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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차 후기 및 공지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III)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6-05 21:37
조회
8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자유주의가 뭔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대단한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저는 이 어떤 것을 그 특수성 내에서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 이것은 결코 과거에 그랬던 것이 현재에도 그렇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 문제는 과거와 관련된 지식을 현재의 경험 및 실천과 관련해 작용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과거에 인정됐고 현재에도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는 형태로 현재를 짓누르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역사적 분석의 정치적 효과를 단순한 반복이라는 형태로 그렇게 이전시키는 것, 이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실히 기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이고, 또 단순히 도치된 역사적 모형으로부터 출발해 행해진 분석들로부터 이 문제를 해방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191)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현대의 주류적인 관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학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과거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애덤 스미스)이 다시 요청되고 활성화되는 체제로 봅니다. 다음으로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사회학적 관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신자유주의를 개인들 간의 사회적인 관계가 상업적으로 규정되는 체제로 간주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국가권력의 은밀한 간섭이 점차 지구적 규모로 일반화되는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관한 앞선 대답들이 과거로부터 주기적으로 동일하게 반복되어온 관습적인 비판임을 지적하고, 그러한 관점이 오히려 현재 상황이 처한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푸코가 신자유주의를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논리에서 작동하는 체제로 보았던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의 자유주의자들이 “주어진 한 정치사회에서 시장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을 어떻게 재단하고 마련할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은 “포괄적인 정치권력의 행사를 어떻게 ‘시장경제의 원리’에 맞출 것이냐”하는 문제에 집중했던 것이죠.(191)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시장의 손을 들어줘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장을 위해 작동되는 질서를, 시장에 의해 국가라는 것이 효과적으로 산출되는 질서를 요청한 것입니다. 한때 자유주의자들의 구호가 “평온하게 존재하는 것은 건드릴 필요가 없다”였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슬로건은 다음 같이 변모합니다. “국가는 경제 행위의 결과에 책임이 있다.”(발터 오이켄), “국가는 경제의 생성을 장악해야 한다.”(프란츠 뵘) “이 자유주의 정책에 있어서 경제적 개입의 수가 계획정책에서만큼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다.”(레온하르트 미크슈) 그래서 신자유주의에서 경제현상은 ‘자유방임’이 아니라 더욱 ‘용의주도’하고 ‘능동적’인 ‘항구적 개입’의 비호 아래에 놓입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에서 ‘경제적 개입’이 ‘어떻게 관여하는가’에 보다 신중하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푸코가 중점을 두어 분석하는 것은 개인의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문제, 즉 ‘통치양식’에 대한 연구입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양식이 갖는 주요한 쟁점을 1.독점의 문제, 2.적합한 행위(적절한 경제행위)의 문제, 3.사회정책의 문제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먼저 독점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본을 둘러싼 자유경쟁이 벌어질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현상입니다. 자유경쟁의 기능을 확보하고자 하는 모든 자유주의자는 독점 현상을 촉진하기 위한 메커니즘에 개입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입방식이 마음껏 경쟁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보장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죠. 푸코는 독일의 경우를 들고 있는데, 독일 사법제도 내에서 반독점을 위한 제도적 조치는 독점의 발생 자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쟁에서 낙오된 존재들을 다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내모는 사법적인 개입인 것입니다. 독점을 향한 경쟁이 끊이지 않고 더욱 잘 굴러가도록 마련된 장치라고 할까요. 코치가 지친 권투선수의 땀을 닦아주고 물을 건네주는 것처럼, 계속해서 링에서 싸울 수 있게 만드는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합한 행위양식의 문제는 자유주의에 적용될 개입의 원칙을 구상했던 발터 오이켄의 발언ㅡ“자유주의의 통치는 항시 용의주도하고 능동적이어야만 하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통해 개입해야만 한다. 곧 첫 번째로는 조절행위를 통해서, 두 번째로는 질서창립적 행위를 통해서이다.”ㅡ에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 먼저 [조절적 형태의 개입]이 목표하는 효과는 가격의 안정입니다. 이를 위해 금융정책이 허가되고, 공정이율이 창설됩니다. 그러면서도 가격의 고정, 시장의 한 부문에 대한 지원, 체계적인 고용 창출, 공공 투자 같은 도구들은 개입의 영역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실업률이 얼마나 되든지 간에, 먼저 구제해야 하는 것은 ‘가격의 안정’입니다. 시장 정책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고용을 목표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업의 측면이 시장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 있으며, 실업자는 단지 이익이 없는 활동과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 사이의 과도기에 놓여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질서창립적 행위]가 뜻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적절한 개입은 경제절차 자체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에, 시장의 논리가 적용된 경쟁 질서를 구축할 수 있게끔 해주는 사회의 여러 제반 조건들ㅡ인구, 기술, 학습 및 교육, 법률체제, 토지사용권 등ㅡ에 적용되어야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사회정책의 문제가 있습니다. 질서자유주의자(신자유주의자)들은 복지정책이 경제성장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평등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책, 균등한 조절을 중심적 테제로 삼는 사회정책을 경제에 반反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회정책은 평등을 목적으로 설정할 수 없고, 시장질서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선 불평등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위험은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됩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이 일정 수준의 소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면, 소득이 “개인보험, 사적 소유의 실현, 개인적이거나 가족적인 자본화를 가능케 해 [결국에는] 개개인이 위험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논리를 펼칩니다.(217) 그렇기에 이들이 주장하는 진실로 근본적인 사회정책은 “경제성장 뿐이라는 것”입니다.(같은 쪽)

