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1학기 9주차(4.17) 공지

작성자
나영
작성일
2021-04-11 19:41
조회
173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작살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모비딕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니체의 철학 개념을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니체에게 철학이란 직업이 아니라 삶이었기 때문에 삶의 철학자인 니체를 공부하는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창조적 가능성을 상승시키고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기능이 없다면 철학은 현학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하는 공부가 삶의 실천이 되지 않을 때 그 공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압도적인 관성에 저항하는, 텍스트의 어려움을 떠나 그 자체로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중력의 정령은 자기극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동시에 자기극복을 발생시키는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 이걸 기억한다면 그때의 어려움은 이전의 어려움과는 분명 다를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발목을 잡는 어려움과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기회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세미나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석과 지각을 하지 말자, 과제를 빼먹지 말자는 말을 승질과는 달리 점잖게 해봤습니다. 에헴.    

조별 토론 시간에는 니체의 힘의지 공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우리의 힘의지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허무함을 뒤로하고 어떤 마음으로 (꼭 정치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니체를 읽으면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신념이란 과연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있기도 했고요. 우리 개인의 욕망은 이미 사회적인 것의 반영이지 않을까, 니체적 의미의 정치란 나의 신체를, 욕망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몸의 리듬을 바꾸는 일이 가장 정치적일 수 있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어떤 끔찍한 사건을 보면서 이건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건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사건을 통해 세상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 있다면 이게 정치적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환원하자는 게 아니라, 세계와 나의 관계를 다시 이해해보자는 의미에서요.

다짜고짜 바다 위에서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던 <모비딕>은 고래의 외형 연구, 고래 그림, 밧줄, 배, 창 던지기 설명과 묘사만 끝없이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결론이 궁금할 뿐인데 자꾸 쓸데없어 보이는 설명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 “나무줄기에서 가지가 나고, 가지에서 잔가지가 뻗어 나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주제에서는 많은 장(章)이 새끼를 치게 마련이다.”라는 문장이 들어왔습니다. 저희 조에서는 멜빌 나름의 생각이 있으니 잔말 말고 읽으라는 뜻으로 해석했는데요. 그러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 소설의 결론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삶도 그렇잖아요? 죽음이 끝이라는 걸 알고도 살아가는 의미에서요. 그런 점에서 과정이 전부인 삶과 과정이 전부인 소설 읽기를 함께 떠올려 보았습니다.

에이해브는 왜 그렇게 모비딕에 집착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냥 삶을 받아들이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광기에 사로잡혔을까 의문이었죠. 어쩌면 에이해브는 다리를 잃은 아픔을 잊기 위해서는 모비딕을 쫓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원한과 복수심 때문은 아니고요. 저항과 힘의지 차원에서요. 저항과 힘의지 이 둘은 한 세트라서 저항이 없다면 힘의지도 없는 것이고 에이해브에게는 힘의지를 발현시킬 수 있는 저항의 대상이 곧 모비딕이 아닐까, 우리에게도 힘의 방향은 다를지언정 모비딕과 같은 대상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요.

저는 처음 세미나 참여했을 때 토론은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할 말도 없으니 제발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채운 선생님 강의만 길게 듣고 싶다는 생각 매일같이 했었거든요. 강의를 들으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다 이해가 되는 것 같고 그랬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토론 시간이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갑자기 막 똑똑해진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우리끼리 갈팡질팡하고 난 뒤에 듣는 강의와 그냥 강의만 들을 때의 와닿음이 다르게 느껴져 그렇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말 대잔치와 서로 다른 해석이 오가다 빠직!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 차이의 순간에 곧 상대를 알게 되고 또 그걸 통해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토론에서 노원구 세 모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그럼 니체의 긍정을 체화하려면 이런 살인 사건도 긍정해야 하냐, 이 사회에서 정의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위에서 썼듯이 이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게 니체의 긍정은 아닌데 이걸 어떻게 니체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갈팡질팡했어요. 우선 선과 악은 인간 차원에서의 가치평가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는 선악이란 존재하지 않겠죠. 하지만 우리는 가치평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건을 긍정하냐 안 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악이라는 구도를 만드는 힘의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범죄는 반동적 힘이 승리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서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가 누군가를 해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물을 수 있겠죠.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기란 어려우니까요. 미워하는 마음은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해가 없을 뿐이지요. 누가 내 마음대로 따르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괴로움과 원한은 우주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때의 원한은 삶을 불행으로 만들어버리는 표상이고 모든 원한은 보상심리를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행위가 전부이고 행위 자체가 곧 보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삶을 삶 자체로 긍정하는 자는 어떤 원한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겠죠.

