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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주차 후기 및 공지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II)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5-29 18:07
조회
112


지난 1,2,3강에서 푸코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탄생을 분석하기에 앞서, ‘국가이성’과 ‘자유주의’의 통치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국가이성으로 대표되는 17-18c 초의 통치방식에서 발견되는 합리성은 ‘외부의 법적 권리에 의한 제한’으로 작동됩니다. 이 시기의 법적 권리는 신에게 유래했거나, 오랜 역사적 전통을 통해 표명되어온 것으로 통치를 합리화합니다. 국가이성의 통치성은 중상주의의 유행과 맞물리면서 상인들이 머무는 도시를 조직적으로 정비하는 등의 내적 관리에 신경을 씁니다. 이때는 국경을 중심으로 자국의 영토를 제한하고, 내치의 필요성에 따라 상비군을 마련하는 등, 치안유지가 강조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18c 중반 이후, 국가이성의 통치술은 자유주의의 출현으로 변화를 맞이합니다. 국가이성에서 자유주의로 통치술이 변화하는 계기에는 ‘정치경제학’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의 목표는 국가의 부(富)를 증대시키고, 언제나 이익을 보기 위한 방식으로 국가들이 경쟁할 무대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경쟁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제국’에서 벗어난 ‘국가의 복수성’(국가‘들’)이 부각됩니다. 따라서 내치국가와 중상주의의 도래는 국가이성의 통치에서 자유주의 통치양식으로 이행되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통치의 합리성은 “평온하게 존재하는 것은 건드릴 필요가 없다”(20), “잘 통치하려면 덜 통치해야한다”(47)는 구호 아래서 작동합니다. 이제 통치실천은 초월적인 존재의 권위에 따르거나 역사적 전통에 근거한 ‘기원’을 통해 성립되지 않고, 어떤 ‘효과’를 생산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통치행위가 성립되기 위해 합법성과 비합법성, 정당함과 부당함을 묻지 않는 대신 ‘성공’과 ‘실패’의 여부가 통치의 메커니즘을 결정합니다.

푸코는 시장을 순수한 경제 활동이 이뤄지는 무대가 아니라, 통치가 실천되는 무대로 봅니다. 16,17세기에 시장은 ‘정의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때는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실천들이 사법적인 규제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가격을 조절하고 위법행위를 처벌하는 등의 엄밀한 제약들이 공정의 원칙에 따라 특권적으로 부여되었던 것이죠. 푸코는 자유주의가 출현했던 18세기에 이르러 시장이 ‘진실 형성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시기에 시장은 자유롭게 작동하도록 내버려 둘 때, 일정한 가격 균형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인식됩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가격은 ‘적정가격’ 혹은 ‘정상가격’으로 불렸고 그것이 생산자와 수요자 사이의 적합한 관계를 진실하게 표현하는 척도로 여겨지게 된 것이죠. 이처럼 시장의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된 가격이 ‘진실의 척도’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장은 통치실천과 관련한 진실을 말하는 공간이자 진실을 진술하는 공간이 됩니다. “결국 시장으로 인해 적절한 통치는 그저 정의에 따르는 통치 그저 정의로운 통치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시장은 통치가 진실에 따라 기능해야만이 비로소 적절한 통치가 되도록 만듭니다.”(pp.60-61) 시장은 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에 개입하지 말아야한다는 사법적인 정의에 부합하는 무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적정가격)을 생산하는 무대입니다. 자유주의적 통치가 실천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진실의 문제'는 시장의 논리에 근거하게 됩니다.

 
“단순하고 거칠게 말해보자면 18세기 초까지 여전히 사법진술의 공간이었던 시장은, 제가 지난해에 기근 및 곡물시장 등과 관련해 환기했던 모든 기술들을 통해, 진실 진술의 장소라고 불리게 될 공간이 됩니다. 시장은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통치실천과 관련한 진실을 말입니다. 시장의 진실진술 기능은 앞으로 [이것에] 연관되게 될 사법메커니즘 또는 사법메커니즘의 부재에 명령을 내리고 규정하며 지시하게 될 것입니다.”(61)

근대 자유주의 통치이성은 ‘시장’과 더불어 ‘유용성’에도 정착합니다. 통치성이 영향을 끼치는 분야는 역사와 전통, 나라의 자원과 인구 및 경제를 아우르면서, 통치권한을 제한하는 문제는 개입의 유용성을 따지는 과정에서 부여됩니다. 여기서 통치대상과의 관계는 ‘유용’한가 혹은 ‘무용’한가로 규정됩니다. 사물의 진실한 가치를 시장이 결정하는 사회에서 모든 통치행위의 유용성은 ‘이해관계’를 통해 강조됩니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적 실천이 통치가 더 관용적이며 이완됐으며 유연한 통치로 변해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푸코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적 통치실천은 이러저러한 자유를 보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통치실천은 ‘시장의 자유’, ‘판매자와 구매자의 자유’ 등이 제대로 기능하고 작동하기 위한 자유를 ‘소비’하는 쪽으로 작동됩니다. 통치실천이 중점을 두는 것은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푸코는 자유주의적 통치실천을 ‘자유’를 부단히 생산되어야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위한 ‘안전의 전략’들이 요구되는 맥락을 검토합니다. “더 나아가 경제절차의 자유가 기업에게 위험한 것이 되거나 노동자에게 위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노동자의 자유가 기업이나 생산에 위험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건들, 즉 질병이나 혹은 어찌됐든 반드시 찾아오는 노쇠 등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개인이나 사회에서의 위험을 구성하지 않도록 하는 것”(103-104) 안전의 전략은 개별적 이해관계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자, “자유주의의 이면 혹은 조건 그 자체”(104)입니다. 자유가 생산되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 ‘위험의 관리’가 중요해진 것이죠.

