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첫 시간(1.7) 후기 (+1.1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1-12 02:07
조회
104
안녕하세요. 드디어 비기너스 시즌 3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드물게도 새로운 분들이 많이 참여해주셔서 조금 긴장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던 첫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3강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첫 시간인데다가 텍스트도 어렵고 푸코의 관점과 문제의식이 분명하게 파악되지도 않는 상황이라 토론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습니다. 푸코가 사용하는 개념들이나 어휘가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다고 하신 분도 계셨고, 강의록이다 보니 중심적인 내용이나 푸코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고, 텍스트의 내용을 자신의 일상과 접목시키기가 어렵다고 하신 분도 계셨죠.

앞으로도 푸코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처음 몇 주는 뒤에 나오는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을 재밌게(밀도 있게) 읽기 위해서 푸코의 어휘나 개념, 관점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고 버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려운 와중에 재밌는 대목들도 있었습니다. 푸코는 18세기 중반에 무렵, 영국 정치가 로버트 월폴이 “평온하게 존재하는 것은 건드릴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시기에 이르러 통치술을 제한하는 원리가 변형됨을 보여줍니다. 과거에 통치술에 가해지는 제한이란 법권리로부터 비롯된 ‘외부적 제한’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즉 국가이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법권리를 자신의 근거로 삼았다는 것이죠.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이성이 “신에게서 유래했거나, 또는 세계가 시작될 때 결정적인 방식으로 부과됐거나, 혹은 오랜 역사 속에서 표명되어”(32쪽) 온 법권리를 무시하고 법의 제한을 넘어서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법권리의 침해는 신민을 복종의 의무로부터 해방시킬 수도 있었습니다(17세기 영국의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이 생각나네요).

18세기에 이르러 문제의 초점이 이동하게 됩니다. 통치에 대한 제한은 이제 통치술의 바깥에 있는 신성한 법권리를 자신의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법의 제한을 초과하는 통치가 아니라 “어설픈 통치, 잘 적응되지 않는 통치, 적절한 것을 행하지 않는 통치”(33쪽)입니다. ‘적법한 통치인가?’가 아니라 ‘적절한 통치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통치의 적절성을 판별하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의 분할선을 설정할 수 있었을까요? 푸코에 따르면 통치이성의 자기제한을 가능하게 한 지적인 도구는 바로 정치경제학이며, 정치경제학의 보증을 통해 작동하는 통치합리성이 준거하는 ‘진실의 장소’는 바로 시장입니다.

경혜샘께서 푸코를 읽다보면 ‘정치’와 ‘경제’를 미묘하게 구분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의문시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푸코가 설명하는 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의 문제에 관심이 많거나 경제를 중요시하는 통치술이 아니라,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영역으로부터 스스로의 작동원리를 이끌어내는 통치술입니다. ‘적절성’과 ‘간소성’을 목표로 삼으며, 자연발생적인 메커니즘으로서의 시장을 통치의 적절성과 간소성(유용성)을 판단하기 위한 최종심급으로 삼는 통치.

푸코는 이러한 통치술의 작동을 ‘형벌의 완화’라는 현상으로부터 포착해냅니다. 즉 18세기부터 등장한 형벌의 완화라는 원칙은 휴머니즘의 발전이나 계몽된 의식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통치합리성의 변환을 나타냅니다. 즉 이제 형벌과 관련하여 “타인, 주변 사람들, 사회 등의 이해관계의 작용”(80쪽)이 문제시되기 시작하는 거죠. 형벌이 이로운지, 어떤 이로움을 갖는지, 사회에 이롭게 하기 위해 어떤 형벌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체형이 이로운가 재교육이 이로운가, 각각의 비용은 얼마나 되는가)가 문제시됩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자유주의는 ‘경제’라는 영역에 무게 중심을 두는 통치라기보다는 모든 영역에 경제적 논리를 적용시키는 통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코는 아직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이와 더불어 특정한 주체성이 형성될 것입니다. 즉 개인들의 지각과 감수성, 품행 욕망 등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논리에 따라 인도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이렇게 ‘통치의 자기인식’이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푸코의 독특한 서술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푸코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야기했는가?’라는 식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 ‘자명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는 가치나 사고방식, 합리성 등의 발생의 조건을 지각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그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합니다. 아마도 푸코는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우리의 품행을 인도하는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유의 방식과 존재의 방식들을 실험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효과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푸코의 서술만이 아니라 푸코가 문제를 구성하고 제기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함께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토론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자, 그럼 각설하고 공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반 일리치의 《전문가들의 사회》를 읽고 a4 한 페이지 분량의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과제의 내용은 인상적이었던 일리치의 사유나 개념을 정리하고 그것을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회적 이슈 등에 적용하고 작동시켜보는 것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니 응용이 어려우시다면 개념이나 사유를 충실히 정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간식은 지영샘과 진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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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2 23:18
    발생의 조건을 지각가능하게 하기. 푸코 읽기가 어려운 건 어휘나 시대적 배경을 모르는 것과는 별개로 푸코의 작업 자체가 우리의 사고 패턴과 너무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단순히 정보습득의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낯선 방법론을 따라가고 배우는 것이 관건인 듯 합니다. 왜 진실진술이라고 표현하며 그게 대체 뭔가 하는 질문에 모두가 얼어버렸던 것이 기억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