신자유주의 통치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시장의 원리에 따라 모든 제반 질서들이 재편되는 사회, “상품교환보다도 오히려 경쟁메커니즘이 조절 원리를 구성해야 하는 사회”(222)를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를 토양으로 삼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사회는 상품의 교환이나 상품화 현상이 중심이 된 ‘슈퍼마켓 사회’가 아니라, 경쟁의 역학에 종속된 인간을 양성하는 ‘기업 사회’인 것입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의해 탄생된 [기업과 생산의 인간 주체]를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명명합니다. 이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골격을 기업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주체입니다. 이 기업의 형식은 국내적/국제적 대기업이나 국가적 규모의 양식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관건은 우리가 ‘독립 가옥’이나 ‘소규모 근린 공동체’라고 지칭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체 내부에 기업화된 형식을 최대한으로 파급하고, 경쟁을 일반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을 설명하는 그의 관점은 이전에서 행해지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예리하게 파고 듭니다.

 
“단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좀바르트적’ 사회, 즉 획일화 사회, 대중사회, 소비사회, 스펙터클 사회 등을 고발하면서 자신들이 통치정책의 현재 목표를 비판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 그것은 [192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친] 통치술의 명시적 혹은 암시적 지평, 아마도 의도됐거나 혹은 의도되지 않은 지평에 있었던 어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1930년대에 질서자유주의자들이 고안한 통치술, 즉 현재 자본주의 국가들 대부분에서 통치 프로그램이 된 그 통치술은 이런 유형의 사회를 구성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상품이나 상품의 획일성에 기초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기업의 다양성과 그 차별화에 기초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225-226)

기업의 다양성과 차별화에 기초한 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어떻게 기업의 형식에 기초한 ‘기업사회’와 수많은 사법제도로 틀 지워진 ‘사법사회’가 동시에 결합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기업 간의 경쟁을 더욱 증식시킬수록 이것을 사법적으로 중재할 필요가 커지게 된다는 것이죠.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양성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서 제도적인 측면과 결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법적인 중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기업의 시장진출에 대한 ‘법적 제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푸코가 질서자유주의자들에 근거한 사회정책의 또 다른 양상으로 경제-사법적 질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푸코는 독일과 미국의 질서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들이 회동했던 학술대회인 ‘월터 리프먼 콜로키엄’의 사회자이자 주최자인 루이 루지에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경제생활은 사실 사법적 틀 내에서 전개된다”고 말했던 그의 발언은 훗날 신자유주의 통치성 안에서 사법제도가 자리매김하는 양상을 암시합니다. 루지에의 발언은 사법적 요소가 경제적 활동을 규정하는 심급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지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법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고, 경제적인 것은 사법적인 것이 없으면 경제적인 것이 될 수 없다.”(235)

