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 S 1주차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0-10-23 10:56
조회
128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스피노자를 새롭게 해석해낸 현대철학자들을 읽고 배우며 스피노자를 다르게 마주치는 과정이 이제 마지막 학기를 맞이합니다. 어떤 한 철학자를 만나고 그에게 이끌린다는 것도 참 소중한 인연이지만 그를 알아갈수록 더욱 사랑과 존경심이 커진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요. 기쁨도 크지만 스피노자를 私淑하고 尙友하는 자로서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되돌아보면 여러모로 부끄러움이 많이 느껴지는 요즘이기에 마지막 학기를 맞이하는 저로서는 많은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 년 동안 해왔던 공부의 마무리를 짓는 시점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중요한 출발점이자 귀결점이 될 것 같습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돌고 있는 어쩌면 가슴속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나의 절실한 문제를 솔직하게 길어 올리는 작업 그것을 신중하게 표면화시키고 다듬고 벼려가는 예각의 과정이 이번 학기의 여정이 되겠지요. 절탁S 너무 쉽게 부르고 사용했던 우리의 이름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공부 그리고 수행이 말 그대로 切磋琢磨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에... 절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학기 읽게 될 네그리는 오다가다 만난 사이처럼 친숙하지만 사실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익히 소문을 들어 아는 사이 정도이니 애매한 사이라고나 할까요.^^ 소문대로 그의 글은 파토스가 넘쳤습니다. 선명한 분할선, 이분법적인 구도에 익숙한 저로서는 명확하게 느껴지기는 하면서도 내 것으로 가지고 와서 설명하기는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영원한 맑시스트로서 여전히 현역인 이 노장철학자의 책을 어떻게 현재적으로 비판적으로 읽어나갈 것인가도 앞으로의 우리의 숙제가 되겠지요.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적 상황 정치적 지형도 속에서 네그리가 주력한 것은 어떻게 격변하는 현실 속에서 맑시즘을 다르게 해석해내고 노동자 계급의 자율적 운동을 모색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70년대 맑스의 재해석을 통한 이론화의 시기를 거쳐 80년대 네그리는 맑스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하나의 클리나멘으로서 스피노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맑스적 개념을 스피노자와 접속해서 어떻게 맑스를 넘어갈 것인가라는 분명한 문제의식 속에서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공격적으로 독해해 나갑니다. <야만적 별종>에 들뢰즈, 마슈레, 마트롱까지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서문이 다 실려 있는 것을 보면 네그리의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 비판들이 있지만 스피노자를 정치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스피노자 독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는 것 같습니다. 샘은 우리가 네그리를 읽어 나가며 신중하게 견지해야 할 팁들을 설명하셨는데요.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규명해 나가는 네그리의 용어들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그가 강조하는 지점들이 현재의 조건에서 어떤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질문들을 가지고 꼼꼼히 읽어 나가야겠습니다.

샘의 이번 수업을 들으며 무엇보다 크게 저에게 울림이 있었던 것은 근대적 인간의 왜소함 그 찌질함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문득 제가 그동안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의심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마냥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에티카>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가 그토록 넘어서려고 했던 반인간주의를 내가 또 안일하게 생각하거나 잊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과연 인간에 대한 규정성 그 근대성을 제대로 질문해 보았는가?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규정성에 대해서 어떤 의심을 해보았던가? 노동 소비 소유, 인간을 규정하는 몇 가지 용어들을 생각해보면서 참 비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 우리가 사숙하는 철학자들이 그토록 근대성을 문제 삼는지도 좀 더 실질적으로 다가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말들만 쏟아내고 있었을 뿐이었지 근대적 가치, 인간에 대한 전제들을 해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과정인지 사실 저는 털끝만큼도 겪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복적 야생적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들이 단번에 와닿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사유의 야생성, 그 시대에 아니 사실은 지금도 신 개념을 스피노자처럼 산산이 해체시켜버린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샘 말씀처럼 그 대단한 데카르트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신이라는 개념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끝까지 의심하고 추궁하고 질문하고 새로이 배치한다는 사실이 정말 얼마나 위대한 용기이자 전복이며 혁명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맞장뜨는 배짱, 무모한 도전이 사라져버린 시대,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가 생략된 사회, 하여 정말 피터팬 같은 어른들이 양산되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버린 현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이 사라지고 매끈한 것만이 선호되는 요즘, 그 동시대를 사는 일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남과 다른 삶을 원하는지 알아왔던 저는 근대인의 평균적인 욕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을 여전히 욕망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대체로 평균은 했으면, 다들 지 앞가림은 했으면, 어느 정도는 살았으면, 글은 어느 정도는 썼으면, 아프지 않았으면, 불행이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지 않았으면... 사실은 그럭저럭 살기를 원해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이라는 말에 숨겨져 있는 의미들, 마치 소박한 것 당연한 것을 원하고 있다는 위선들. 우리를 평균화시키고 따라서 예속시키는 힘에 의문을 부치기보다는 왜 우리는 이리도 동질적이고 평균적인 삶을 원하는 욕망을 고수하는 것일까요? 고작 욕망이 이렇게 진부해도 될까요? 모든 것이 욕망도 사람 사물 관계에 대한 감수성도 납작해지거나 매끈해져만 갑니다. 정녕 우리는 삶의 잔혹성, 비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약한 근대인으로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인간적 가치로부터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고귀해질 수 있을까요? 질문은 자신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은 어떤 것도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삶, 어떤 것도 단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하는 삶, 그 삶의 잔혹성으로부터 사유를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철학자들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런 주체성이 구성되는 장은 어떠한 것인지 분석하고 새로운 길을 발명해 나갑니다. 자신의 문제를 어떤 시야 속에 놓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 나갑니다. 우리의 문제 지점과 한계 지점들을 현실적인 지평과 동시에 역사적 지평 속에서 사유할 수 있는 시야의 문제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의 지점으로서의 현실적인 지평과 현실이 매번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근원적 차원으로서 잠재적 차원을 존재론적 지평에 대한 통찰 속에서 동시에 작동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공부를 하면서 계속 견지해 나가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권력 테크놀로지, 정치가 이념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신체와 정신에 작동하는 테크닉의 문제라는 샘의 말씀은 정치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어떻게 스피노자를 공격적으로 읽어낼 것인가, 스피노자를 어떻게 현재적으로 작동하도록 할 것인가? 질문의 크기가 우리의 배움이 일어나고 지속되어야 할 지점이겠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심정으로^^ 자신의 질문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구성해 나가야 하는 일이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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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6 15:32
    후기에서 스피노자를 공부하시는 선생님의 파토스가 느껴지는데요? 후기 읽으면서 저도 충전되는 것 같습니다...! 근대인의 찌질함을 넘어가는 데 있어서 네그리의 치열한 독해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와서 읽는 느낌입니다. 마지막 학기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