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3.7. 주역과 글쓰기 3주차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1-03-12 12:06
조회
120
3.7. 주역과 글쓰기 3주차 후기

오순도순 앉아서 헤매며 주역을 읽다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공부에 긴장감이 생겨 좋기도 하고 아직 낯설기도 합니다. 지난주 토론을 함께 하지 못해서일까요? 이번 주에는 정우샘이 합류하시기도 했고, 괘 하나하나, 계사전 구절도 좀 더 깊이 음미하자는 의미에서 두 조에서 세 조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저희 조는 어떤 궁금증이든 어떤 말이든 아낌없이 다 쏟아내자, 라며 토론을 했더랬습니다. 오전 오후 두 차례의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어우, 시간이 모자랐네요. 4개의 괘가 많기도 했고, 계사전도 앞부분에 주요 내용이 몰려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좀 더 압축적으로 정리해 가지 못한 것도 있는 것 같아 효율적으로 핵심을 잘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 중간에 조별 토론을 정리하는 시간이 없어 내용 공유가 안 된 것이 좀 아쉬웠는데, 담 시간엔 잠깐이라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번 주에는 천풍구, 천수송, 천산둔, 천지비 네 개의 괘와 계사전 4-7장까지를 토론하고 채운샘께서 정리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후기는 강의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하겠습니다.

은 운동성을 본뜬 것

지난 주 토론에서 象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토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의 象이 땅에서 形으로 드러나는데 (在天成象, 在地成形) 성인이 이를 관찰해 괘을 만들었고, 해석을 붙인 것이 주역이라고 하지요. (聖人設卦, 觀象繫辭) 계사전 1장부터 내내 象이 나오는데, 象을 뭐라고 구체적으로 말해볼까 생각하면서도 더 깊게 질문해 보질 않았어요. 참 게으른 공부를 하고 있단 차책 먼저.ㅎ

샘은 『한비자』 「해로편」 의 이야기를 인용해, 설명을 시작하셨는데요. 고대 중국엔 코끼리(象)가 아주 많았다고 하죠. 어느 한순간 그 많던 것이 사라지면서, 이후엔 남아 있는 뼈와 흔적을 보고 코끼리를 상상해야만 했다지요. 이 형상화 과정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추론의 과정이었을 겁니다. 가시화한다는 것은 고정성을 가진다는 의미가 되죠. 비가시적인 것은 고정화 되기 이전의 운동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가시화된 꽃을 보지만, 그걸 피우기 위해 부단히 이루어졌을 운동까지 보지는 못하죠. 그 비가시적인 영역 그걸 표상해내는 것이 象을 추론해가는 과정과 유사했던 것입니다. 물을 나타내는 감괘를 보면, 바깥이 음효이고 가운데 양효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차지만 끓이면 뜨거워지는 것은 뜨거운 성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특성을 포착해 상징화하여 괘상을 만든 것은, 내포된 운동성까지를 괘상으로 드러낸 것이지요. 그래서 괘를 읽는 것도 그 운동성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괘가 나타내는 상황에 맞게 초효에서 상효로 올라가는 방향성을 살피고 괘의 흐름을 보는 것이 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핵심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괘를 정리할 때도 괘상을 먼저 파악하고, 그 상의 특성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괘를 충분히 살핀 후 상황에 맞는 윤리가 무엇인지 대상전을 통해 알아보고, 그 다음 상황에 따른 효사를 살펴봅니다. 발표도, 개인 정리도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군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영역을 사유한 사람

주역은 천지의 변화를 현실에서 구현해 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역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천지의 변화에 인간의 역할을 중요 요소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군자가, 선왕이, 후(后)가, 대인이, 등등 윤리를 구현하는 주체의 태도를 꼭 밝히고 있습니다. 군자는 천지 변화의 기미를 늘 관찰하는 존재이죠.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변화의 ‘과정’, 비가시의 영역입니다. 비가시는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영역입니다, 근데 그걸 본다니, 주역이 이 지점에서 잠시 어렵게 되나 봅니다.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없는 것을 보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보았다’ 라는 것은 바꿀 수 없는 확고부동한 진리가 되고, 목격자라는 지위는 가장 명확한 것을 대변하게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늘 공존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영역에 대한 사유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말씀들일 겁니다.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을 사유를 통해 보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채운샘도 강의에서 가끔 들뢰즈를 인용해 철학과 예술과 종교는 비가시적 영역을 사유한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비가시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까는 좀 더 사유해야할 지점이지만 저희 조에서는 觀, 察, 관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관이 뭐냐, 통찰과 연결된다, 그럼 통찰은 어떻게 이루어지냐, 선판단을 지우는 것이다, 또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라는 토론들이 이어졌었죠. 아마 이건 계속 이야기 해보게 될 거 같아요. 나눌 얘기들이 산적해서 주역이 한껏 재미있어집니다.

은 감수성

저희 토론에서도 재미있게 얘기되었는데, 계사 4장에 나오는 인(仁)을 도올 선생님이 ‘감수성’으로 해석하셨어요.(安土敦乎仁, 故能愛: 삶의 터전을 편안히 하고, 심미적 감수성을 도탑게 한 후에야 모든 것을 아낄 수 있다) 이 감수성을 가지고 조 토론에서는 応하는 것이다, 관계성을 말한다, 관계성이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샘은 강의에서 仁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 ‘어떤 것이 나에게 들어왔을 때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이라는 쉬운 언어로 재풀이해주셨어요. 맹자에서는 인이 선한 본성을 구현하는 단서로 해석되는데, 계사전에서도 비슷한 설명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본성이 우주의 원리를 내가 구현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행위로 드러날 때 내 안에서 소화하여 나에게 영향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걸 감수성이라고 표현하였고, 이걸 꾸준히 실천하며 사는 것, 그걸 善(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이라고 계사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역팀이 종종 깔대기처럼 ‘종일건건’을 외치기는 하지만 그 어렵고 무던한 길에 닿고자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이겠죠. 군자 종일건건!! (君子 終日乾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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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3 13:16
    운동성을 이미지로 추상화하고, 운동성이 작동하는 영역을 통찰하는 두 차원이 확실히 주역을 읽는 데 중요한 두 축인 것 같아요. '선판단을 지운다', '무의식의 영역이다'에 관한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저도 이번에 도올의 계사전 강의록을 읽으면서 '주역에는 계약 모델이 없다'는 구절에 꽂혔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천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천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순응하는지 등등이 궁금해졌습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서 그런가 주역이 참 새롭더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