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NY 1학기 2주차 후기(2021.2.27)

작성자
인영
작성일
2021-03-03 12:46
조회
174
“이것이 생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 니체로 읽는 문학”

니체의 ‘힘의지’ 개념으로 읽는 [백년의 고독, G.G. 마르케스(1928년~2014년)]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과 관점이 아닌 니체의 렌즈로 [백년의 고독]을 읽어본 첫 시간이었습니다. 니체로 읽는 문학이지만 동시적으로 문학을 통해 니체를 이해해 보는 다양한 길을 내보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이 시도를 이끌어 가는 힘은 우리의 질문들이고, 지난 공지에서 민호 샘이 우리가 이번 학기 내내 품고 가야 할 질문을 다음과 같이 꼼꼼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잘~ 품어보려고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복붙신공!)

- 지금까지 우리는 사건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 기존의 관점을 힘으로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일지,

- 니체가 말하는 세계를 힘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 왜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부제를 “모든 사건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시도” 라고 했는지.

이 질문들을 함께 이끌어 갈 샘들과의 첫 세미나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조가 나눠지며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만큼 서로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 수 있었는데 혼자 읽었을 때와는 매우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샘들과 나누었던 다양하고 풍성한 해석들이 새로운 생각의 길들을 내도록 서로 자극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조촐한 웃음 맛집을 발견한 것처럼 함께 웃음을 맛보다 보니 첫 세미나를 앞두고 여러 감정으로 무겁고 긴장된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몹시 다행이라 여겨졌고 조원 샘들과 함께 이러한 기운을 쭉 이어가 서로의 힘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도움 주기도 하고 또 도움 받기도 하는 세미나를 만들어갔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우선 저의 자기 주도 학습의 첫 목표는 1일 1 쇼펜하우어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는 2019년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함께 읽었던 니체를 이해하기 위한 서브 텍스트였습니다. 민호 샘은 왜 과거 텍스트로 돌아가는지를 지적했는데… 그래서 스스로 이 책을 왜 선택했는지 나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이 책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열등감과 아쉬움? ‘쥐어줘도 왜 읽지를 못하니?’와 같은 자책감, 이 책이 많은 명사들에게 영향을 준 점에 대한 동경과 열망 조금, 지금은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그 읽히는 만큼의 기쁨과 충만감에 대한 상상 만땅, 특히 니체에게 영향을 많이 주고 니체에게 비판 받은 부분 등 니체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 이득 등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차원까지 총 종합돼 문득 이 책이 읽고 싶다고 느끼고, 그 중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 또는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을 이유라고 덧붙이지 않았을까요? 여하튼 그 의도나 이유는 완벽하게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지금 스스로 읽고 있는 행위로 드러난 힘의지가 존재 전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제 나름대로(자기주도학습) 니체의 힘의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니체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에서 ‘의지(Wille)’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의지’란 일반적인 의미(소망, 목적, ~을 바라다, 의욕, 마음)의 뜻 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른 맹목적인 감성인 ‘욕망’, ‘갈망’, ‘추구’, ‘노력’, ‘고집’ 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식물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 광물이 결정을 만드는 힘, 나침반이 북쪽을 향하는 것, 중력의 작용,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힘을 의지라고 표현합니다.(같은 책, 44쪽) 표상이란 어떤 물체나 대상에 대해 갖는 심상을 표현하는 말이며, 뇌에 마음이 깃든 것으로 보고 신체도 표상에 포함됩니다.(같은 책, 41쪽)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현상계를 ‘표상으로서의 세계’로, 물자체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로 완성하고자 합니다. 특히 신체와 성에 주목하여 신체와 성을 자연적 본질로 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 합리적, 정신적인 존재에 앞서 감성,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육체적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동안 인간의 이성, 정신의 자유 의지가 인간의 행동과 삶을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그것이 착각이자 허구로 폭로되고 (유고,1[172] 손이 없는 라파엘로 * 레싱, [에밀리아 갈로티] “라파엘이 불행이 손이 없이 태어났다고 해도, 가장 위대한 회화의 천재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신체의 의지가 지배하는 욕망의 현실이 인간적인 삶의 본질적 모습이 입증됩니다. 의지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자기 충족이라는 자기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지향하지 않으며 아무런 근거나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자생적인 힘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충족은 가능하나 영원한 충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맹목적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필연적으로 고통과 고뇌의 연속일 뿐이라고 합니다. (같은 책, 819~820쪽,해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삶의 필연적 고통에서 유일한 구원은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체념, 염세주의를 니체는 비판하고 쇼펜하우어의 ‘의지’개념을 다음과 같이 넘어서고자 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에서 가장 명백히 알려지는 것은, 생명 있는 것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증대Mehr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힘에의 의지’는 일종의 ‘의지’인가, 아니면 ‘의지’ 개념과 동일한 것인가? 그것은 욕구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인가? 아니면 명령한다는 것인가?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물 그 자체’라고 하는 ‘의지’인가? : 내 명제는 이렇다 : 기존의 심리학에서의 의지는 정당화되지 않은 일반화라는 것, 그런 의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기존의 심리학은 특정한 형태의 의지 하나를 다양한 형식으로 파악하는 대신에 의지에서 내용Inhal과 어디로Wohin를 빼버림으로써 의지의 성격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가 그 최고 단계의 경우다 : 그가 ‘의지’라고 부른 것은 순전히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삶에의 의지’는 더 문제가 안 된다 : 삶은 힘에의 의지의 개별 경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이 힘에의 의지의 이런 형식으로, 즉 삶에의 의지라는 형식으로 이행하고자 한다는 것은 완전히 임의적인 주장이다”[유고(14[122],1888년 초-1889년 1월 초)(니체전집 21)] 여전히 이해될 듯 아닌 듯 아슬아슬한 기분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반박하며 나아가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로서의 세계’를 조금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상 자기 주도 학습을 위한 정신 없는 단락들을 마칩니다.

