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NY 1학기 4주차 후기(2021.3.13)

작성자
윤수연
작성일
2021-03-14 12:01
조회
149
3/13 4주차 민호샘 조 후기입니다.

 

1교시

 

공통으로 인용해온 문장들부터 시작해서 각자 궁금했던 내용에 대해서 키워드별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영원회귀

정말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으로 니체의 철학 중 가장 난해하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시간이 돌고 있다는 것부터 당황스럽습니다. 무엇이 어디로 어떻게 회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회귀를 한다면 생성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 우리가 순간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해왔던 온 우주에 대한 긍정을 전제하며, 그래서 우리는 보존 의지에 따라 이성이 위조해낸 존재자들의 대립을 걷어내고 생성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일까요? 아무튼 순간을 온전히 만났을 때 생성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한데, 사실 그냥 모르겠습니다. 매번 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니체는 참 매시간 새롭습니다. 영원회귀가 테마인 3학기가 기대됩니다^^

 

-위계질서

아직도 읽을 때마다 따끔하는 키워드입니다.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자유와 한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정도가 충돌할 때, ‘인간보다 더 높은 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의 발전을 어떻게 희생시킬 수 있는가?’ 대담하게 느껴지지만 불가피한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근대 민주주의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저로서는 아직 ‘서열’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사실 “진리”가 해체된 상태에서 여러 다른 종류의 삶들이 투쟁을 벌일 때, 투쟁의 방향성으로서 “진리”를 대신할 ‘좀더 높은 종류의 삶’, ‘삶의 종류들 간의 위계질서’에 대해 상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하고, 니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쾌락과 불쾌

‘권력 감정의 간지럼으로서의 쾌락’이라는 구절에서부터 시작하여 쾌감과 불쾌가 힘에의 의지와 무슨 관련이 있을지 토론했습니다. 모든 쾌락이 권력 감정에 수반되는 것은 아니며, 마비적 쾌락과 달리 ‘권력 감정의 간지럼으로서의 쾌락’으로 표현된 승리의 쾌락은 ‘저항하는 것, 극복해야 하는 것을 언제나 전제한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니체가 말한 ‘심연 앞에서의 명랑함’이 생각나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과 권력 감정의 쾌락이 공존하는 상태가 어렴풋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쾌락 현상과 불쾌 현상은 지적’이라는 것, 따라서 쾌락과 불쾌를 대립적으로 이분하는 것은 지적 표상일 뿐이며 결국 강한 자를 추동하는 것은 단순한 쾌불쾌의 감정이 아닌 그 기저에 놓인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극복에 수반하는 불쾌와 고통을 명랑하게 긍정할 수 있는 걸까, 제 마음대로 해석해보기도 했습니다.

 

-도덕

비도덕적이기 위해서는 많은 도덕성이 필요하다는 구절과 함께 도덕을 질병에, 유럽인을 환자와 관찰자, 생리학자로 비교하는 내용에 대해 저희 조에서 다양한 해석이 있었습니다. 저의 후기니까 제 맘대로 저의 해석을 말씀드리면, 저는 이 구절이 ‘유럽인은 진정으로 도덕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의 도덕에 대한 질문을 읽으며 계속 들었던 의문이 있는데, ‘도덕을 거치지 않고도 비도덕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가’ 였습니다. 강하고 비도덕한 자는 외부의 도덕을 완벽하게 ‘인식’하여 벗어난 자인지, 애초에 도덕이 입혀지지 않는 자인지, 전자 후자 모두 찜찜한 구석이 남습니다. 도덕은 결국 스스로 자기 파괴로 이끈다는 말에는 역설적으로 도덕을 거쳐 진리를 해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춤을 추기 위해서는 걷는 법을 철저히 연습해야 한다는 말도 떠오르며 이런저런 결론나지 않는 생각이 오갑니다.

 

-음악(예술)

니체가 아닌 이상 니체가 받은 감동을 언어를 통해 느끼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니체가 바그너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 이유는 미학적 기교와 무거운 음울함에 가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음악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니체의 음악에 대한 철학이 어떤 것인지 살짝 엿보이기도 하고요. 바그너 음악을 듣고 직접 느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엔 귀가 어두워서 아쉽게나마 얼른 <니체의 삶>에 나온 바그너에 대한 해석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2교시

 

이번 파트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의 고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우르술라

시력을 잃고 신체에 의한 고독에 빠진다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력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의 강화를 얻었고, 보이는 것을 걷어내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시각을 벗어난 우르술라가 시각을 초월한 노년의 지혜를 얻고 자신의 아들, 아마란따, 레베까까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통해 좀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 품어줄 수 있게 되는 장면을 많은 샘들께서 인용해주셨습니다. 우르술라는 고독을 마주하였을 때도 모든 것을 긍정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란따

