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2주차 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20-11-01 00:27
조회
127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문제』를 읽을 때처럼 처음에는 역시 소화하기 쉽지 않습니다. ‘낯선’ 탓이리라 생각하며 ‘통할’ 날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은 연말 에세이 준비를 위한 토론이 길어지면서, 채운 샘의 강의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근대적이면서 동시에 반근대적입니다. 네그리는 철학과 그 철학을 형성하는 역사적 차원, 사회적 관계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스피노자 철학에 내포되어 있는 균열과 불일치를 탐구합니다. Marxist로서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자신의 주체론에 결합하여 ‘구성적 주체론’을 정립하는데, 이는 주체 아닌 사건을 말하는 바디우나 소수자, 리좀을 말하는 들뢰즈와는 다른 관점을 보여줍니다.

 

‘보편적 착취구조로서의 자본주의의 전복’이라는 혁명을 포기한 적이 없는 네그리에게, 자본주의의 달라진 구조하에서 누가 혁명을 수행할 것인가 하는 혁명적 주체에 대한 사유는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주체 없는 혁명이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네그리는 착취양상의 변화에 따라 ‘다중’이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하여 주체가 된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주로 산업노동자가 잉여의 생산에 참여했지만, 정보화 사회인 오늘날에는 정신노동자나 일반 시민들도 잉여의 생산에 참여하게 됩니다. 감정노동자의 미소나 시민들의 유튜브 시청도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윤의 원천은 일반지성, 일반 대중에게 있습니다. 네그리는 이처럼 모두가 자기의 현존만으로도 이윤을 만들어주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네그리의 이러한 생각이 다소 'old'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네그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강조합니다. 착취구조 속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분노라는 공통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생적으로 경제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이 불화와 상이성을 극복하고 정치적 주체로 결집하려면 그들을 돕기 위한 매개로서 당이나 텍스트가 필요합니다. 정치적 주체로 결집하는 사람들이 바로 다중입니다. 착취구조가 전지구적이 되었기 때문에 주체의 차원에서도 자기의 분노를 가진 자들의 네트워킹을 통한 존재의 확장이 요청됩니다. 네그리에게 민주주의란 고립된 주체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역량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이 코나투스에 따라 살아가려고 욕망하는 한, 세계는 계속 구성적 방식으로 변화해 나갈 것입니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혁명을 말하는 대신 ‘유일한 혁명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혁명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무지한 것이며,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란 없습니다. 들뢰즈는 착취에 대한 분노 대신 자본주의하에서 인간이 겪는 치욕, 부끄러움, 수치에 대해 말합니다. 자본주의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부끄러움 말입니다. 욕망이 절대적으로 이성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우리는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바보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고귀하게 살아가도록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자신에게서 확인되는 순간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치욕에 저항하며 살기 위해 ‘도주선’, ‘혁명적으로 되기’를 말합니다.

 

반면 네그리는 자생적 분노를 조직화하는 것, 정치적 주체로서 다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참조합니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네그리에게 와서 주체의 역량을 어떻게 크게 만들 것인가 하는 역량론이 됩니다. 존재는 자신의 삶에 반하는 것과 계속 싸울 것입니다. 다양체로서 존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량입니다. 존재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존재하므로 네크워크 속에서만 역량이 커질 수 있고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과정은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며, 개별적인 것을 집합하여 조직을 만드는 것도 아입니다. 존재는 개별자가 아니라 특이자, 독특한 실재로서 다양체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다른 존재들에게 열어가지 않는 한 역량이 커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직화, 조직의 역량 강화는 개체의 역량 강화와 더불어서만 가능합니다. 민주주의와 다중의 형성이 같이 가는 이유입니다. 당의 지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발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지식인들은 자발성을 결집하기 위한 매개로서 동참하고 개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일까요? 경제투쟁은 공통적인 것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체제전복을 향한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시대에 혁명을 사유할 수 있을까요? 사유해야 한다면 그 혁명이란 또 무엇이며, 어떤 것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노나 치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네그리를 읽어가는 동안 ‘들고 있어야 할’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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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3 10:05
    혁명을 제기하는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도 확연히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혁명'이란 단어조차 어딘가 올드한 느낌입니다. ㅋㅋ 아마 기존 권력의 전복 이상으로 생각해보지 않아서일 텐데요. 단어 그 자체에 집중해서 제가 시도할 수 있는 '명을 변혁하는 활동'에 대해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어쨌든 '전복'은 필요하고, 네그리가 읽어낸 스피노자의 anomali savage 이미지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전복을 상상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다 읽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공부할 텍스트가 많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