이번 주 2교시 과제는 [백년의 고독]에서 니체의 ‘힘의지’ 개념과 연관해 각자 해석하고자 하는 세 장면을 엄선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그저 살아가는 힘, 역동, 에너지, 의지, 생명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마콘도’라는 대지는 니체의 ‘생명 있는 것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증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를 가장 강렬하게 실행하는 실존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넘쳐나는 성충동도 대지의 연장 선상인 인간의 신체의 생명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힘의지로 읽힙니다. 그리고 두 번 째, [백년의 고독]에서 첫 문장이 텍스트 전체를 아우르고 이끄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총살대 앞에 설 처지가 되었을 때,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부친을 따라 처음으로 얼음을 구경하러 갔던 먼 옛날의 어느 오후를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책의 제 1 장, 첫 문장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첫 문장의 힘은 읽는 순간 이 대령이 어떤 역사의 소용돌이로 죽게 되는지 궁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느끼게 만듭니다. 거기다 ‘총살대’ 앞에선 인간, 그 신체와 의식의 힘이 작동하는 방식이 매우 아이러니하게 묘사됩니다. 곧 총살로 신체는 끝장나게 생겼는데 의식은 한가롭게 추억에 잠깁니다. “삶에 대한 미련은 아침 안개와 함께 사라지고, 이와는 다른 호기심이 생겨났다” 다른 호기심이라니 이것은 어떤 감각일까요? 총살대에 선 아르카디오는 저 멀리 레베카의 작별 인사에 손을 흔들어 답하고, 멜키아데스의 주문소리, 어린 시절 아내의 종종 대는 발걸음소리, 시체가 된 레메디오스의 딱딱해진 코끝 등 감각에 남은 어린 시절 강렬했던 인상들을 떠올립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도 마찬가지로 총살대 앞에서 어린 시절 얼음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죠. 대령은 이 얼음을 처음 만졌을 때 펄펄 끓고 있다고 느낍니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령의 감각은 얼음이라는 차가움을 처음 인식하자 너무나 놀라워 해독이 되지 않은 상태로 그 차가움을 자신의 감각 중 가장 강렬한 표현으로 뜨겁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의식 이전에 감각이 신체에 우선 하는 힘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인상의 일부를 강하게 붙들게 되는 것이라고 조원들과 함께 정리한 것이 맞는지 기억이 조금 가물하네요… 마지막으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의 ‘가계도’, 반복되고 뒤바뀌는 이름들, 이름과 인물의 본성과 행위, 운명이 반복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아르카디오적인, 아울렐리아노적인, 레메디오스적인, 아마란타적인, 우르술라적인’ 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을 정도입니다. 여러 세대로 이어지지만 결국엔 아르카디오적인, 아울렐리아노적인 두 본성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가계도의 인물들은 그들의 이어져 내려오는 신체(대지와 분리될 수 없는 삶과 죽음으로서의 신체)와 본성이 ‘~적인’ 실존의 힘의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 부분에 대해 다음 시간 과제로 좀 더 생각해 보고 샘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평하는데 여기서 마술과 사실의 차이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매우 모순적인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히려 리얼과 마술의 경계가 모호함에 대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우선 지안 샘이 ‘사건화’ 라는 개념을 설명해 주신 것에 저는 강하게 끌렸습니다. 사건을 인과 관계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해석의 무능력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세계는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죠. 니체는 무수한 힘들과 다수적이고 복수적인 힘들이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로 드러난 것이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원인이자 결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신체라는 사건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의 관점이 사실을 보증할 수 있을까요? 흐르는 강물 속에 있는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절대적인 신, 도덕을 상정하지 않고 어떻게 무엇으로 사실을 보증하죠? 그렇다면 힘에 의지로 사건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을 ‘사건화’로 이해해도 될까요? 이 '사건화'로 인해 마술과 리얼의 구분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경계를 갖게 될까요?