이처럼 사법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관계는 동시적이고 상호적이라는 의미에서, 푸코는 ‘경제-사법적 질서’에 대해 논합니다. 요약하면 이것은 ‘규칙화된 활동들의 총체’로써 이해되어야하며, 순수한 의미에서 경제활동을 규정하는 대신에 ‘경제절차를 그 안에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적 총체’로써의 ‘체계’가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내재되어있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자본에 의한 축적과 그에 따른 경제적 논리’에 한정된 ‘본래적 자본주의’에 해당하는 현상이 먼저 있고, 외부의 사법 제도는 그것에 유리하거나 혹은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보는 견해(ex.맑스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경제적 절차가 제도적·사법적 총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논리가 통용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법치국가’를 요청했을까요? 법치국가란 법률을 갖고 있는 동시에 개인들 간의 관계, 개인들과 공권력 간의 관계를 중재하는 제도적 심급을 가진 국가입니다. 그렇다고 법치가 국가를 경제 절차의 전반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경제-사법적 체계가 도래함과 동시에, 국가와 개인들은 모두 경제-게임을 위해 규칙화된 행위의 총체에 속하게 됩니다.

 
“사실 국가는 경제절차들을 모르고 있어야 합니다. 국가는 경제와 관련된 모든 것, 혹은 경제와 관련된 모든 현상들을 아는 것으로 상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국가와 개인들에게 경제는 하나의 게임, 즉 규칙화된 행위의 총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이 게임에서 규칙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누구도 결과를 알 수 없는 게임을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규칙들의 총체인 것입니다. 경제는 게임이며, 경제에 틀을 부여하는 사법제도는 게임의 규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법의 지배’와 법치국가에 의해 통치행위가 경제 게임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형식화된다는 것입니다. 그 경제 게임을 행하는 자, 즉 현실의 경제 주체는 오직 개인들 혹은 말하자면 기업들인 것입니다. 국가에 의해 보증된 사법-제도적 틀의 내부에서 규칙화된 기업들 간의 게임, 바로 이것이 쇄신된 자본주의에서 제도적 틀이 되어야 하는 것의 일반적 형식인 것입니다.” (252-253)

지난 토론 시간에서, 미국을 여행하다보면 법률문제와 관해 변호사를 중개하는 광고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물건의 겉표지에 빼곡히 적힌 문구들이 어떻게 인간의 모든 행위적 변수를 수익이나 손해에 관한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지, ‘소비자보호법’이 말해주는 통치적 메커니즘에 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진영의 후보와 진보진영의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내걸었던 정책이 실은 신자유주의적 게임의 규칙을 지키면서 진행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보수진영의 ‘줄푸세’ 공약과 진보진영의 복지공약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들, 특히 과거 우리나라 대선에서 모든 진영에게 이슈였던 '경제민주화' 공약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통치성 안에서 허용될 수 있었는지 고민했습니다. 푸코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 모델이 프랑스적으로 수용되었던 과정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추진되었던 ‘부의 소득세’는 소득이 불충분한 이들에게 일정 수준의 소비를 보장하는 수당을 안겨줬고, 이로써 사람들은 ”이 부가적 수당을 일종의 생활수단으로 취함으로써 직업을 찾는 일과 경제 게임에 다시 참여하는 일을 회피하지 못하도록“(294) 경제-게임의 주체로 다시 포섭되었던 것입니다.

푸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전개된 맥락은 유럽의 신자유주의가 전개되었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유럽의 경우와 구별될 수 있는 요인을 미국의 자유주의적 토대에서 찾습니다. 요컨대 미국의 [자유주의]는 통치자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된 경제적·정치적 사상이 아니라 미국의 독립시절부터 그 자체로 ‘존재방식이자 사유방식’이었고, 통치자가 피통치자에게 적용하는 기술로써가 아닌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일정한 관계의 유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미국의 자유주의는 “항시 재활성화되는 유토피아의 중심 같은 것”으로서, “하나의 사유방법 혹은 사고방식, 경제와 사회에 대한 하나의 분석틀”이었던 것이죠.(306) 푸코가 미국 신자유주의의 양상을 해석할 때 취하고 있는 분석방법은 ‘인적자본론’과 ‘범죄성과 범법행위’에 관한 연구입니다. 9강에서 주요하게 초점을 맞춘 논의의 대상은 ‘인적자본론’입니다. 인적자본론을 분석방법으로 취하는 것은 절차상 두 가지 의의가 있습니다. 먼저 그때까지 탐구되지 않았던 영역에서 이뤄진 경제 분석의 진전된 절차라는 점, 이제까지 경제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던 영역을 경제적 관점에 입각해 재해석한 절차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죠.

