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세미나> 에세이 발표 후기 (6.25)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7-01 02:49
조회
184
후기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난 화요일은 비기너스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각자의 에세이를 읽고 채운샘께서 하신 코멘트와 강의를 종합해서 간략히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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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에 말하면서, 자본주의는 단지 거시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의 생산력에 달린 문제만이 아니라 그러한 생산 방식을 개인의 삶에서 추구하게끔 각자를 주체화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고유한 통치술이 없는 사회주의와 달리, 이제껏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통치술을 갱신해가면서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통치성은 내가 상품과 맺는 관계,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가 자꾸만 특정한 방식으로 양도되는 힘에 기반 합니다. 푸코는 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을 구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권력을 '개인의 품행(들)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권력’이란 피지배자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동하고 사고하는 모든 실천에 내재화되는 것이고, 이 같은 분석 틀에서는 피지배자와 지배자를 딱 잘라 구분해 지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 통치성은 품행이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되게끔 만드는 힘-관계인 것입니다.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모든 대상의 가치를 ‘이해관계’로 규정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는 뱀처럼 유연한 통치술을 구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적'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만큼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가능한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한, 그것을 충족해줄 수 있는 (정확히 말해, 충족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하는) 어떤 것과도 친구가 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누구든지 적으로 만들기 때문이죠.

영화 <기생충>은 어떤 문제의식을 지닌 작품일까요? 단지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구분처럼 '계급'의 문제로 자본주의를 문제화하는 방식을 재현하는 영화일까요? <기생충>의 독특한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착취와 피착취의 적대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단상을 그려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통치성은 더 이상 뺏는 자와 빼앗긴 자의 대립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욕망의 차원에서 누가 누구를 닮으려고 하는지, 언뜻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집단임에도 기택 식구들은 어떻게 박사장네의 삶의 양식을 선망하고 있는지 (그렇기에 두 집단은 욕망의 차원에서 어떻게 동질적일 수 있을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착취와 피착취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다면 적대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죠. 니체가 사회주의 혁명이 결국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빼앗고자하는 원한을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비판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근대 이후의 정치경제학에서는 인간이 구사하는 어떤 행위든지 그것이 경제적인 이해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치할까요? 예를 들면, 미래는 실체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어째서 오지 않은 일에 불안을 느끼고, 때로는 자신에게 떨어질 열매에 흥분할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껏 일한만큼 대가를 받을 때의 ‘흥분’과 받지 못할 때의 ‘불안’이 매개하고 있는 것은 결국 돈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정서에 내재해있는 행위양식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저항하려면, 이해관계를 통한 주체화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금 여기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이해 관계'가, 경제적인 ‘합리성’이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번 명심하라는 것. 덧붙여 피셔가 강조했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대상화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깊숙하게 위치한 감각입니다. 우리를 특정한 방식의 삶으로 양도하는 힘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채운샘은 나쁜 것이 밖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의 의식이 일상에서 매번 특정한 합리성을 지향하도록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것을 당부했습니다.

한편으로, 정치적인 영역과 경제적인 영역을 따로 나눌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자유주의의 통치술은 18세기 무렵의 시민사회 개념과 동시에 출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날 시민단체는 기업의 불공정한 경제 활동에 제동을 거는 집단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활동이 자본주의적 경제-게임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는 동의하기 때문이죠. 다만 그러한 게임 진행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월권을 통한 지나친 이익 추구입니다. 푸코가 경제를 경제-게임으로 이해한 까닭은 게임 자체가 변칙을 내포하는 규칙성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게임은 본질주의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국면마다 국지적으로 나타나는 힘-관계의 변동을 전술적인 이해관계로 수용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시민단체의 논리는 결국 개인들의 이익 추구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적 논리와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 정의를 외치는 시민단체들의 실천들과 기업들의 시장 진출을 저지하는 사법적 장치들이 어떻게 하여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에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여기서 통치성은 살아서 움직이는 대상에게 가해지는 힘입니다. 이것은 사람 자체에 대한 실존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사람들의 숫자, 출생률이나 사망률 같은 인구의 변동에 주목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꿈틀거리는 것에 가해지는 힘은 본래의 의도에 들어맞지 않은 변수까지도 자기 논리로 포섭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성공 신화에 부합하는 인물들과는 별개로, 이들과 거리를 두려는 ‘루저(잉여)’의 푸념 또한 통치성이 만들어낸 문화적 풍조입니다. 사회적 성공을 모델삼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과 무기력하게 퍼지는 사람들의 자조어린 냉소가 이 시대의 주체들로 부상하는 이유도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능력을 계발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을, 재산을, 일거수 일투족을 보다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혹은 그렇게 경영하려는) 주체는 언제든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거듭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주체화에서 벗어난 삶의 양식을 발명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지금 위치한 구체적인 삶의 지평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됩니다. 채운샘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생존 문제가 취업 문제로 간단히 이어질 수 있는지, 청년들의 지배적인 담론이 정말로 절실한 현실 감각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한번쯤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Anti-Capitalism]이라는 부제와 함께 시작한 비기너스 세미나도 어느덧 세 달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TV, 신문, 인터넷 등지에서 자본주의를 말하고, 때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공부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현실에 대한 무력한 수용으로 귀결되는 것에 참을 수 없음을 느꼈던 피셔의 질문에서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모와 자본주의 정신을 배웠고, 전문가의 말과 상품에 의존하게 만들면서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일리치의 경고를 들었으며, 자본주의적 인식과 욕망에 깊숙이 관여하는 통치적인 힘을 주목한 푸코의 분석에 귀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만, 여러모로 쉽지 않은 에세이 쓰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전반의 문제의식을 짚어주시면서 아낌없이 지적해주신 채운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비기너스 세미나에서 함께 공부했던 반장님과 학우님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체 4

  • 2019-07-01 16:55
    비록 에세이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초짜 비기너인 저에게는 강렬하고도 짜릿(?)한 세미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한 가지 전략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를 환기시키는 것"이라는 마크피셔의 말마따나,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이 예상치 못하게 자본주의에 맞설 힘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 2019-07-02 14:43
    통치성이란 살아 움직이는 대상들에 가해지는 힘이라는 게 재밌었습니다.
    인간을 자기 삶의 기업가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예기치 않게 무기력한 루저들을 만들어내고,
    또 그런 루저들과 더불어 그들을 통치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이 고안되고,
    그러면서 통치합리성 자체가 새롭게 갱신되는...

    이렇게 끊임없이 변모하는 통치술에 대한 세밀한 분석 없이는 자유도 저항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인도되는 방식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지, 무엇을 무기로 삼아야 할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는 지금 기획 단계에 있는 일리치&푸코 세미나에서 더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한역군 후기 쓰느라 고생이 많았어, 다음 세미나도 함께합시다~

  • 2019-07-02 15:53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 나의 의식이 합리성을 지향하도록 '생산'한다는
    부분에는 저도 뜨끔합니다.
    어떤 성향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도려내려고 할 게 아니라
    세밀한 분석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게 중요할 것 같네요.
    잠 못 이루는 청춘, 한역쌤 후기 쓰시느라 고생많으셨네요.

  • 2019-07-03 11:06
    머터리, 애면글면, 노심초사도 고생 많았네요. 2주차부터 16주 동안 후기 쓰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크~
    앞으로는 '한결' 여유가 생기겠네요? 그 시간에 체력을 기르며 다음 세미나를 준비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