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14주차 후기 및 공지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IV)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6-20 00:47
조회
106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독일과 비교할 때 어떻게 달리 수용되었을까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의 꿈꿨던 ‘기업 사회’는 기업의 형식을 각종 사회조직에 통용되는 모델로 일반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형식의 일반화]란 ‘수요와 공급’, 혹은 ‘투자-비용-이윤’으로 구성된 경제적 모델을 증식시켜서 이것이 “사회의 모델과 심지어는 실존의 모델, 개인이 자기 자신, 자신의 시간, 자신의 이웃, 자신의 미래, 자신이 속한 단체, 자신의 가족과 맺는 관계의 형식”(336)을 구성하게끔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이때의 사회정책은 개인의 노동환경, 삶의 시간, 부부생활, 가족, 자연환경에도 시장 논리가 중심이 된 도덕적인 틀을 조직하게 됩니다.

반면,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시장의 경제적 형식을 일반화하는 것”(338)이었습니다. 이때 [시장 형식의 일반화]는 경제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회관계 속 개인들의 행동을 경제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자녀에게 행사하는 행동(어머니가 자녀와 보내는 시간, 어머니가 자녀에게 하는 배려의 질,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는 애정, 어머니가 자녀에게 음식을 주는 방식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녀의 음식상의 관계를 양식화하는 방식... 등)도 자녀의 ‘인적자본’이 구성되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엄마에게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은 실질적인 임금을 얻기 위한 활동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보살핌을 통해 자녀가 실제로 성공했을 때 ‘심리적 만족감’을 소득으로 취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일종의 투자 관계로 설정됩니다. 이렇듯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제까지 사회학과 심리학의 소관이었던 결혼이나 부부생활처럼 개인들의 공존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합리화 현상을 분석했습니다.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의 분석은 경제적 틀을 통해 통치행위의 유효성을 평가하고, 공권력 행사의 남용, 과잉, 무용성 등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합니다. 이것은 모든 공적인 활동을 ‘비용과 이윤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축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시장의 관점에 입각하여 공권력의 행동을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사람들은 통치의 모든 행위를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시장 법칙의 이름으로 자유방임을 통치에 대한 자유방임의 불허로 역전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자유방임은 이런 방식으로 역전되고 시장은 더 이상 통치의 자기제한 원리가 아니라 바로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원리가 됩니다. 이는 통치에 맞서는 일종의 항구적인 경제법원입니다. 19세기에는 통치행위의 과도함에 맞서서 법권리로서 공권력 행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행정법원을 설립하고자 했다면, 신자유주의에서는 엄밀하게 경제와 시장의 관점에서 통치행위를 측정하겠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경제법원이 들어서게 됩니다.”(345)

주변의 모든 현상을 경제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했던 신자유주의자들의 분석은 범죄성을 다시 정의합니다. 이들에게 범죄란, 법률을 어긴 자의 실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하여금 형벌에 처해질 수 있는 위험을 야기하는 모든 행동을 범죄”(351)라고 규정합니다. 사회에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가장 경제적인 형식, 즉 가장 비용이 들지 않고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형식이 형벌제도를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느냐는 어떤 위험을 야기할 가능성, 즉 범죄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의도’를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자의 관점에 입각한 문제의식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는 범죄자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 역시 “하나의 행동에 투자하고 거기로부터 이득을 기대하며 손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353) 행동하기 때문이죠. 즉 범죄자 역시 범죄자라고 규정되는 특정한 성격이나 도덕적인 성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측면에서는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중요한 것은 범죄자의 성향 분석이 아니라, ‘법률의 인포스먼트’가 됩니다. 이때 인포스먼트enforcement는 ‘집행’을 말합니다. 하지만 인포스먼트는 단순히 법률을 어긴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법을 집행하더라도 ‘비용과 이익의 관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효율적'이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푸코는 이것에 대한 예시로 ‘마약 범죄’를 언급합니다.