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9주차 후기

작성자
이경희
작성일
2021-04-18 14:08
조회
114
니체는 선과 악이라는 경계의 표지석을 이동 또는 변경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표지석을 없애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삶과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벗어나는 해석을 감행했다. 채운샘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한 가지를 고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신다. 당연하다! 이분법의 대립구도 속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에 대한 배제나 터부가 자연스레 작동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긍정으로 향하는 나의 새로운 길’(니체전집 20, 143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신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고 감행하는가?”라는 질문을 만들어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력의 세기에 대한 문제’라고 덧붙인다. 우리의 강함을 재보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고 그것을 감행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구도를 벗어난 다른 방식, 변화와 생성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것들을 더 많이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리고 마주치는 그것들을 긍정하는 과정으로 삶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아가는가? 생성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시각 속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건들, 우리 내면에서 발견되는 섬뜩하고 낯선 모습들, 모순이 뒤엉켜 있는 ‘사실’들. 삶에서 부정되었던 이런 것들을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끌어들여 맞이하고 향유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들에 대한 시도와 도전을 감행할 수 있는가?

  『모비딕』을 이번 주까지 4회에 걸쳐 다 읽었다. 모비딕에 등장하고 소설을 구성하는 것들은 대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그 의미를 규정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답 대신 오히려 질문거리를 더 많이 갖게 한다. 그래서인지 모비딕에 관한 조별 대화에서도 이것이라는 단정보다는 질문 형태의 말들이 많이 오고 간다. 모비딕과 바다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에이해브의 ‘광기’와 모비딕을 향한 편집증적 질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멜빌에게 이 소설의 에필로그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제 89장,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소유와 존재에 대한 단상들을 나누었다. 여기서 ‘잡혔다, 혹은 잡았다’란 표현은  손아귀에 들어온 것의 생사여탈권마저 제가 가지고 있는 양 행세해도 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한편 우리가 (고래를) ‘잡았다. 낚아챘다, 가졌다’라고 했을 때 이미 그것은 죽은 상태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우리가 잡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잡은 것은 한순간에 포착된 그것일 뿐, 우리가 포착한 것 외의 모든 것은 그 순간 사이로 빠져나간다. 조원 중 누군가가 우리의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죽음 충동과도 관련이 있다는 채운샘의 말을 환기시켰다. 그 말과 관련하여 소유는 관계에서 새로움 대신 정지, 멈춤을 고착화하고 영원하게 어떤 상태를 지속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죽음 충동과 관련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모비딕에서도 ‘잡힌’이란 말은 죽음을 맞이한 고래에 붙여진 이름이다. 심지어 인간은 깃발이나 작살이 꽂혀있는 고래에게 그것들을 표식 삼아 이미 제 것인양 행세하며 ‘놓친’이라는 이름을 붙여놓는다. 결국 인간의 의식 속에 제 것으로 포획된 것들은 죽음의 상태이거나 죽을 운명에 놓인다. 인간의 탐욕이 바닷속 고래 일반(?) 또는 단지 깃발이나 작살이 꽂혔을 뿐 바다를 유영하고 있는 살아있는 생명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관계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멜빌은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가지 원칙이 인간 세상 모든 법체계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정의의 준거인 법은 결국 인간의 무엇에 기반하고 있으며, 지금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가치롭게 여기도록 작동하고 있는거냐고 이 89장을 통해 묻고 있는 듯하다.

  멜빌은 세계 속에서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그물로 포획하여 들어올려져  드러난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보기를 원하는 힘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후기를 쓰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든다. 선과 악이란 그물 대신 나는 무엇으로 생성과 삶을 더 많이 긍정할 수 있게 될까? 일단 주어진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그 때 우리는 그 ‘얼마나 많은 진리'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얼마나 많은 진리'의 길은 계속 동행해왔는지도 모른다.

  다음 주에는 반가운 학인이 긴 쉼을 마치고 돌아온다. 지난 9주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보다 한 주 남은 1학기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기쁨이 더 크다. 어서 오시라!
전체 7

  • 2021-04-18 14:40
    부제:유승연샘 헌정 후기

    저도 정신력의 세기에 관한 구절이 마음에 남았어요. 강함이란 얼마나 많은(모순되는) 진리를, 책임지는 일을, 돌보고 감수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있다던 구절이 떠오르더라구요. 책 읽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경희샘의 소감과 질문이 저는 많이 궁금해요. 늘 신선한 질문을 가지고 오셔서요. 후기 일찍 올리셔서 남은 주말 더 달콤하게 보내시겠네요ㅎㅎ

  • 2021-04-19 09:56
    허무주의 끝에서 우리가 삶을 부정하는 자기포기를 하는 길(기독교)로 갈 수도 있고, 반대로 긍정의 길(디오니소스), ‘긍정으로 향하는 나의 새로운 길’ 로 갈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긍정으로 가는 길을 니체는 '강함의 염세주의'라 불렀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허무주의에서 , 선악의 구도에서 벗어나는 삶이 살기를 바라는 니체의 마음이 느껴져 왔습니다. 또 경희샘의 후기를 보니 삶을 부정하게 하는 여러 모순들, "이런 것들을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끌어들여 맞이하고 향유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가져가야 할 것 같네요!!!

  • 2021-04-19 20:30
    참으로 댓글을 안달 수 없는 후기!!. 나영샘 멘트때문에 .ㅎㅎ
    저도 이렇게 10주차에 합류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참으로 알수 없는게 삶이라는 것을 제가 이번에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경희샘!! 긴 쉼이라니요. 단지 9주 빠졌을 뿐인걸요. 우리 경희샘 글이 묵직한 것은 여전하십니다. 그려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고 공부하는 공간 나가봐야 별거없고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제가 가서 자세히 알려드리지요.

    • 2021-04-19 20:48
      (소곤소곤) 승연샘 그거 안 알려주셔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빠진 기간은 단지 9주지만 삐진 기간은 몇달이었떠라...아무튼 이제 1년치 놀림거리 생겼으니깐 각오하고 오셔요.ㅋㅋㅋ

    • 2021-04-20 09:26
      승연샘은 놓친 고래인가요 잡힌 고래인가요...?
      소유하고자 함과 죽음 충동의 연관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 잡힌 고래는 그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인 것은 아닌지도요. 빠르고도 재미난 후기 감사히 읽었습니다~~

  • 2021-04-21 14:23
    공부하는 공간을 호시탐탐 나가려고 엿보는 일 인.(ㅎㅎ) 담주 승연쌤 이야기를 옆에 딱! 붙어서 들어봐야겠네요.

  • 2021-04-21 20:17
    오~~승연쌤이 드뎌 오시는군요
    반가워서 댓글을 안 달수가 없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