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4학기 4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11-07 23:43
조회
134
아무리 지나도 에세이 주제 잡는 일은 항상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에세이 주제를 잡기 위해 토론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다 썼습니다. 나름 바삐 달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문제화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시간이 많이 걸려버렸습니다. 그래도 저희의 토론+채운쌤의 코멘트 덕분에 다들 문제화하는 힌트를 잡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잘 정리하셔서 다음 주에 봬요!

다음 시간에는 이번에 받은 코멘트를 바탕으로 문제가 제기된 서문을 완성해옵니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은 5, 6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차근차근 에세이를 완성해보죠! 간식은 정수쌤께 부탁드릴게요.

간단하게 토론 때 나눈 내용과 채운쌤이 각자에게 해주신 코멘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규창: 저의 이번 에세이는 개체의 역량과 공동체의 역량입니다. 일단 제 문제의식에는 이미 좋음과 나쁨이 전제되어있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윤리는 나쁨이 아니라 좋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예속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신의 몸을 해방시키는 실천 속에서 구성됩니다. 토론 때 선생님들이 해주신 코멘트를 떠올려 보면, 문제를 덜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정념의 대립에서 규정해야 합니다. 마트롱이 지적했듯이, 정념이 동반되지 않는 이성은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라도 정념적 합치를 고려해야 합니다.

나는 필요에 의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가 ‘나’의 실존을 규정합니다. 따라서 ‘나’의 자유로운 삶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의 역량의 증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공동체의 역량은 구성원의 합치를 기쁨과 두려움 중 무엇으로 촉발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제기하는 문제의 틀이 다르다는 걸 알아둬야 합니다. 스피노자는 합치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한다거나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번에 문제의식을 쓰면서 이 사실을 긍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다시 알게 됐습니다. ‘함께 사는 것은 어렵다’를 깊이 이해하고 긍정하는 것을 이번 에세이의 목표로 삼아야겠습니다.

저는 마트롱의 정념 분석을 정리하면서 규문 공동체에 어떤 정서모방이 일어나는지, 기쁨과 슬픔의 정념이 어떤 정념들을 파생시키는지를 관찰하고 분석하기로 했습니다.

윤순쌤: 윤순쌤은 ‘가족’과 ‘자식’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번 에세이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토론 때는 윤순쌤이 ‘엄마’라는 주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자고 얘기를 했는데요. 저는 윤순쌤의 얘기를 들으면서는 더 잘할 수 있었던 엄마의 상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윤순쌤의 문제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해서는 잘 정리되지 않았는데요. 채운쌤은 정서의 능동화를 정리하면서 가족이라는 영토에서 어떤 정서가 작동하는지를 분석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정서를 능동화시키는 작업은 다른 신체와 공통적인 것을 형성하는 작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다른 신체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예속되지만 동시에 다른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유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정쌤: 현정쌤은 ‘부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으로의 이행’이 이번 에세이에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오셨지만 최근에 ‘지루하다’, ‘막막하다’ 등의 느낌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채운쌤은 그런 느낌들을 너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셨습니다. 채운쌤 본인도 공부하면서 매번 알다가도 모르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공부하는 이상 막막하다는 느낌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지로 문제를 돌파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그렇구나’라는 식으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계가 운동하는 필연성, 정신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현정쌤의 고민에 ‘적합한 관념으로 이행’이 매우 적절한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적합한 관념은 적합한 관념으로 이행하기 위한 재료입니다. 가끔 민호와 장난삼아 “번뇌 즉 보리”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저 말이 현정쌤의 주제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위한 여정은 자기가 만든 분별을 믿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반대로 자신이 만든 분별을 의심하지 못하면 깨달음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채운쌤은 분별을 의심하지 못하는 무명(無明)이 문제이지 지각 활동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비슷하게 스피노자에서도 부적합한 인식은 변용에 따른 결과를 실재와 동일시하는 인식입니다. 우리가 정념에 예속되고 고통받는 것도 부적합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상상이 때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적합한 인식이 적합한 인식으로 이행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은 어떤 얘기일까요? 그동안 당연하게 얘기했지만 정작 설명하려니 턱턱 막히네요. 잘 풀어주세요!

정옥쌤: 정옥쌤의 이번 에세이 주제는 ‘자유롭다는 것은 뭘까?’입니다. 이 주제도 쉬운 것 같지만 풀기 정말 막막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스피노자의 ‘구성적 자유’를 얘기하려 했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폭군의 소유 가능한 자유를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전히 나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조건, 부자유한 상태를 따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토론 때는 나에게 기쁨을 주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명하게 고민하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세상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게 꼭 공부가 아니어도 되지만, 공부를 통해 세상과 접속할 때 발생하는 독특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차근차근 분석하는 글쓰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경숙쌤: 경숙쌤의 이번 에세이 주제는 ‘스피노자적으로 소유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소유’를 제도화했습니다. 단지 물질을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과 관계까지 소유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소유는 과연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만 할까요? 일단 저의 짧은 경험을 돌아봐도 월급이 들어오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월급이 들어오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만큼 월급이 바닥나는 데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소유는 분명 어떤 지점에서 나에게 기쁨을 느끼게 하지만 또한 슬픔을 느끼게도 합니다.

채운쌤은 구체적으로 소유가 어떻게 나를 기쁘게 만드는지 그리고 소유가 관계를 어떻게 맺게 만드는지를 분석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소유는 역량의 증대를 가능하게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경숙쌤이 가져오신 은퇴세대의 문제도 같이 풀렸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대되는 주제였거든요!

영님쌤: 영님쌤은 이번 에세이에서 ‘왜 슬픔을 역량의 감소라 규정하는 걸까?’와 ‘슬픔은 왜 수동적인 걸까?’를 소화하시는 것이 목표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정서는 인간의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서 중에서 수동을 얘기할 때는 ‘정념’이라 합니다. 정념은 제거돼야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역량이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수동-정념-역량은 한 세트로 같이 풀려야 할 문제입니다. 영님쌤 방식으로 소화된 글을 기대합니다!

정수쌤: 정수쌤은 이번 에세이에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다중의 역량의 구성을 고민하시는 것이 큰 주제입니다. 네그리가 구성하고자 하는 다중은 ‘동질적’인 느낌입니다. 하지만 지난 강의의 들뢰즈의 이야기를 상기해보면, 동질적 다중이 구성되는 순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중의 역량을 구성해야 한다면 어떤 지점을 사유할 수 있을까요? 다른 주제들도 어려웠지만, 개인적으로 이 주제는 정말 감이 안 잡히네요.^^;; 그래도 정수쌤이시라면 잘 풀릴 거라 기대합니다.

봉선쌤은 토론과 채운쌤의 코멘트로도 이렇다 할 문제가 정해지지 않았는데요. 그날 뒤풀이의 도움과 다음 시간까지의 고민을 통해서 뭔가 잡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각자 어마어마한 주제를 맡은 것 같지만, 이번에도 잘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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