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NY 1학기 5주차 후기

작성자
hilde
작성일
2021-03-22 20:44
조회
124
우리 조는 니체 유고 관련해서 허무주의, 운명애와 숙명론의 차이, 저항 및 삶의 가치의 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무주의와 이상주의는 왜 하나의 세트로 작동할까? 그리고 니체는 왜 이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니체가 싸우는 허무주의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언급했듯이 이상주의와 결합한 허무주의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존의 가치를 부정하게 한다(부정적 허무주의).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들은 불완전하기에 가치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늙고 아프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런 부정적 허무주의는 언제나 이상과 연결된다. 영원하고 불멸하는 완전하고 전능한 세계가 본질로서 어딘가에 따로 존재한다고 상정한다. 니체가 비판하는 허무주의 유형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수동적 허무주의다. 이것은 우리를 무(無)-의지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결국 무이고, 죽음을 향해 가는 거다. 그러니 삶은 무의미한 것이다 라면서 현존 세계를 부정하도록 한다. 이 두 가지 허무주의 유형 모두 현존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긍정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니체의 적이 된다.

니체는 이렇듯 현존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와 맞서서 싸우려고 했기에 니체의 운명애는 허무주의와 구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운명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운명애가 숙명론과는 다른 것은 분명하다. 숙명론은 일종의 체념론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모두 운명이야,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것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라고 체념하도록 한다. 하지만 니체의 운명애는 “도대체 현존한다는 것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는 것, 그리고 필연성 속에서 우리가 현존하는 모든 것을 사랑(긍정)한다는 것, 여기에 이르는 것이 뭘까?”에 대한 사유를 하는 것과 연결된다. 운명애는 아마도 니체 자신이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것에 대한 저항과 그 몰락 과정에서부터 나온 사유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가치 전도를 위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의사가 되어야 하는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무튼 계속해서 우리 조에서 나눈 이야기를 해보자. 저항과 관련해서는 “힘에의 의지는 단지 저항에 당면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라는 이 구절에서 저항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저항은 무엇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외부 전체와의 저항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힘들의 투쟁 같은 것으로서의 다른 힘들과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나누었다. 삶의 가치문제와 관련해서는 “삶뿐 아니라 생존하는 것 모두를 정당화해야 한다” 라는 니체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했다. ‘삶 자체가 정당화된다’는 말은 삶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또 삶은 도덕적이지 않고 비도덕적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또 그리스도교(삶=죄, 인간=죄인)에 대한 니체의 저항적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기독교적 도덕으로 어떤 행위는 선, 어떤 행위는 악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인들이 강조하는 도덕성도 하나의 편협한 해석에 불과하므로 삶은 그 자체로 선악의 저편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닐까 한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장마, 시간성,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양피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4년에 걸친 이 긴 장마에 대한 마꼰도 사람들의 생각이 신기하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죽겠다는 우르슬라와 마꼰도 사람들의 힘의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라는 등의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장마에 대해 무기력하고 허무하고 권태롭게 대처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어른이 허무에 침잠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이들은 장마를 오히려 하나의 놀이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들에겐 이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삶을 긍정하는 니체적 아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는 등의 생각도 제시되었다. 채운 샘은 이 장마를 역사(문명)의 시간에 대한 애도일 수도 있고 그런 역사 속에서 인간이 받은 상처에 대한 일종의 치유의 시간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토론을 하면서 장마를 일종의 치유의 시간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장마와 시간성의 관계에서 마꼰도 사람들의 순환되지 않는 모습을 보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고만 생각했기에 그런가? 그들에겐 시간이 순환이 아니라 원처럼 흐르는 것 같았다. 원이란 도주선을 내지 못하고 폐쇄적이고 동일적으로 반복되고만 있는 시간의 양상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삶의 시간성이 원의 양상을 띤다. 근친상간이라는 원 안에서 이 가문 인물들의 삶이 계속 반복된다. 우르술라 아마란따도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도 조카와의 근친상간이라는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멀미의 사슬이 될 수도 있는 근친상간에 대한 문제 제기도 없다. 그냥 자신을 충동에 내맡긴다. 그 결과 우르슬라가 생존에 그토록 우려했던 아우렐리아노(돼지 꼬리)가 태어난다. 돼지 꼬리는 폐쇄적인 시간성에 갇혀 삶을 살아가는 부엔디아 가문의 정화를 위해 몰락한다고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문장을 이해해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백년의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가문들은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기 못하기 때문에 양피지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다고 예견되어” 있다는 이 마지막 구절, 이것은 동일자의 욕망만 되풀이되고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는 시간성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폐쇄성의 시간을 일단락시키고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는 순환의 시간과 접속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문제가 니체의 힘의지와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시간성과 힘의지 그리고 영원회귀의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니체 공부를 하면서 계속 사유해야 할 영역이다. 니체의 힘과 힘의지를 자연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힘의지를 인간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힘과 힘의지에 대해 생각할 때 보통 우리가 주체가 되어 그 힘을 쓰는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도 우주의 일부이기에 인간이라는 주체를 초월적 위치에 두지 않고 다른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우주적 차원에서 힘의지를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 상승과 하강의 문제, 생과 멸의 문제와 연관될 수도 있고, 이질적인 것이 서로 대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호 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 인간에게 추가되는 항이 바로 윤리의 문제다. 부엔디아 가문은 어쩌면 이 윤리의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한 것일 수도 있다. 윤리의 문제는 가치 서열의 문제이자 차이를 발생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들뢰즈는 차이만이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윤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침투하는 이질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차이 생성의 문제로 귀결될 수도 있다. 고정된 ‘주체-나’는 없고 매 순간 힘관계 속에서 그 힘의지의 종합의 결과로 발현된 ‘변이되는 나’만 있을 뿐이라는 사유, 이것이 우리가 동일자의 욕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전체 3

  • 2021-03-23 20:34
    “힘에의 의지는 단지 저항에 당면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이 문구를 두고 오고갔던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힘과 힘의지를 인간적인 차원 즉 내 의지로 쓰고말고 할 차원의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 그러고보니 우리는 저항이라고 할 때도 저항해야할 저쪽의 어떤 실체를 상정하고 저항하는 주체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질적인 것이 서로 대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호 내재하고 있음"이라는 쌤의 해석을 보니 저항이란 외부의 어떤 대립된 것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이질적인 힘들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벌써 그날의 토론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는데, 쌤의 후기를 읽고나니 기억이 새롭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1-03-26 10:44
    강의를 들으면서도 느꼈는데, 운명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정말 중요한 것 같네요. 어떻게 양피지의 기록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운명을 체념-허무주의로 겪지 않을 수 있을지. 그 강력한 힘은 운명 뒤에 붙는 '애'에 있지 않을까요? 양피지에 쓰인 것이 몰락이든 돼지꼬리든 간에, 그 다음의 우리 자신과 주변을 어떻게 만들것인가의 문제. 토론, 강의, 생각들이 녹아있는 빵빵한 후기 잘읽었습니다~

  • 2021-04-04 21:31
    마꼰도의 고립이라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가져가다 보니까 어떤 현상을 해석할 때 계속 고립의 문제로 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것이 해석의 고립인가...ㅎㅎ 저는 샘이 쓰신 마지막 구절 해석이 인상적이에요. 폐쇄성의 시간을 일단락시키고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는 순환의 시간과 접속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요.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을 확률은 적지만 이 폐쇄성에 관한 문제는 계속 더 고민해보고 싶은 지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