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 3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10-31 17:21
조회
98
본격적인 에세이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스피노자의 만남을 마무리하려니, 어쩐지 기분이 묘합니다. 어쨌든 2년 동안 많은 인연이 오갔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수요일 스피노자팀에서의 공부를 통해 공부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짐을 짊어진 건 아니지만 어쩐지 더 힘이 들어가네요.

다음 주에는 이번 주와 같이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에세이 문제의식은 좀 더 명료하게 다듬어오셔야 합니다. 채운쌤이 주신 팁을 떠올려보자면, 당장 나에게 문제가 되는 지점, 긍정되지 않는 삶의 순간, 현존과 역량이 분리되는 사고를 문제 삼으시면 됩니다. 채운쌤은 거칠더라도 단순히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이 드러나는 글을 목표하라고 하셨죠. 아직 8주 남았으니 같이 머리를 싸매보죠! 《야만적 별종》은 3, 4장 읽고 이번에 하신 것처럼 메모해오시면 됩니다. 후기는 정수쌤, 간식은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간단히 토론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확실히 네그리의 독해는 그간 저희가 읽었던 다른 스피노자주의자들과 다르더라고요. 그동안 저희가 만난 스피노자주의자들은 ‘텍스트’에 근거해서 스피노자를 독해했습니다. 지난 학기에 읽었던 들뢰즈도 이 중 하나인데요. 마슈레에 따르면, 헤겔은 속성 개념이 신과 양태의 관계가 유출적이라는 것의 증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속성이 스스로 운동하지 못하는 양태에게 운동성을 부여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들뢰즈는 오히려 속성 개념을 통해 신과 양태의 일의적 관계가 확정된다고 했습니다. 이 논의는 다시 봐도 복잡해서 좀 더 공부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반면에 네그리는 스피노자 사유의 ‘단절’에 주목해서 독해합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유가 처음부터 일의적인 세계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꽃피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유태인이자 부르주아이자 데카르트주의자였던 스피노자가 어떤 사건들 속에서 anomali한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에 주목합니다. 이런 식의 독해는 확실히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네그리의 독해를 따라가다 보면, 《소론》과 《지성개선론》, 《에티카》 1, 2부는 아직 극복되지 못한 관념론의 한계를 내정하고 있습니다. 네그리가 비판하는 관념론이란 초월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부르주아의 철학을 의미합니다. 가령, 관념론 안에서 소유는 선험적인 권리로서 의심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네그리는 관념에 대한 관념인 반성적 인식도 여전히 부적합한 관념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유를 철저하게 유물론으로 읽습니다. 마슈레의 독해에서는 이러한 반성적 인식이 적합한 관념으로의 이행이었는데, 네그리의 독해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읽히네요. 확실히 어떤 문제의식으로 《에티카》를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스피노자를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동안 스피노자와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만났다면, 앞으로는 저의 독특한 문제의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만나야겠습니다.

네그리는 새로운 혁명적 주체를 사유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만났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누가 자본주의를 혁명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적 주체로 프롤레타리아를 꼽았다면, 네그리는 현재 혁명적 주체로 ‘다중’을 꼽습니다. 네그리의 분석에 따르면, 이윤의 원천은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니라 일반지성에게 있습니다. SNS 같은 온라인 사용은 그 자체로 자본에 포획되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그리는 모든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작동에 분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이때의 분노는 다른 분야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킹하는 실재적 정서로 전유해야 한다는 것이죠. 네그리의 독해가 낯설지만 동시에 매우 놀라운 것은 정서에 기반한 정치적 실천을 기획하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네그리의 ‘혁명해야 한다’는 주장과 달리 들뢰즈의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소개해주셨는데요.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 속에서 내몰린 자들이 혁명하게 된다는 네그리의 주장과 달리, 들뢰즈는 아무리 내몰리더라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모든 이들이 분노하는 상황은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인식하기를 욕망하는 순간 역시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이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아무리 착취당하더라도 여전히 착취당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혁명은 그럼에도 이러한 세계를 믿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네그리와 달리 혁명의 미래, 혁명적 주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당장 혁명적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혁명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네그리나 들뢰즈의 사유 모두 혁명적으로 읽히네요. 사실 ‘혁명’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터라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채운쌤은 ‘우리 시대에도 혁명을 사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주셨는데요. 네그리를 따라가면, 이 시대에서 독특하게 느껴지는 분노와 수치심 같은 정서들이 그 자체로 매우 유용한 수단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를 따라가면, 저러한 정서들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혁명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쪽이 혁명인지보다 어느 쪽이든지 혁명을 사유하는 데 중요한 수단으로 다가옵니다.

첨부파일은 야만적 별종의 영어본 파일입니다.
전체 1

  • 2020-10-31 18:22
    "혁명해야 한다"와 "혁명적이어야 한다"가 다른 말인가.??^^
    네그리:혁명=전지구적 착취구조의 전복 // 들뢰즈 : 혁명=혁명적으로-되기
    이 둘의 차이를 생각해보면서 가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