그와 연관시켜 이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고독’을 여러 관점에서 해석하게 하는 힘에의 의지를 다양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각자 어떻게 사건화 시키는가, 그 사건화에 징후로 드러나는 각자의 욕망, 원함을 읽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백년의 고독]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멜키아데스의 예언이 담긴 양피지(마콘도의 몰락)를 근친상간(금기)에 대한 징벌로 신의 예비하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대상화, 수단화 하는 문명의 이기를 문제 삼고자 한다면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투쟁에서 자연의 승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지화 침략, 이념 전쟁, 강대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독재 정치의 희생양이 된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적인 관점이라면 인물들의 끝없는 호기심, 성충동 등을 영원한 충족은 될 수 없는 맹목적 삶에의 의지들로 보고 그로 인한 인간 삶의 고통과 고뇌의 연속으로 ‘고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관점과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 한 곳, 자신을 강하게 머물게 하는 것, 그곳에서 자신의 해석이 발동됩니다. 그렇게 해석하게 하는 자신의 충동을 힘의지라고 이해해 보면 이 충동의 주체는 바로 ‘나’ 일까요? ‘사건화’ 라는 생명을 부여하는 ‘힘에의 의지’가 주체 일까요? 그것이 존재 그 자체일까요? 하나 분명한 것은 ‘나’라는 의식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식도 니체에 의하면 신체로부터 출발한 충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앗, 아직 정돈되지 않은 질문만 한 뭉치라서 좀 휘청이다 보니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로 후기를 급!!!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신입 직원이 도장 하나를 만들어 오라는 업무를 지시 받았습니다. 그 직원은 내게 와서 도장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고, 저는 ‘여기 여기 이렇게 돌아서 딱 보면 보여요’ 하며 알려 주었습니다. 그 직원이 다녀와 하는 제게 하는 말이 ‘점심 시간 때 자주 지나가던 길인데 거기에 도장 가게가 있는 줄 오늘 첨 알았어요. 생각지도 않은 곳에 딱 있더라구요!’ 마치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난 도장 가게를 발견한 것 마냥 웃는 모습에 저도 함께 웃었습니다. 자신이 찾고자 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반대로 찾고자 원하는 곳, 이미 그곳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만 쓸쓸해졌습니다. 저의 ‘고독’이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체 10