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법률의 집행은 주로 마약의 공급을 축소하려고만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마약의 단가를 상승시키고, 마약 유통망을 축소시킴으로써 독점을 발생시켰습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점점 더 비싸지고 구하기 힘들어진 마약을 구하기 위해 더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에 법률 집행인들은 정책의 방향을 바꿉니다. 마약 중독자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마약을 공급하게 놔두면서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범죄를 예방하고, 마약 중독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매우 비싸게 마약 가격을 책정하여 접근을 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말이죠. 이때 중요한 것은 법률의 인포스먼트가 범죄자들 자체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행위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끔 행사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전함의 계측은 ‘경제적 유용성’으로 측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후기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게임에 관여하는 제도적·사법적 체계가 독점을 놓고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주체(기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계속되기 위한 쪽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떠오르는 부분입니다. 이제 핵심은 게임 참가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권력이 개인에게 행하는 규율로써의 규범화가 아닙니다. 법률의 인포스먼트는 ‘이득과 손실의 게임’과 관련된 환경과 만나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뉴스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엠바고’ 문화가 떠오르는 지점입니다. 엠바고는 취재원의 요청에 따라, 혹은 기자들끼리의 합의에 따라서, 취재하되 정해진 기간까지는 보도하지 않고 보류하는 지침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요청’이나 ‘합의’가 어떤 관점에서 작동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는 흔히 우리에게 알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로 알려져 있습니다. 앎의 문제와 관련해서 엠바고에 대해 알아보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엠바고라는 말 자체가 원래는 경제학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 금융거래와 투자 등의 통상 행위를 금하는 조치를 말하는 단어라는 것이죠. 언론을 비롯한 분야에서 우리가 당장 알아야 될 정보와 그렇지 못한 정보를 나누는 기준에도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경제적 유용성이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무튼 하나의 선택을 다른 선택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출발해 이뤄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 자신의 선호로부터 출발하고, 즉 예를 들면 내 자신이 아픈 것보다 다른 사람이 아프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고통스러운가 고통스럽지 않은가, 고통스러운가 마음이 편안한가와 관련된 나의 감정이 최종적으로 내 선택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이것은 주체와의 관계에서 환원불가능한 선택이며 양도불가능한 선택입니다. 개인적이고 환원불가능하며 양도불가능한 선택의 원리인 것입니다. 원자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체 자신이 준거하는 선택의 원리, 이 원리가 바로 이해관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376)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이해하기 위한 바탕이 되는 철학으로 영국의 경험론을 들고 있습니다. 경험론자인 데이비드 흄은 개인의 선택에 대해 분석할 때, 즉 ‘어느 개인이 어떤 것을 행하고 다른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를 생각하면서 어떠한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던 철학자였습니다. 아침마다 체조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체조를 왜 하는지를 물어본다고 합시다. 아마도 이렇게 답하겠죠?ㅡ“건강해지고 싶어서!” 여기서 왜 건강이 중요하냐고 물어보면,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좋으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아픈 것보다 건강한 것이 좋냐고 묻는다면, “병에 걸리면 괴로우니까”라고 답할 겁니다. 만일 왜 괴로운 것이 싫냐고 묻는다면, 답을 이어갈 수 없을 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려하기에, 그러한 물음 자체가 별로 의미 없기 때문이죠. 인간의 어떠한 선택이 다른 이유로 환원될 수 없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것 자체로 그 이상 넘어설 수 없는 선택의 이유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괴로운 것과 괴롭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이 어떤 판단에도 회부되지 않고, 어떤 추론 내지 계산에도 회부되지 않는 환원불가능한 것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375)입니다. 흄을 인용했던 푸코에 따르면, 여기서 다른 이유를 댈 필요도 없고,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는 경험적 선택의 주체는 곧 “원자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체 자신에 준거하는 선택의 원리가 바로 이해관계라고 불리는 것”(376)으로, 이해관계의 원리에 따라 선택을 하는 인간이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입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이해는 사회계약론과 연계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왜 사회계약을 했을까요? 