지금까지가 국가이성과 자유주의의 통치성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푸코는 4,5,6강에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분석합니다. 푸코에 의하면 현 시대의 통치성(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래밍)이 정착되는 과정은 독일과 미국의 사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신자유주의 사이에는 많은 연결고리가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공통의 적으로 인식된 '존 메이너드 케인즈'입니다. 케인즈는 20c 초에 정부의 시장 개입을 옹호했던 대표적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 번째 공통점은 '국가의 개입주의에 대한 혐오'입니다. 마지막은 이 두 형태에서 순환했던 일련의 신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과 관련 있습니다. 먼저 푸코가 집중하는 것은 독일의 경우입니다. 2차 대전 이후의 독일은 사회적 재건이 요청됨과 동시에 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에서 다시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요구들이 혼재했습니다. 독일 경제를 다시 부흥시킨 루트비히 에른하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른하르트는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경제를 해방시켜야만 한다”(124)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존중하는 것이 국가에 의한 개입을 제한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독일을 재건할 당시, 에른하르트에게 1948년 이전의 국가는 나치즘이 입법화된 상태에서 시민의 개별적인 법권리를 제약하고 침해했던 경우에 해당했고, 그는 이제 국가는 더 이상 시민을 대표할 권리가 없어졌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재건 이후 독일국가와 시장 사이를 가로지르는 문제는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유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 자유를 보증하는 것, 그 자유를 바로 경제의 영역에서 보증하는 것”(127)이 됩니다.

푸코는 재건 이후 독일의 경제에서 정치적 주권자가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 시장경제가 정치적 주권자를 생산하는 경향에 주목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경제적 자유라는 제도는 소위 정치적 주권을 만들어내기 위한 사이펀 혹은 기폭제 같은 것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 혹은 어쨌든 그런 것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127) 푸코는 여기서 베버의 논의를 인용합니다. 이전의 세미나를 통해 배웠던 바를 환기하면,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에서 16세기에 유럽사회를 중심으로 태동한 칼뱅주의 교리에서 한 개인이 부유해지는 것이 신이 그 개인을 자의적으로 선택했다는 징표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분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부유함이 하나의 징표로서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이 그 개인을 보호하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며,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줬다는 징표로 기능합니다. 푸코는 베버의 논의를 독일 신자유주의 사례와 연결합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확실성은 결국 이 개인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에서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보증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구원받는 것은 당신이 적절한 방식으로 부유해지려고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만약 실제로 당신이 부유해졌다면, 신이 그때 지상의 당신에게 당신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징표를 보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화는 16세기의 독일에서 한 징표의 체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에 비해 20세기 독일에서는 한 개인의 부유화가 신에 의한 선택의 자의적 징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 부유화가 징표가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의 징표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물론 신에 의한 선택의 징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개개인이 국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의 일상적인 징표가 됩니다. 달리 말하면 경제는 언제나 징표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130-131)

토론에서 푸코와 베버의 논의가 공유하고 있는 지점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베버가 자본주의를 경제적 현상에 한정한 것이 아닌, ‘정신’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훗날 푸코의 통치성 개념이 함의하는 ‘멘탈리티’ 문제와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베버의 학문적 성과를 계승한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질서자유주의자 : 프라이부르크 학파에 속함)을 예로 들면서 베버와 푸코의 논의가 단순히 도식적으로 연결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푸코가 베버의 논의를 참조하는 이유에는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독일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래밍에 동조한 독일사회민주당의 사례에서 푸코가 독일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통치성의 관계를 고민한 부분도 재밌습니다. 나아가, 푸코는 사회주의에는 ‘통치의 내재적 합리성’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회주의에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행동방식과 통치방식을 규정하는 것”(146)을 말했던 푸코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고유한 통치성의 부재'로 파악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고 그 내부에서만 사회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필연적으로 외재적인 통치성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냐고 말입니다.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통치성은 있는 것일까? 엄밀하고 내재적이며 자율적으로 사회주의적일 수 있는 것은 어떤 통치성일까? 아무튼 실제로 사회주의적 통치성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사회주의 및 그 텍스트 내부에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통치성을 사회주의로부터 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발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146)

푸코에게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문제는 어떻게 이행되었을까요? 그것은 다시금 또 다른 체제(고유한 통치성을 내재한)를 요구하는 문제인 걸까, 아니면 기존 통치성에 저항하기 위한 각자의 생활방식을 발명해야하는 문제인 걸까-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게 두서없이 토론하던 중에 지난번 ‘철학하는 월요일’에 읽고 얘기 나눴던 <코뮨이 돌아온다>라는 책도 잠깐 언급되었던 것 같습니다. 푸코의 사유를 따라가는 것이 다소 힘에 부치다가도, 그의 번뜩이는 질문과 재치 있는 통찰에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책을 붙잡게 됩니다. 이번 후기를 쓰면서 정리하지 못한 내용은 나중에 기회 되면 간략히 써보겠습니다. 7,8,9강 발제는 건화 & 민호쌤, 제가 순서대로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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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31 10:09
    오오 꼼꼼한 후기 잘읽었어요~
    전 아직도 큰 맥락 따라가기가 벅차는데요. 누가 이건 이래서 이런 거야 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자는 게 푸코의 핵심이니
    아리송하더라도 따라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