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1주차(5.8) 공지

작성자
나영
작성일
2021-05-01 17:45
조회
179
#1. 왜 니체와 문학인가?

우리가 왜 니체로 문학을 읽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저는 문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쩌다 보니 니체가 훨씬 좋아져서 지금은 니체를 좀 더 많이 읽고 깊게 읽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니체로 저의 문제의식을 찾아내고 글을 쓰는 일이 재미있어요. 여태까지 니체 철학과 너무나 정반대로 살았기 때문에 흑역사는 많지만 풀 썰도 많고 아무튼 재미는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니체가 경험주의적 사고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늘 그렇듯이 체험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얼마나 숙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여주듯이, 어찌 되었든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체험할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논하든 결국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될 뿐이라는 사실이지요. 니체로 나를 보는 공부의 한계라는 차원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되 이 경험적 차원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갖게 되는 모든 종류의 인식에는 경험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피하게도요. 다른 말로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편견은 말 그대로 제한적이고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견해입니다. 스스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편견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편견의 대상 혹은 내용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 이렇게 편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편견이 중력의 정령이라면 어떻게 꽉 물어버리고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등을 묻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 타자적 지평으로의 확대를 위한 노력!

#2.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n개의 항해로

저는 이 지점에서 다른 이들의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전혀 다른 존재의 삶을 따라가 보면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조금 더 선명한 길이 보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살지 않은 삶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삶과 접속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니체의 비전 속에서 문학 작품을 읽는다면 나에게 어떻게 읽힐까? 등등이 줄줄이 궁금해지게 되는 겁니다. 오찬영샘의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를 읽으면서 저는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문학이 어떻게 철학이 되는지를 통감했습니다. <백년의 고독>이나 <모비딕>과 같이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입체적 캐릭터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아닌 타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겪을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세계에 대해 각각 다른 해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삶과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그들의 삶의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에이해브에 무게를 두고 모비딕을 읽었는데, 찬영샘의 책을 읽으면서 이슈메일이라는 또 다른 항해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 스타벅이나 스터브의 항해로로도 읽을 수 있고요. 루이샘은 퀴케그, 퍼스, 핍까지, 조연 3인방으로 글을 써 오셨는데 저는 이게 참 매력적이었어요. 루이샘에게는 에이해브나 이슈메일보다 이들이 마음에 콕 들어왔던 것인데 그 끌림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이 셋은 항해 중에 죽음의 국면을 맞이한 인물들인데요. 일종의 죽음 뒤 이들이 다시 맞은 생은 배나 그들이 살았던 자리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와 바다를 향해 삶을 확장한 것으로 루이샘은 해석해 오셨어요. 이렇듯 모비딕은 에이해브의 항해만이 아니라 이슈메일의 항해가 되기도 하고 퀴케그의 항해가 되기도 하고 핍의 항해가 되기도 하고 그렇다면 또 무궁무진한 n개의 항해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저는 찬영샘의 책과 샘들의 과제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 그러니까 제가 해왔던 해석이나 가지고 있던 기준 이외의 다른 기준의 가능성을 볼 때, 저의 느낌과 판단에 유보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코 답답한 유보가 아닙니다! 니체가 말하는 다르게 보는 눈이 될 수도 있고 내 해석으로 세계를 한정 짓지 않는 연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습관적인 해석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음이 곧 힘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는 길이 아니겠어요? 문득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의 이 구절이 에이해브의 대사로 들리더라고요.
 “너 개인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아무도 네게 말해줄 수 없다면, 너 스스로 하나의 목표, 하나의 목적, “그것 때문에”, 높고 고귀한 그것 때문에를 설정함으로써 너의 현존재의 의미를 차후에 정당화하려고 하라. 단지 그로 인해서만 몰락하라 - 위대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위대한 혼을 아끼지 않고 몰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반시대적 고찰 II)

