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1학기 10주차(4.24)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4-20 13:57
조회
109
 

드디어 이번 학기 텍스트를 모두 읽었네요! 다소 묵직한 분량이었지만(저도 조금 벅찼습니다..ㅎ) 그래도 끝까지 읽고 토론하고 또 강의도 듣고 나니 뭔가 성취감도 들고 기쁘네요! 혼자서 도전하기 쉽지 않은 고전 두 편과 웬만해서는 엄두도 못 내는 니체의 유고 두 편을 10주 만에 읽은 것이니 맘껏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요? 다만 ‘읽었다’는 기억만 남지 않도록 우리 식대로 정리해보고 써먹어 보는 작업을 해야겠죠? 그것이 바로 다음 학기 글쓰기 과정입니다. 이번 주에는 각자의 주제와 방향, 개요를 생각해오셔서 같이 나누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참 일관성 있게도, 니체의 유고는 마지막까지도 아리송한 구절들로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게 이 말인가, 저게 저 말인가 갸우뚱거리면서 머리를 맞대고 아는 것, 알게 된 것, 알듯 말 듯 한 것들을 긁어모아 보는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가령 앞뒤 맥락도 없이 대뜸 등장한 11[337]의 메모는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단지 5초 내지 6초만 : 이때 너희는 갑자기 영원한 조화의 현존을 느낀다”고 말하면서, 사랑도 생식도 필요 없는 인간 존재 전체를 체험하는 ‘이 느낌’은 뭘 말하는 걸까요? 육체가 껍데기임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하니, 마치 쇼펜하우어가 말한 근원적 의지와의 합일처럼 읽히기도 하고 해탈이나 선정 상태를 말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근데 그것이 단지 5초 정도라니 또 아리송해집니다. 그 외에도 11[334]에서 신의 부재와 자신의 자주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긴가민가 하기도 합니다. 니체 자신이 말하는 건지, 누군가의 인용문을 가져와 비판하는 것인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유고의 구절들을 놓고 이야기해보는 경험은 답답하면서도 어딘지 신이 납니다.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욕심을 좀 내려놓으면요. 유고의 메모들이야말로 멜빌이 말하는 ‘놓친 고래’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몇 주간 비슷한 질문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변하면서요. 은옥샘은 니체의 시간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곡두와 수수께끼’에서 말하듯, 순간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는 말은 대체 뭘까요? 저희는 영원히 회귀한다는 발상이 왜 필요했을지, 그 효과는 무엇일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는 보통 태초(빅뱅)부터 지금까지 불가역적으로 이어져 온 시간이 있다고 여깁니다.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직선적 시간관은 셈족 및 몇몇 부족에게서만 나타났던 전통이라고 합니다. 고대의 다른 많은 문화에서는 순환적이고 가역적인 시간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근대화’가 진행되지 않은 문화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지난주 강의 시간에 읽었던 D.H로렌스의 글(‘허먼 멜빌의 <타이피>와 <오무>’)에서 묘사되는 남태평양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낯선 격변들이 대서양의 종족들과 지중해의 종족들을 흔들어 깨우고 그들의 의식을 한 단계 한 단계 쇄신하는 동안, 태평양이라는 바다와 태평양의 종족들은 줄곧 잠들어 있었다. (...) 맙소사, 꿈을 대체 몇 천 년째 꾸고 있는 건가. (...) 거대한 공백을 닮은 태평양의 심장에는 몇 영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까마득한 옛날의 생명이 신기루처럼 계속되고 있다.”(<미국 고전문학 연구>, 237쪽)

남태평양의 시간은 우기와 건기의 순환이 반복되고, 태어남과 죽음의 순환이 반복되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순환이 반복되는 시간입니다. 한편으로는 허무할 것 같기도 하고, 로렌스의 묘사대로 낙원이긴 하지만 문명인인 우리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조건 같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로서는 이런 시간관 속에서 살 때 세계가 어떻게 감각되고 마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실감은 안 납니다만, 하지만 토론을 하면서 ‘니체가 왜 순환적 시간관을 들고 와야 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관 속에서는 성장, 진보, 발전이 정당화됩니다. 그렇기에 뭔가를 더 축적하게 되고, 내세나 구원을 바라게 되면서 삶에는 목적이 생겨나겠죠. 더불어 결핍과 비하도 생겨나구요. 다시 말해 직선적 시간관 속에서는 이상을 갖는 것, 그럼으로써 세계를 비하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하지만 순환적 시간 속에는 그런 이상-비하의 세트도 없습니다. 발전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니체는 “인류는 더 나은 것으로의 발전을 보여주지 않는다”(11[413])고 말합니다. 이 말은 허무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위버멘쉬라는 극복과 고양의 운동은 지상의 온갖 곳, 온갖 문화에서 전 시대에 걸쳐서 이뤄져 왔죠. 순차적인 진보가 아닙니다.

