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2 1차 에세이 발표 (11.19)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1-24 18:11
조회
149
지난 화요일(11.19) 비기너스 세미나 에세이 발표가 있었습니다. 우선 이번에는 1차로 저와 민호, 한역이형, 지영샘, 경혜샘, 진아샘, 난희샘, 현정샘이 발표를 했고 다음주에는 나머지 분들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난희샘께서는 '어른이 된 이후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두들겨 맞아 본 것은 처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발표한 분들이 받은 코멘트가 (발표자들에게는 물론이고) 다음주 발표를 앞두고 계신 분들께도 많은 힌트와 도움이 되었길 기대합니다^^. 우선 사진으로 그날의 열기(?)를 전합니다.




여백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역이형의 노트입니다. 각각의 발표자들에 대해 나온 코멘트들을 기록해놓았네요.

요즘 '정치'에 대해 고민이 많으시다는 미현샘. 제가 제대로 풀지 못한 정치의 문제, 다음주에 들려주실 거죠?


이번 발표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일리치와 푸코와 본인의 문제의식을 연결해서 풀어내신 경혜샘입니다. 다음시즌 에세이도 (벌써) 기대할게요~


전체컷입니다. 사실 현정샘과 미현샘을 비롯한 비움 샘들이 준비해주신 간식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는데 잘 보이지 않네요. 떡볶이와 오뎅탕을 푸짐하게 해주셔서 에세이 끝나고도 며칠을 먹었습니다^^!


많은 독서경험(?)과 불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지식, 그리고 호쾌한 유머로 세미나 내내 뉴페이스답지 않은 존재감을 뿜어내신 난희샘입니다. 두들겨 맞았다고(?) 상심하지 마시고(다같이 두들겨 맞았으니까요^^;) 다음 시즌도 꼭 함께해주시죠!

저는 에세이 발표 중 경혜샘 글과 관련한 채운샘의 코멘트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채운샘은 '대항품행'이라는 푸코의 개념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푸코의 관점에서 저항이란 권력을 제로로 돌리거나 문제의 지점이 완벽하게 제거된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통치성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그것의 작동을 교란시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채운샘은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말한 '예속된 앎들의 봉기'와 일리치의 전문가 건력 비판을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과 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합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서의 앎의 차원이 따로 있고 그것을 반영하거나 왜곡하는 권력의 차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앎이 '앎'으로 승인되는 과정 자체가 권력의 작동이며 '지식'으로 승인되지 않은 것들은 웅성거림으로 흩어집니다.

일리치의 전문가 비판은 승인된 지식에 저항하는 것이 왜 우리 삶의 문제인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일리치는 전문가들에 의한 앎의 독점이 만들어내는 예속화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앎의 독점을 통해 전문가들이 다른 이들을 착취한다거나 특권을 누린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전문가들의 사회'가 전문가들의 서비스에 자신의 존재를 내어준, 상품과 서비스에 중독된 소비자로서의 주체들을 생산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의 앎이 만들어내는 품행의 인도에 저항한다는 것, 대항품행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어떠한 앎들을 수단으로 삼아 어떠어떠한 제도나 권력에 대해 저항하고 봉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문가들의 앎에 의존하기를 그만두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사회에 대한, 경제에 대한, 삶에 대한 앎들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대항품행의 창조일 수 있습니다. 병원을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사법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우리의 과제는 권력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대안권력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속화하고 중심화하는 힘에 종속되지 않는 대항품행들을 실험하는 일입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9-11-24 22:14
    규문의 에세이 발표 시간을 처음 경험한 저로서는 완전 망치로 온몸을 두들겨 맞는 듯한 경험이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어요.

    "에세이 발표 시간, 내 글이 첫 순서였다. 글이 써져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그 글은 나를 떠났고 나에게 그것은 껍질이다. 지금의 나와 부분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 글 자체가 지금의 나는 아닌 것이다. 자의식을 발동시킬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등줄기가 뜨끈했다. 글을 함게 읽은 학인들한테 깨졌다. 살면서 어른이, 나름대로 독립적인 주체로 사는 생활에서 자발적으로 이런 공부의 자리를 찾지 않는 한, 우리 생애에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싫은 소리를 들을 일이 있나? 학비를 내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국 내 결과물에 대해 액면 그대로, 어떤 가림막도 치지 않는 신랄한 비판을 듣겠다는 뜻이다.

    내 글이 스케치같다. 중심 내용이 뭐냐, 그리고 우리가 함게 읽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자기의 문제의식을 개진할 생각을 하야지 우리가 모르는 책이나 영화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반칙이다, 이 문장은 뭘 뜻하는 거냐....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갔다. 글쓰기를 가르칠 때 어떤 텍스트도 나의 삶의 문제와 연결시키라는 주문을 하면서 정작 나는 초심을 잃었다. 아는 것이 어수선하게 많은 것은 실상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자신에 이르는 길에 걸림이 된다. 글은 그 사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새벽에 잠이 깼는데 머리 속에 느낌표가 생겼다. 아, 일리치의 아스케시스와 푸코의 대항품행은 결국 이 말이구나. 내 욕망에 정직하기. 뭐 하나 끊어내는 것 없이 바라기만하고 있는 이 더부룩한 생활을 낱낱이 드러내기. 해묵은 습관 하나와 결별하기. 규문의 에세이 쓰기는 무의식 드러내기다. 무의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삶을 변화시킬수는 없다. 이건 수행이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