니체가 말하는 정의가 신의 자리를 상정하는 이상으로서의 정의든, 객관성으로서의 정의든, 외부에 공정함과 객관성을 요청한다는 지점에서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자신에게 질문하지 못하고 외부에 공정함을 원하고 있는지를요. 우리는 이해관계에 얽혀 있지 않은 제3자가 공정함과 객관성을 지니고 있고 정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니체가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니체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객관성이 있다/없다 할 수가 없어요. 오직 더 많은 정서를 겪어내고 더 많은 관점을 거치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체로서의 객관성을 말합니다. 정의, 공정함, 객관성이란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기존의 가치를 따르는 그럭저럭 사는 삶이 아닌 삶을 위해, 양을 이끄는 목자가 되어 앞서서 가고 싶은가? 아니면 나만의 길을 가고 싶은가? 이 질문과 함께요. 답이야 이미 나왔는데 방법이 문제죠. 그런데 니체는 ‘왜’가 명확하다면 ‘어떻게’는 견딜 수 있다고 했으니 결국에는 실천만이 남는 문제겠네요.

[과제 & 공지]

1. <유고> 20권 끝까지 읽고 힘과 관련된 구절 10개 뽑기(이유와 나름의 해석을 짧게 붙여주세요)

2. <모비딕> 끝까지 읽고 힘 개념과 함께 토론하고 싶은 구절 3개 뽑기

3. 10주 차 과제 : 소설의 사건 또는 사람을 니체의 힘의지로 해석하는 글쓰기

                 ‘내가 만난 니체’ 프로포절

4. 다음 주 간식 : 경희샘, 민호샘
전체 5

  • 2021-04-12 07:25
    "아무말 대잔치와 서로 다른 해석이 오가다 빠직!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스스로 찾아가려고 이렇게 어렵게 니체를 읽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에게 아무리 번거롭고 어려운 순간도 쓸모없는 순간일 수는 당연히 없겠네요!
    나영샘의 점잖은 훈계에 감동...니체와 함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고민하며 나아가고 계신 옆 조에 자극받네요!ㅎㅎ

  • 2021-04-12 10:34
    저도 요즘 '세계와 나의 관계', 어떻게 세게와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 경험적으로 겪지 못했지만, 저번 채운샘 강의를 듣고 조금 물꼬를 튼듯 합니다. 우리가 살인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은 누구나 동의 하지만, 그냥 나쁘다는 것, 선악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왜 그런가? 힘에의 의지는 우주적차원과 인간의 차원에서 각기 달리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 모비딕에서 에이해브선장은 힘의지 발현시키는 대상에 저항, 저항의 대상이 모비딕!! 나에게는 이런 저항의 대상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해보게 하네요~~~ 나영샘!! 바쁜 중에도 꼼꼼이 써신 후기 잘 읽고 갑니다^^

    • 2021-04-16 16:00
      수니샘 매번 꼼꼼하게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샘의 자기주도학습 계획서가 인상적이었는데 계획대로 잘 진행하고 계신 것 같아 비록 저는 못 하고 있지만 뿌듯합니다.ㅎㅎ

  • 2021-04-13 09:29
    "자기에 대한 전형적인 구조화, 또는 가장 중요한 여덟 개의 물음들.
    1. 자신이 복수적multiple이길 원하는가 아니면 더 단순하기를 원하는가?
    2.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행복과 불행에 무관심하기를 원하는가?
    3. 자신에 대해 더 만족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자신에 대해 더 요구하고 엄격하길 원하는가?
    4. 더 유연하고, 더 협조적이고, 더 양보를 잘하고, 더 인간적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더 비인간적'이기를 원하는가?
    5. 더 똑똑해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더 무분별해지길 원하는가?
    6. 하나의 목적에 도달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모든 목적을 회피하기를 원하는가(예를 들어, 각각의 목적에서 현재와 막다른 길과 감옥과 어리석음의 냄새를 맡는 철학자처럼)?
    7. 더 존경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더 두려음의 대상이 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더 경멸을 받기를 원하는가?
    8. 폭군이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유혹자나 목동이나 무리짓는 동물이 되기를 원하는가?"

    마지막 질문을 읽고 이 구절이 떠올랐습니닷

    • 2021-04-16 16:01
      아 이거 니체와 악순환 맞죠? 건화샘 간접체험은 안 되지만 이거는 접수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