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세미나

<명리학 세미나> 9차시 수업 보충 및 10차시 수업 공지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20-04-23 11:41
조회
110
코로나의 역설

코로나 기세가 조금 수그러진 듯 보여서인지 오늘 세미나에는 그동안 집에서 착실히 독학하시던 두 분 샘이 나오셔서 참 반가웠습니다.  5월엔 강의실에 책상이 더 빼곡하게 놓이겠지요?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오늘(4월22일)이 ‘지구의 날’이었는데요, 저녁 뉴스에 나온 위성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코로나의 역설’이라고 이름 붙인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써 있습니다. ‘인간이 격리되자 가려졌던 지구 모습이 복원됐다!’  코로나 때문에 공장과 상가, 학교가 문을 닫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거꾸로 공기는 깨끗해지고 거리는 한산해졌으며, 도시도 바다도 하늘도 조용해져 물고기와 동물과 새들은 드디어 평온한 세상을 만나게 된 이 역설!  200㎞ 밖 히말라야산맥은 선명하게 보였고, 만리장성과 프랑스 에펠탑 주변도 너무 깨끗하고 맑아 보였습니다.  사람의 왕래가 70퍼센트 이상 줄어들었다는 일본 신주쿠 거리의 모습을 보며 왜 저는 ‘오래된 미래’가 앞당겨질 것 같은 희망이 떠올랐을까요?  맞아죽을 지 모르는 생각이겠습니다만, 24시간 멈추지 않고 가동되던 공장의 기계들이 한 숨 돌리며 쉬고 있는 모습도 반갑고, 검은 연기를 쉴 새 없이 토해내던 공장의 굴뚝들이 평안하게 숨고르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비만이 살 길이라는 굳은 신념을 일단 정지시킬 수 있는 코로나의 위력이 마치 어떤 神的 권능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분명 악재이겠습니다만, 뭇 중생들에게는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대단한 혁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오랫동안 3월과 4월을, ‘새로운 시작’으로서가 아니라 ‘잔인한 달’로 기억해 왔던 아이들에게 코로나는 ‘봄의 새로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을겁니다. 굳이 학교가 아니어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한 많은 이들에게는, 이제 그렇다면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진지하게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 것이 코로나이니, 정말 대단한 코로나 아닙니까? 게다가 저처럼 한참 뒤떨어진 감각으로 늘 한 걸음 뒤처져 살아온 이들에게 코로나는 말로만 들었던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민낯이 어떤 거라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살아서 두 번도 하지 못할 이런 새로운 경험을 하며, 참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참으로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학교는 어떻게 변할까? 일터는 또 어떻게 변할까?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해왔던 이 익숙한 삶의 방식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庚子년이라는 이 기막힌 변곡점을 지나면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까? 봄이라는 한 철을 살았을 뿐인데 문득 한 세기가 통째로 회귀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코로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분의 변화가 이 우주 전체를 다시 생성해내고 있습니다. 이 ‘나쁘지 않은’ 느낌, 이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冲은 움직이게 하고 생성하는 작용
支神只以冲爲重 刑與穿兮動不動(지신지이충위중 형여천혜동부동)

지지는 다만 충이 중요하고, 형이나 파 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地支逢沖 猶天干之相剋也 須視其强弱喜忌而論之 至於四庫之冲 亦有宜不宜

(지지봉충 유천간지상극야 수시기강약희기이논지 지어사고지충 역유의불의)

▶ 지지에서 충을 만나는 것은 천간에서 극을 보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일주의 강약과 희용신인지 기구신인지를 봐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辰戌丑未의 충돌 또한 마땅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명리에서 말하는 冲은 바로 코로나와 같은 작용을 합니다. 정적인 우리의 시간표를 움직이게 하고 뭔가를 변동하고 재생성하는 작용을 합니다. 단지 깨트리고 부수는 게 아니란 말씀이지요. 적천수에서 철초 선생은 형, 파, 해는 볼 것도 없다고 일축하면서, 충에 대해서는 ‘다만 충이 중요하다’며 한 마디 거들고 있습니다. 충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그래서 내내 머뭇거리기만 했던 기운에 시동을 걸어 엔진을 작동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마치 미동도 하지 않는 듯 보였던 지반에 슬금슬금 균열을 내며 뭔가 꿈틀댈 수 있도록 틈을 마련해주는 일을 코로나가 해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사주 원국에 충이나 형, 파, 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프로라고 한답니다. 어떤 지혜도 고통 없이는 나올 수 없습니다. 겨울 동안 캄캄한 땅 속에서 水 운동의 큰 압력 속에 갇혀있던 씨앗만이 봄에 땅을 뚫고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水의 지혜는 아무리 두터운 지반도 뚫고 나올 수 있는 힘입니다. 지혜는 고통에 기반하기 때문에 뭔가 움켜쥐고 있던 이들에게 그것은 움켜쥔 것이 뒤집어져 엎어지는 경험일 것이고, 뭔가 정체되어 답답함을 느끼던 이들에게는 ‘60 방망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충은 자극을 가함으로써 꺼내고, 살려내어, 새로운 것을 생성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喜, 忌로만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이 방면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는 어떤 이는 명리 공부를 하며 꼭 기억해야 할 말이 ‘喜忌 同所’라고 했습니다. 군인에게 전쟁터는 죽음을 불러오는 대흉의 자리지만, 그 전쟁터가 없이는 군인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전쟁터는 喜忌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同所인 셈이지요. 하긴, 사는 일에 喜忌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바로 태극, 음양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음양의 이치는 다만 작용이고 변화일 뿐이지요. 우리가 분별을 붙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든 다만 변화의 작용 그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격국론에서는 喜忌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격국이라는 것 자체가 ‘그릇’이라는 體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릇을 그릇답게 해주는 신이 喜用神이고, 그것을 깨지게 하는 신은 忌仇神입니다.
暗冲暗會尤爲喜 我冲彼冲皆冲起(암충암회우위희 아충피충개충기)

