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1학기 6주차(3.27)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3-23 16:19
조회
123
벌써 첫 학기의 반이 지나갔습니다. 저희는 <백년의 고독>을 다 읽었고, 유고도 두 번째 권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후반전에 들어선 소감이 어떠냐구요? 역시 어렵습니다.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백년의 고독>의 결말은 너무나 난해하고, 니체의 개념들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새로운 용어들(질료, 원자, 생기, 이원성 등)을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헤맬 때 헤매더라도 어떻게 즐겁고 명랑하게 헤맬 것인가가 저희에겐 중요하겠죠?

1교시 토론에서 저희조는 니체가 왜 그렇게 질료, 기계적 필연성, 원자, 종의 보존 등 우리에게 낯선 용어들을 반박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해설 통해 추측해보면, 아마도 니체는 당시에 빈번하게 있어 왔던 힘이나 질료, 유기체나 물질에 대한 논쟁을 광범위하게 참고하고 반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니체는 아무것도 없이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고안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에의 의지’에 대한 발상 자체가 쇼펜하우어의 ‘생명에의 의지’에서 나왔으며, 그것을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당대 이야기되던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무시한다는 것은 개념을 그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의에 가두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니체는 20대 시절부터 생물학과 물리학에 대한 공부를 해오기도 했구요. 저희는 유고를 읽으며 세계를 힘으로 보려는 시도가 싸우고 있는 사고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힌트가 될 만한 지점을 찾았습니다.

“지속, 자기동일성, 존재는 주체라고 불리는 것이나 객체라고 불리는 어느 것에도 내재하지 않는다 : 그것들은 다른 복합체에 견주어서 지속되는 듯이 보이는 생기의 복합체다―즉 예를 들어 생기 속도의 차이에 의해서. 즉 정지-운동, 고정-이완 : 이 모든 대립관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에 의해 사실상은 정도의 차이들만이 표현될 뿐인데, 이 정도의 차이가 특정한 척도를 갖는 광학에서만 대립관계라고 여겨진다.”(9[91])

우리가 우리 자신, 혹은 어떤 대상들에게서 발견하는 모든 규정성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하는 사물들의 윤곽선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그 모든 것은 ‘생기 속도의 차이’ 혹은 ‘정도의 차이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번에 저희가 배웠던 힘의 양적 차이들만이 있을 뿐이지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신체라는 특정한 광학(또는 다른 속도를 갖는 힘들의 다발)과 만나 해석되는 방식이 마치 어떤 지속되고 동일한 것이 있다는 착각을 낳는 것입니다. 마치 질적인 대립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바로 이런 식으로 어떤 힘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종합하는 원리가 바로 힘에의 의지인 것입니다.

해석의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유기체가 특정한 자극을 특정한 코드로 (잘못)해석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몸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니체는 “삶은 지속적인 것과 규칙적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믿는다는 전제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꾸며내고 가리고 동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일은 생명 차원의 본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자 가능성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본능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생겨난 대립관계들을 더욱 실체화하고,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며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힘에의 의지도 있습니다. 니체는 그것을 진리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단지 지속하는 것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요구일뿐인 그 의지는 지나가고 변화하며 바뀌어가는 모든 것을 경멸하고 증오합니다.(9[60]) 그리고 변하지 않는 참된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죠.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삶에 지쳐버리고 삶에 괴로워하는 사람의 의지입니다. 건강한 자는 건강한 신체가 그러하듯 변하는 것, 다른 것, 새로운 것과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니체가 질료나 존재, 최후의 원인으로서의 원자를 반박하는 것도 그런 사고로부터 진리를 원하는 의지 즉 영원한 어떤 것이 있기를 바라는 쇠약한 갈망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채운샘은 강의에서 차이 혹은 becoming의 차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광학에서 사물은 대립관계나 질을 갖고 나타납니다. 이것은 고정성과 지속성을 가진 존재, being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이 가시세계에서는 차이의 차원, 무언가가 되어가는 변화의 차원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묘사했듯 우주에는 실제로 ‘생기의 차이들’ 언제나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변화하는 becoming만이 존재합니다. A가 B로 변했을 때 우리는 변하기 전의 A와 변한 B만 볼 수 있을 뿐, A에서 B에 이르는 그 사이의 차원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될 수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A를 A이게 하는, A가 아닌 여러 조건과 관계들을 보려 하지 않고 어느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A 자체를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죠. 감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도 A는 곧 B로 변합니다. 그렇다면 A가 있고 B가 있는 것이 아니라, A에서 B로 되어감 혹은 다시 B에서 무언가로 되어감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려운 말로 A와 B사이의 미분비 혹은 사이값만이 있는 것이지요. 각각은 물결 같은 힘 관계의 유동을 순간포착한 것일 뿐입니다.

이 외에도 토론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니체가 찬사를 말하는 구절이었습니다. 저희조는 찬사와 감사하는 마음을 같은 것이라고 보았고, 왜 니체가 찬사가 행위자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했는지 고민해보았습니다. 날씨나 작품이나 축제나, 무언가 우리를 기쁘게하고 기분을 고양시키는 일을 겪을 때 우리는 무언가 그 느낌을 쏟아놓을 대상을 필요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언가를 꼬집어 칭찬하거나 반대로 비난하는 것은 힘을 배출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에게 판단자의 권리를 주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무언가에 감사하는 마음 역시 어떤 주체에게 명예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느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선의의 복수’라고 표현한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역시 아리송했죠). 나영샘조에서는 ‘선의의 복수’에 주목해 찬사와 감사하는 마음을 더 섬세하게 나누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긍정하고 평가할 줄 아는 것은 강자의 특징입니다. 또한 칭찬과 더불어 복수와 질투를 일삼는 것은 약자의 특징이지요. 그러니까 힘이 고양되는 느낌의 찬사와 복수하는 감사를 구분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나름 세심한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의 유고는 이처럼 수수께끼 같아서, 니체에 대한 이전의 해석들을 부딪혀가면서 우리가 시나리오를 써보고 바꿔보는 과정에서 더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공지를 마치겠습니다. 옮기지 못한 내용은 현주샘의 후기에서 확인해주세요! 이제 드디어 <모비딕>에 들어가네요. 흰 고래를 만나려면 아직 멀긴 했지만 재밌게 읽고 토론해보아요~

[과제 및 공지]

-1. <유고> 20권 222쪽까지 읽고 힘과 관련된 구절 10개 뽑기(이유와 나름의 해석을 짧게 붙여주세요)

-2. <모비딕> 30장'파이프'(작가정신 출판사 기준 177쪽)까지 읽고 니체의 힘 개념과 함께 생각해볼 구절 3개 뽑기

-3. 그동안의 자기주도학습 정리해서 공유하기. 자신의 주제 및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 정리해오면 될 것 같습니다. 텍스트별로 팀을 이뤄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4. 다음 주 간식 : 순이샘, 루이샘

-5. 과제는 금요일 밤까지 숙제방에 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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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24 11:08
    존재는 언제나 변화해가는 과정에 있지만, 우리는 보통 그 변화 (A A' A'' A'''),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이, 변화는 사유로서 포착할수 있다는 말로 이해되네요~~ 이것도 힘에의 의지로서 해석의 기술이겠지요. 공지임에도 불구하고 길게 쓴 후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