  • 2021-03-03 17:44
    왕~ 인영샘의 엄청난 부활(?)이 뿜뿜 느껴지는 후기인데요!!
    쇼펜하우어를 읽으신다는 다짐에 덜컥 걱정이 되었지만, 후기를 읽고보니 왠지 응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여전히 걱정은 됩니다만).
    쇼펜하우어가 말한 표상과 의지를 잘 정리해서 알려주시면 좋을거라 기대게 됩니다! 물론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는 어떻게 다른지도요 ㅎㅎ 힘주지 마시고 고것만요
    토론 정리할 땐 제가 힘이빠져서 그런지 몰랐는데, 백년의 고독을 엄청나게 풍부하게 읽으셨네요!!
    물음표도 많고, 멀리서 온 개념들도 엮이고... 이번주 토론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1-03-03 18:51
    인영샘이 읽는 마르케스. 마술적 사실주의가 극대화되는 느낌이에요. 인영샘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으면서 조시마장로에게 푹 빠졌던 기억이 선명해서, 올해 읽을 소설에서는 또 어떤 캐릭터에 매료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 샘의 과제 덕분에 풍부한 토론이 되어서 즐거웠어요. 웃음 맛집의 비결은 아무래도 인영샘인듯.
    열심히 달리기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라는 거 잊지 마시고요. 후기를 읽으니 기쁘면서도 어디선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해서 기쁨으로 일단 꾹 누르고 있어요. 민호샘과 저의 이 (근거 있는) 염려가 기우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과제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 2021-03-05 22:41
    인영샘 이렇게 풍부한 내용의 후기를 써주시다니! 샘의 열정 넘치는 숙제글들과 오버랩되면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2교시 조별 토론시간에 언급한 사건에 대한 내용은 니체 유고 127쪽에 나오는데요. 니체가 인과성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했던 구절이 떠올라서 말씀드렸던 것 같아요. 니체는 우리가 사건이 어떤 연속적 습관에 의해 일어난다고 여기고 이것을 인과관계라고 말하면서 이를 확고하게 믿고 있는데 그건 사건을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저는 특히 백년의 고독이 이런 점을 매우 잘 보여준다고 생각이 들었는데요. 예를들면 소설은 계속 미래를 예언하며 전개가 되는데, 첫 문장부터 그렇죠. 우린 여기서 아 결국 부엔디아 대령은 죽는거구나 - 라고 생각하고 이 결말을 염두해 두고 책을 읽게 되는데 번번이 그 사건은 이상하게 빗나가죠. ^^ 마르케스는 많은 우연들이 겹쳐지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통해 사건이란 결코 인과적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어요. 들뢰즈도 <천개의 고원>에서 단편소설 예를 들며 사건은 기존의 인과를 단절시키며 발생한다고 했는데 그런 점과도 연결되어 이해가 되었어요.

