를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구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와의 결투를 향해가고 있으며, 엘리트 항해사들과 모든 선원들을 자기 목적에 부합하도록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코 약자는 아니지요. 그럼 니체가 말하는 사제적 유형의 인간인가라고 물으면,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비슷하나 그 수단으로 어떤 우월하고 권위적인 초월적 가치(도덕, 말씀, 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날것의 힘으로 복속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것 같습니다. 무엇에도 숨지 않고 자기의 의지를 밀어붙이죠. 힘의 충만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뭐라 진단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에이해브는 결코 가벼운 인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장한 복수심을 비웃지도, 다른 이들을 명랑하게 해주지도 못합니다. 한없이 무거워 보이죠. 그런데 또 가벼움이 뭔가 하는 질문도 나왔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돈이나 명예나 땅에서의 다른 가치들에는 전혀 연연하지 않는데 이것도 가벼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이해브, 당신은 누구요? 채운샘은 들뢰즈가 정리한 힘의 유형(서열)인, 반응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의 개념으로 인물들의 보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 인물이 그리는 삶이 어떤 궤적인가를 말이죠. 한 손에 잡히지 않는 소설 속 인물들을 분석해보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 듯합니다. 에이해브든 이슈메일이든 퀴퀘그든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든, 그들이 약자다 강자다 하는 진단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놓치지 말아야할 문제는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에겐 무엇이 없는지, 그들 안에서 흐르는 힘은 우리의 힘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질문하면서 읽는 일만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과제 및 공지]

 
  1. <유고> 20권 436쪽까지 읽고 힘과 관련된 구절 10개 뽑기(이유와 나름의 해석을 짧게 붙여주세요)


 
  1. <모비딕> 449쪽(84장)까지 읽고 힘 개념과 함께 토론하고 싶은 구절 3개 뽑기


 
  1. 자기주도학습 주제&공부한 내용 공유할 수 있도록 정리해오기. 8주차이기 때문에 평전 한 권은 머릿속에(마음속에)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