아마란따의 고독은 평생동안 자신의 소망에서도 소외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해를 받으며 속죄하듯 살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란따가 자신의 고독을 긍정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자신의 죽을 날을 받아놓고 수의를 만드는 일에 몰입하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습니다. 수행에 몰입하며 아마란따는 비로소 자신을 억누르던 죄책감을 마주하고 고해성사도 필요 없이 가벼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전쟁 이후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고독했습니다. 아마란따가 자신의 감정을 감지하였지만 죄책감이라는 내면의 다른 감정과의 충돌로 인해 소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감정의 소외로 고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대령이 어느날 아주 오랜만에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마르께스에게 가지만 부정당하고 다시 허무의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또 언젠가는 우연의 작용으로 어쩌다 서커스단을 구경했지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남은 공허 앞에서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을 때, 자신이 이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다시 비참한 고독과 얼굴을 맞대게 되었’을 때가, 대령 인생에서 가장 고독했던 순간이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제서야 대령이 죽게 됐다는 사실도 무슨 의미일지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

삼천 명이 죽은 시위를 혼자 기억해야 한다는 고독,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두려움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고독에 빠져 멜키아데스의 방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물리적으로도 감금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유일하게 했던 말은 ‘삼천 명이 죽었었다’ 였습니다. 아우렐리아노 대령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또 다르게, 오로지 두려움이라는 한 가지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의 고독이 느껴졌습니다.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보면 쾌락을 즐긴다기보다 중독적, 맹목적으로 쾌락에 끌려다니는 느낌입니다. 마꼰도에서 자본주의적 소비의 자극에 가장 먼저 빠지고 그 이후로도 자본주의가 무르익으며 더더 빠르게 굴러가는 마비적 쾌락에 매달리는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또한 나름의 고독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마꼰도 주민 모두가 근대화가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번지면서 조금씩 소외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구경하러 매일 거리에 나오고, 비참한 노동에 매이고, 폭발하는 욕망에 끌려가듯 즐거움을 넘어 중독적으로 파티와 소비에 빠집니다. 결국 모두가 각자의 고독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서는 인물들을 알다가도 모르겠고, 특징이나 성격, 상징하는 바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그 점이 또 백년의 고독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풍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 사실은 우리 인생도 그 인물들처럼, 그 인물들보다도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점에서 백년의 고독도, 책을 읽고 여러 해석을 나누는 2교시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쓰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길어졌습니다. 니체를 많이 공부하신 분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제가 가져가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침 12시 전까지는 산송장인 제가 매주 기대되는 마음으로 토요일에 일찍 일어나게 되네요. 다음주도 기대됩니다^^
전체 8

  • 2021-03-14 17:16
    우와~~ 느낌적인 느낌들이 남발되며 중구난방 오가던 저희의 토론이 이렇게 요연하게 정리되다니! ㅎㅎ 저의 후기니까 마음대로 해석해본다는 구절이 훅 들어오네요. 저는 주로 니체의 '정직성'을 생각했는데, 도덕을 거치지 않고 비도덕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정통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인 것도 같구요. 키워드와 해석들이 잘 정리되어서 좋네요!! 꼼꼼히 하시던 메모가 정성스런 후기가 된 건가요? 신속한 후기 감사합니다~~!!

    • 2021-03-17 22:13
      아유 감사합니다ㅎㅎ 머리에 한글자라도 남아 있을 때 써야할 것 같아서 호다닥 써봤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정직성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읽을 때마다 뉘앙스가 달라지는 구절인 것 같습니다. 뭔가 넓게 생각해나가다보면 정직성과도 결국 한줄기로 모일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당!

  • 2021-03-15 00:00
    ㅎㅎㅎ그래도 바그너 음악에서 진짜 생기가 느껴지나 안 느껴지나 들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당.
    이거 니벨룽겐의 반지 짧은 버전인데 들어보셔요. 밤에 잘 때 켜놓고 자는 거는 비추. 꿈에 귀신 나와요.

    https://www.youtube.com/watch?v=-HujjNQPv2U&t=3258s

    • 2021-03-17 22:20
      오 감사합니다! 방금 틀어봤는데 저는 이정도면 생기가 넘치는거 같은데... ㅎㅎ 니체가 했던 말이 무슨 소린지 감이라도 잡아보려면 좀 더 여러번 들어봐야 겠어요ㅋㅋㅋ

  • 2021-03-16 11:29
    니체의 철학은 단어, 낱말 자체에 치중하면 더욱더 어려워지는거 같아요. 특히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더더욱! 우리가 세속적으로 바라는 불멸, 영원, 회귀 이런 단어에 대한 환상을 개입시키기 때문아닐까요. 후기 작성하느라 수고하셨슴다!!!

    • 2021-03-17 22:34
      맞아요! 그래서 일단 지금은 스윽 넘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나하나 분석하려고 하니까 절대 분량도 못읽고 머릿속이 붕괴할 것 같아요. 이전에 가졌던 편견 없이 단어를 새롭게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네요ㅜㅜ

  • 2021-03-17 09:45
    ‘도덕을 거치지 않고도 비도덕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정말 좋네요... 니체는 단지 도덕 바깥에서 그것이 틀렸다고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도덕에 대해 가장 깊이 고민한 사람이 아닐지, 어떻게 긍정적,능동적으로 도덕적이게 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했던 게 아닐지... 감히 추측해봅니다.

    • 2021-03-17 22:40
      네 저도 그런 생각이 계속 듭니다! 저도 니체가 누구보다 도덕 안에서 도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니체가 도덕에서 깨어나라고 할 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뭘지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