이에 대해 법학자였던 블랙스톤은 이해관계에 놓여있는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보호받기 위해 서로 계약을 맺고, 여기서부터 계약한 자들의 의무는 개인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구성하면서, 이전까지 이해관계에 놓여있던 개인들이 법적 권리의 주체(호모 레갈리스)가 되어 사회적 계약을 이행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흄의 관점에서는 계약 이후에도 이해관계의 주체는 지속된다고 보았던 것이죠. 이해관계의 주체는 법적 권리의 주체를 벗어나 있으며, 언제나 그것이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이런 경험론적 주체 개념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분석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특징을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시장의 경쟁력과 통치의 합리성을 보장하는 원리는 언제까지나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인 것이죠. 경쟁 관계에 있는 주체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을 할 때, 그 개별적 선택들의 통계적인 총합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 주체를 고려한다는 것은 인간학적 방식으로 모든 행동양식을 경제학적 행동양식과 동일시한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개인의 행동에 관한 분석에 부여되는 인지가능성의 격자가 바로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인 한에서, 그리고 오직 호모 에코노미쿠스인 한에서만 그 개인이 [통치가능화]되고, 그 개인에게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개인과 개인에게 행사되는 권력 사이의 접촉면, 결론적으로 권력이 개인을 조정하는 원리는 바로 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그런 종류의 틀일 뿐인 것입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이는 통치와 개인의 경계면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개인, 모든 주체가 경제적 인간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353)

논지를 전개하는 신중함이 느껴지는 앞선 구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모든 개인, 모든 주체가 경제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님에도, “오직 호모 에코노미쿠스인 한에서만 그 개인이 [통치가능화]되고, 그 개인에게 영향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혹시 이 말은 이익과 효율과 관련된 관점에 따라서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되는 개인들의 ‘실천’에 관여하는 차원을 보다 면밀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격자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말에 담긴 함의를 설명한 것은 아닐까요? 한편으로 저는 푸코가 개인들이 ‘통치가능화’에서 벗어날 수 있고,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것에 '저항'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 위한 맥락에서, 푸코가 이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시민사회’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푸코가 시민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평범하지 않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광기와도 같은 것이고 성현상과도 같은 것”(406)이라고 합니다. 시민사회가 자명한 것으로 주어진 대상이라거나, 언제나 거기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이름 붙이기만 하면 되는 역사적, 자연적 소여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푸코는 시민사회를 관념이라거나 환상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시민사회는 자유주의적 통치 테크놀로지의 총체를 구성하는 분리 불가능한 두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치 테크놀로지의 상관물로서의 시민사회는 “편재하는 통치, 그 무엇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통치, 법규범에 따르는 통치, 그러나 경제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통치”(405)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됩니다. 푸코는 ‘광기’나 ‘감옥’의 문제를 고민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관련된 ‘시민 사회’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우리에게 지금 요청되고, 그것은 또한 자유주의 시스템과 관련해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지 고찰합니다. 즉 시민사회 역시 상호작용에 의한 현실이지 그 자체로 본래적인 현실이나 우리에게 직접적인 현실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따라서 시민사회가 뿌리내린 현실은 자유주의로 불리는 통치테크놀로지의 형식 그 자체, 즉 경제절차의 특수성과 관련되는 권력의 여러 관계와 이런 권력관계들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간의 상호작용, 누구든지 통치할 수 있고 통치당할 수 있는 경계에서 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민사회에는 이미 통치치자와 피통치자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장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미 종속관계가 작동하고 있는 사회 내부에서 권력을 어떻게 규칙화하고 어떻게 제한해야”(426) 하는가가 됩니다. 끝으로 푸코는 통치 합리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가 규칙화되는 과정이 군주의 지혜나 주권자의 현명함에 따랐습니다. 