인적 자본과 관련하여, 고전 경제학에서 제대로 탐구되지 않았던 영역은 다름 아니라 ‘노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노동에 대해 성찰했지만, 그것은 노동의 본질을 분석했기보다는 노동 문제를 양적인 방식으로, 노동의 요소를 ‘시간에 따라 수량화할 수 있는 요소’로 환원한 해석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케인즈도 노동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슐츠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은 고전 경제학을 위시한 기존의 노동 분석을 비판하면서 노동을 “경제분석의 영역에 재도입하는 것”(309)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을 경제 분석의 중심축으로 삼았던 맑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맑스는 구체적인 노동 가치가 ‘노동력’으로 변환되면서 노동력이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그렇게 측정된 노동력의 대가가 시장에서 ‘임금’으로 지불되는 과정을 노동의 ‘추상화’로 여겼고, 이를 비판했습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자들은 고전 경제학과 맑스주의적 분석이 노동에 관한 경제현상을 [자본‧투자‧기계‧생산물 등의 절차]에 한정시켰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노동이 추상화되는 과정은 ‘현실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과 관련해 있다는 것이죠. 그들의 논리를 전유한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맑스와 같이 ‘현실 자본주의’에 비판을 가할 것이 아니라, “경제적 담론 내에서 노동 자체가 추상화되는 방식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312)

이처럼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경제적인 분석은 노동을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된 인식론적 변동을 가져옵니다. 이제는 경제현상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의 행동이 갖춘 내적 합리성을 분석하는 일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즉 노동은 “노동자에 의해 실천되고 활용되며 합리화되고 계측된 경제적인 품행으로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316) 그러므로 노동의 문제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스스로가 [경제 게임의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노동은 다음과 같이 새롭게 이해됩니다. 먼저, 노동자는 왜 노동을 할까요? 당연히 임금 때문입니다. 임금은 노동력의 대가가 아니라, ‘소득’입니다. 소득이란 바로 자본의 산물이자 결과물입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미래에 소득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본’으로 불리게 됩니다. 임금이 소득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임금은 '자본의 소득'이 되는 셈이죠. 여기서 자본이란 “어떤 사람이 일정 정도의 임금을 벌 수 있도록 해주는 신체적·정신적 요소들의 총체”(317)로 이해됩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은 이제 단순히 ‘노동력’ 또는 ‘노동시간’으로 축소된 상품이 아닙니다. 노동은 자본, 즉 ‘능력’, ‘경쟁력’인 것입니다. 푸코가 ‘인적자본’을 설명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ㅡ“즉 임금이란 어떤 종류의 자본에 할당된 보수, 소득에 다름 아닌데, 이 자본은 인적자본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본을 소득으로서 취하는 경쟁-기계는 그 보유자인 인간으로서의 개인과 분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321) 적어도 푸코는 현 시대에 인간이 지닌 신체적·정신적인 부분들이 어떤 점에서 자본 또는 시장의 논리와 긴밀하게 접속할 수 있는지를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노동이 ‘기계’로 이해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 부분에 달린 본 책의 주석에는 푸코가 언급했던 ‘기계’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사용한 기계 개념을 환기시키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임금(소득)이 아닌 ‘임금(소득)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기계-노동자의 총체를 신(neo)경제학자들은 ‘기계/흐름의 복합체’ 같은 것으로 간주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기계/흐름의 총체’ 관념은 다양한 변수들에 따라 임금소득을 받고, 그에 따라 노동자 자신이 기업가적 주체로 변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적자본ㅡ즉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이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하는 신자유주의 경제-게임의 주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푸코가 분석했던 ‘경제적 인간’은 더 이상 ‘필요에 따라 상품을 교환하는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10,11,12강을 읽고 옵니다. 발제는 저와 민호, 건화가 순서대로 맡았습니다.
(+푸코의 이번 책을 다루는 마지막 시간인 만큼, 채운 선생님의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한 주 쉬고, 6월 17일(월요일) 오후 2시에 세미나를 진행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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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6 18:51
    미국의 자유주의는 경제적·정치적 사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방식이자 사유방식’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유주의라는 사상을 받아들이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우린 자유주의 경제 게임에 암암리에 무조건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좀 충격적이었는데, 한편으로 자유주의라는 게 뭔가 구체적인 현실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