#3. 니체를 느낀다는 것

3교시 ‘내가 만난 니체’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우리는 니체를 읽는 것이 아닌 니체를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나에게 니체가 어떤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지를 보려면 니체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저는 특히 승현샘이 생각하셨던 평등과 니체의 평등이 샘에게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 중인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이 고유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로서의 교사가 되고 싶다는 승현샘의 니체 해석이 기대가 돼요. 경희샘이 작년에 공교육에 대한 믿음으로 에세이를 쓰셨는데, 그때 니체적 의미의 교육학은 불가능할까 하는 질문이 화두였어요. 함께 고민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너그러움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승연샘, 왜 다시 규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규문에 오니 왜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를 함께 풀어갈 승연샘의 에세이도 기대가 큽니다. 작년에 “삶을 긍정하고 싶다는 주제로 3년째 에세이를 쓰고 있다”는 첫 문장으로 모두를 빵 터지게 만들었던 은옥샘 이번 에세이 첫 문장은 결정된 건가요? 4년째 긍정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시는 만큼 올해는 꼭 긍정 졸업하시길 바랄게요.

[과제 & 공지]

1. <우상의 황혼> 73쪽(서문)~104쪽(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꾸며낸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까지 읽고 단편 하나 혹은 구절을 골라 반 페이지~1페이지 넘지 않게 공통과제 쓰기

2. <죄와 벌> 1부, 2부 읽고 니체의 도덕(힘의지도 가능)의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고 싶은 구절 5개 골라오기

3.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서론 1페이지 쓰기. (그와의 만남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4. 다음 주 간식 : 아직 안 정해서 유승연샘, 최난희샘이 하셨으면 좋겠는데 괜찮으실까요? 별로 안 땡기면 알려주세요.

5. 앞으로 지각과 결석은 단톡방에 알려주세요. 왠지 분위기 흐리는 것 같아서 저도 반장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말았는데 함께 소식을 아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입니다.

 

 
전체 4

  • 2021-05-02 09:09
    n개의 항해로이자 자기 세계 바깥으로의 연결을 위한 문학 읽기! 어떻게 문학이 철학이 되는지 통감하셨다는 대목에 감동을 받고 말았습니다...
    문학을 통해 세계를 더 풍성하게 만날 때 자기 자신에게 유보적으로, 그러나 우유부단이 아니라 비-독단(이런 말이 가능할진 모르겠지만)으로서 유보적이게 된다는 말이 와닿았습니다.
    반시대적 고찰 구절과 에이해브의 말도 찰떡 궁합이네요!
    만만치 않겠지만, 다음 학기가 기대가 되네요. 어떻게 니체를 느낄(?)지...
    정성이 뚝뚝 흐르는 공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ㅎㅎ

  • 2021-05-02 09:23
    참으로 알찬 후기 겸 공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나영샘의 숙고의 흔적이 뚝둑 묻어나는 글이었어요. 반장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영샘은 세세히 현장을 훑는 눈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물샐 틈 없는 관찰 속에 포획될 수 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ㅎㅎ 간식은 아직 승연샘과 의논해보지 않았지만 기꺼이 수락하실 걸로 믿고 준비하겠습니다.

  • 2021-05-02 14:46
    간식은 수락해야죠. 감히 매니저 나영쌤의 말씀이신데..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되 이 경험적 차원을 절대시하지말고 타자적 지평으로 확대를 위한 노력! 그게 제가 어렵네요. 말로는 알것도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찌 해야할지!
    전 1학기에 모비딕을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찬영샘 강의에서 텍스트가 어떤 마음(욕망)으로 읽게 되느냐에 따라 캐릭터들이 저마다 입체적으로 다가오고,
    전혀 다른 해석의지를 불러 온다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마지막 주에 합류하면서 저도 놀란 체험을 했습니다. 몇개월 만에 다시 규문에 왔지만 이상하게도 꼭 지난주에 오고 이번주에 온 느낌이랄까요?
    어색함도 없고 그냥 편안하고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구나 라는 느낌이랄까?
    숙제를 매주 해 갈 수 있을지, 또 코로나 때문에 자주 빠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올해 가장 잘한일중 하나가 이 반에 다시 합류한 것이네요. ㅎㅎ

  • 2021-05-04 08:51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렇군요, 경험적 지평을 넘어선다는 건 경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적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 자기 기억과 경험에 구멍을 뚫고 균열을 만드는 일인 것 같으네요. 하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