여기서 통치의 문제는 신적 권한이 부여된 법을 인식하는 것, 통치 자체를 도덕적·종교적인 진리관에 기초하여 그것에 맞게 규칙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6-17세기 이후부터 권력의 행사는 주권자의 현명함이 아니라 ‘계산’에 따라 규칙화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는 “힘의 계산, 관계의 계산, 부의 계산, 지배력이라는 요소들의 계산에 따라 권력의 행사가 규칙화”(431)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통치자의 진리는 ‘합리성’에 근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푸코가 말하는 ‘정치’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고찰해온 통치술, 그러한 “상이한 통치술들의 상이한 연동을 수반하는 작용인 동시에 그런 상이한 통치술들이 불러일으키는 논쟁”(433)인 것입니다. 이번 책의 마지막 강의에서 발언했던 푸코의 말을 인용하면서, 후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근대 세계, 우리가 19세기 이래로 알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일련의 통치합리성들이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서로를 지지하기도 하며, 서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서로 각축을 벌이기도 해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에 기초한 통치술, 주권국가의 합리성에 기초한 통치술, 경제 주체의 합리성에 기초한 통치술, 더 일반적으로는 피통치자 자신의 합리성에 기초한 통치술 등. 이처럼 상이한 모든 통치술들, 통치술을 계산하고 합리화하며 규칙화하는 상이한 유형의 모든 방식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19세기 이래로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구성되어온 것입니다. 결국 정치란 무엇일까요? 상이한 통치술들의 상이한 연동을 수반하는 작용인 동시에 그런 상이한 통치술들이 불러일으키는 논쟁이 아니라면 정치가 달리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정치는 바로 여기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433)

다음 시간에는 비기너스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푸코의 이번 책과 관련해 채운 선생님의 강의와 질의응답 시간이 있을 예정입니다. 과제는 지금껏 읽은 책을 골라 서평을 써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내가 새롭게 고민한 것을 차분히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분량은 두 페이지 내외입니다. 그러면 다음 주 화요일(6월 25일) 오후 2시에 만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체 2

  • 2019-06-21 20:00
    왠지 '시민사회'라고 하면 국가의 통치에 반하는 시민들의 연대(?) 같은 뭔가 긍정적인 이미지가 그려졌었는데, 푸코가 그것을 자유주의 통치성의 상관물로 제시한 것이 재밌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시민사회의 등장은 통치가 완화 되었거나 인간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통치가 통치자(주권적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통치받는 자들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행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78~79년 강의에서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어떤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주권자'가 사라졌다는 점이 아닐까요?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피통치자들을 유용한 신체로 규율하고, 게임 참가자들의 의식을 개조하려드는 중심적(주권적) 권력의 부재. "차이의 체계가 최적화되는 사회, 변동하는 절차에 그 장[영역]이 자유롭게 열려 있는 사회, 개인들이나 소수자들의 실천에 관용을 보이는 사회, 게임 참가자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들과 관련해 작용하는 사회, 마지막으로 개인을 내적으로 종속화하는 유형의 개입이 아니라 환경적 유형의 개입이 행해지는 사회의 이미지, 관념, 주제-프로그램"(365)이 나타난다는 것. 반복하자면 이는 통치의 감소나 인간화의 과정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경제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앎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의 모든-경제적인 행위를 조건짓는 환경에 개입하는 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겸손하고도 섬세한 통치와 더불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자본과 수익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직접 통치하는 '삶의 기업가'로 주체화됩니다. '해야 한다'의 통치로부터 '할 수 있다'의 통치로의 이행.

    엠바고 비유가 재밌네요. 정부나 기업의 활동을 비판하는 시민단체들이 자주 거론하곤 하는 '사회적 비용'이라는 말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 2019-06-22 10:22
    건화형 말대로 통치가 피통치자의 내적합리성에 따르는 통치합리성을 갖게 된 것이 특이한 것 같아요. 더 이상 주권자가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통치술이 확 와닿네요. 그럼 이제 누가 '해야 한다'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피통치자들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피셔가 들뢰즈의 말을 빌려 언급한 대목, 지금의 청년들은 동기를 부여받기를 원한다는 현상이 바로 이 지점인 것 같아요. 외부 강제나 규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목표와 의무를 제시하며 동기를 갖게 되는 현상. 자기주도학습, 크리에이티브, 일인기업, 자율성, 자기관리, 자기개발 등 지금의 개인의 완성도나 능력을 평가하는 단어들은 모두 그런 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