니체는 순환적 시간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목적론, 언제나 삶에 대한 폄하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이상주의를 깨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모든 것이 반복된다. 확실히 문명인인 우리에게 이 말은 허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들과 가치들, 이상들을 깨버리니까요. 존재, 사물, 실체, 도덕, 신, 자아, 대상 등 우리가 믿고 지켜온 가치들은 거짓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실재성에 대한 자각과 그로부터의 허무주의는 중간단계라고 말합니다. 위버멘쉬의 전제는 허무주의입니다. 긍정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은 염세주의를 거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다음 문제는, 그렇다면 어떻게 더 고귀한 거짓과 더 우월한 목표를 놓을 건가입니다. 그래서 유고 20권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사랑, 열광, ‘신’―순전히 마지막 자기기만의 정교함이며, 순전히 삶으로 유혹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속이는 자가 되는 찰나에, 인간이 삶을 다시 믿게 되는 찰나에, 인간이 자신을 기만하는 찰나에 : 오, 이 찰나에 저것들은 얼마나 부풀어지는지! 얼마나 감탄스러운가! 어떠한 힘의 느낌인가! 힘의 느낌을 갖는 얼마나 큰 예술가적 대승리인가!……인간은 다시 ‘소재’들의 주인으로 되었다―진리의 주인이 되었다!……그리고 인간이 기뻐할 때 그는 언제나 동일한 자로서 기뻐한다 : 즉 그는 예술가로서 기뻐하며, 자신을 힘으로 만끽한다. 거짓은 힘이다…….

예술이고 예술일 뿐이다. 예술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대단한 자, 삶의 대단한 유혹자이며, 삶의 대단한 자극제이다……”(11[415])

<모비딕>의 에이해브는 이러한 ‘힘으로서의 거짓’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고은샘이 선별해주셨던 에이해브의 한 마디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선주? 스타벅! 자네는 걸핏하면 그 탐욕스러운 선주들을 들먹이더군. 선주들이 마치 내 양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무엇이건, 그 진정한 주인은 그것을 지휘하는 사람뿐이야. 잘 들어. 내 양심은 이 배의 용골에 있어. 갑판으로 나가!”(567쪽)

에이해브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선주들의 이익이나 선원들 개개인의 인권, 자식이나 아내의 행복, 고래 기름의 획득 등에 두지 않습니다. 그의 양심은 그의 배, 모비딕을 잡으러 ‘역풍을 뚫고 가는’ 그 위험한 배의 용골에 있습니다. 가족애와 종교성 그리고 직업정신 등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들을 내장한 스타벅은 그런 그를 괴물처럼 바라봅니다. 그리고 “영감님 자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충고합니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힘의 확대와 자기 질문의 해소 외에 다른 가치를 자기 행위 위에 놓지 않습니다. 결과가 파멸일지라도 모비딕을 향해 폭풍 속으로 가는 것, 그것이 그의 합리성이지요. 대체 이런 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비춰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삶이 나를 끌고 간다는 느낌을 한 번이라도 실감한 적이 있나?” 에이해브에 대해 중얼중얼 정리하는 제게 채운샘은 물으셨습니다. 없는 것 같지는 않으나 어딘지 하찮고 일천한 것 같아서 저로서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채운샘은 하루키의 ‘지하층’ 이야기를 하시며 근대 이전에는 우리의 경험과 감각 바깥의 신령한 작용과 불가해성, 즉 귀신들에 대한 경외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에는 인간이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세계가 늘 공존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자는 그렇게 오만하게, 질주하듯, 물불 안가리며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이 무척 공감되었습니다. 우리의 저 내면에는 우리도 모르는 어둠과 악과 심연이 있고,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지배할 수 없는 것들이 늘 있습니다. 인간 안의 비인간성, 즉 괴물성, 동물성, 광기, 폭력성, 범죄성 등. 인간의 이 깊은 곳을 자각하는 자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와 그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만을 가지고 사는 자는 천지 차이이지요. 나라고 할 수 없고, “결코 잡을 수 없는 삶의 환영”(34쪽)이 나와 늘 함께하며, 그야말로 모든 것의 열쇠임을 이해한다는 것. 달리 제 말로 풀어보진 못하겠지만 뭔가 묵직하게 남는 대목이었습니다.

에이해브의 광기를 해석할 것인가가 제게(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인 것 같습니다. 복수와 원한이라는 표현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약자들의 르상티망인가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가 쫓고자 하는 흰고래는 또 무엇인가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채운샘께서 흰고래가 세계에 대해 존재하는 악이며 에이해브의 추격은 그 악(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새로웠습니다. 우리가 자연에 복수심을 원한을 품지 않듯 고래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으며, 따라서 에이해브의 분노는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에이해브는 고통을 길들이고 피한 게 아니라 끝까지 덤벼들고 질문하고, 그 과정 속에서 파멸합니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과도 닮았죠. 고통의 실체를 파고야 말겠다는 질문의 크기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다른 삶(스타벅이 간청한)을 원하지 않을 만큼 말이죠. 그런데 저는 아직 의문이 나고 궁급합니다. 과연 자기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과 부하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그런 그렇게 해서라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변의 누구도 남기지 않을 만큼 무겁고 독단적인 것이 고귀한 걸까? 처음에는 에이해브에 반했다가도 점차 저 자신이 스타벅이나 이슈메일의 편에 서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해석도 바뀔 테고 곰곰 생각을 이어가야겠지요. 이번 주도 신나게 보내시고 토요일날 뵙겠습니다!

다음 주 마지막 10주차 공지입니다.

-다음 학기에 써나갈 ‘나는 어떻게 니체를 만났나’라는 글의 주제와 방향, 개요를 담은 프로포잘을 준비해주세요. 분량은 1페이지.

-<백년의 고독>과 <모비딕>을 읽고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1페이지 분량의 글을 써 봅시다. 니체의 개념들을 마음껏 활용하여 자기만의 해석을 시도해 보아요!

-3교시엔 오찬영 선생님의 특강이 있습니다.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를 읽고 질문을 준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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