  • 2021-03-05 22:50
    아 그리고 (마술적?) 리얼리즘에 관해서, 그걸 마술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조별 토론 때 팩트? 중심의 리얼리즘과 좀 다른, 리얼리즘을 얘기했었죠. 주영샘과 제가 얘기했던 들뢰즈가 푸코를 기억하는 방식을 샘들하고 공유하고 싶어서 들뢰즈의 <디알로그>에서 가져와 붙여 봅니다. ^^ (들뢰즈 읽지 않으신 분들 많은데 자꾸 얘기해서 뭔가 좀 죄송합니다. 너무 좋아하기도 하지만 실은 제가 유일하게 읽은 철학책이 들뢰즈 책 2권 뿐이라 ㅋㅋㅋ) 아무튼 이 구절은 너무 멋있어요.
    나는 푸코에 대해 말하고, 그가 나에게 얘기했던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떠들고, 내가 그를 보는 대로 상세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별것이 아닙니다. 단, 망치로 두드리듯 끊어서 강하게 발음하는 목소리, 결단력 있는 몸짓, 마른 나무에 불이 붙은 듯 활활 타오르는 생각들, 극도의 주의력과 갑작스러운 종결, 그 부드러움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위험'을 감지하게 하는 웃음과 미소, 이 모든 것 일체를 실제로 내가 만날 수 없었다면 말입니다. 이 고유한 조합으로서의 전체가 갖는 이름이 바로 푸코일 것입니다. (디알로그, 25쪽)
    그럼 이만 총총.

    • 2021-03-06 03:50
      덕분에 푸코, 들뢰즈가 독해하는 니체를 만날 수 있으니 함께 공부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거에요. 앞으로도 주영샘과 함께 맘껏 풀어놔 주세요. 푸코 1도 몰라 두 눈 반짝 반짝이며 들을 준비돼 있습니다^^ 아울렐리아노가 레메디오스를 떠올리는 그 묘사 부분을 보고, 샘들이 말씀해 주셨던 들뢰즈가 푸코를 떠올리는 부분이군요! 멋진 구절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1-03-06 20:40
      이거였구나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외우고 싶어요 짱멋있음. 이런 찐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니!!

  • 2021-03-06 17:53
    "자신이 찾고자 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반대로 찾고자 원하는 곳, 이미 그곳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만 쓸쓸해졌습니다. 저의 ‘고독’이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염없이 긴 문장 끝을 장식하는 위의 문장을 읽고 인영쌤을 용서해드리기로 했습니다 ㅎㅎ
    무지 길게 쓰셔서 한숨부터 나왔거든요~~
    원하면 보이고 원하면 존재하는 이 세계가 마술ᆢ근데 왜 쓸쓸할까요?

    • 2021-03-08 00:10
      니체는 이 삶이 전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는 스스로 원하고 찾고자 하는 삶을 지금 매순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자책을 많이 해요. 여러 감정들로 드러나겠지만 때때로 스스로 원한 것조차 부정하고 삶이 무의미하다, 나는 무가치하다는 자의식이 발동되고 조석으로 쓸쓸해지고는 하지요.^^ 잘~ 사는 게 뭔지,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런 질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 이 삶이 전부, 스스로 원한 삶’이라는 말이 저를 니체의 긍정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여전히 반응적이고 부정적이 허무주의의 추로 저 스스로를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발 딛고 있는 현재의 삶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킬 때 느껴지는 고독은 분명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고독과는 전혀 다른 데카당스적인 고독이죠. 저는 그 고독속에서 니체를 만났을 거라 생각되요. 앞으로 에세이 주제로 열심히 풀어보겠습니다!

    • 2021-03-06 20:37
      아 길이 왜여ㅠㅠㅋㅋ고독한 녀자 인영샘의 큰 기쁨이란 말이에요. 10줄 이상 1000줄 이하로 자유롭게 쓰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왜 긴 글에 한숨이 나오는가,,, 피로의 표출인가? 저는 난희샘의 그 힘의지가 궁금합니당

      • 2021-03-08 00:20
        (우선 눈물 좀 닦고여...) 사주에 나무가 많고, 물이 긴 세월 들어와 있으니... 만능수경재배로 한없이 , 네버엔딩 잡생각이 뻗어나가고 있어요... 니체 공부를 통해 '정원사에의 의지(?)'를 산출하여 '고독한 녀자'의 공허한 기쁨에서 벗어나고 싶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