운에는 충이나 합이 일어나면 더욱 좋다고 하겠는데. 내가 충하든 저가 충하든 충이 일어나게 된다.

암충 암회(暗冲, 暗會)란 사주 원국 안에서의 충을 明冲, 합을 暗合이라고 일컫는 것과 구분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대운, 세운에서 오는 글자가 사주 원국과 충합이 되는 작용을 일컬어 암충 암회라고 합니다. 즉 운에서 사주 원국에 寅이라는 글자가 있을 때, 대운이나 세운 등에서 申이라는 글자가 오면 寅申冲의 작용이 벌어지지요. 이것이 暗冲입니다. 그것을 암충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寅과 申의 충은 寅의 지장간에 있는 ‘戊, 丙, 甲’와 申의 지장간에 있는 ‘戊, 壬, 庚’이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지장간에 있는 천간 기운의 상충이기 때문에 ‘暗冲’이 되는 것이죠. 즉 寅申冲은 ‘丙壬冲’, 甲庚冲‘인 것이지요. ‘暗會’는 진이 있는 사주 원국에 대운이나 세운 등에서 ‘酉’라는 글자가 왔을 때 ‘辰酉合’, 즉 진중 ‘을목’과 유중 ‘경금’이 ‘을경합’이 되는 작용입니다. 그런데 사주 원국에 辰과 酉가 있을 때 ‘暗合’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 運에서 오는 암합은 ‘暗會’라고 부릅니다. 즉 때에 따라 모이지만 그 때가 지나면 흩어진다는 것이죠.

그런데 적천수에서는 ‘내 편’과 ‘저 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철초 선생은 이를 희용신이 ‘내 편’이고 기구신이 ‘저 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격국을 중시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개념일 것입니다. 이 때 사주 원국의 喜用神에 대해 잘못 인식하게 되면 彼我가 바뀌게 됩니다. 어떤 것이 희용신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격국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있어야겠지만, 요즘의 관법에서는 이를 별로 중요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음양의 中和지요. 전에 말씀 드렸듯이 사주의 해석은 사주 원국의 글자들이 가지는 음양의 치우침을 잘 살펴 그것들의 중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글자가 희용신이고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글자가 기구신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旺者와 衰者
旺者冲衰衰者拔 衰神冲旺旺神發(왕자충쇠쇠자발 쇠신충왕왕신발).

왕성한 자가 쇠약한 자를 冲하면 쇠한 자는 뽑혀 나가고, 쇠약한 자가 왕성한 자를 冲하면 왕성한 자는 도리어 발하게 된다.

일테면 사주 원국에 있는 寅이 월령을 잡아 왕성하고 다시 火도 있다면 운에서 申이 왔을 때, 寅木의 왕한 기운이 능히 申金을 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왕자충쇠쇠자발’입니다. 사해충도 마찬가지죠. 사해충에서도 사화 속의 병화와 무토가 해수 속의 임수와 갑목에도 극을 받게 되지만 사화가 월령을 잡고 있으면서 또 사주에 목이 있다면 사화도 능히 해수를 충할 수 있습니다. 화극수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철초선생은 ‘먼저 그 쇠약함과 왕성함을 살피고 나서 사주의 해결사가 있는지 봐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辰戌丑未의 충은 조금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즉 진술축미의 四庫에 있는 지장간들이 천간에 드러나 있지 않고, 또 그들이 당령도 하지 않았으며, 일주와 절실한 관계가 아니어서 용신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면, 이들은 설사 충을 당했다 해도 별다른 해가 없습니다. 형제끼리의 충이어서 그렇다죠?

사주의 왕쇠를 잘 살필 때 맨 먼저 월령을 잡았는지를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득령(월령을 잡았는지의 여부), 득지, 그리고 삼합과 방합, 천간의 오행이 뿌리를 두었는지의 여부, 이런 것들을 살피는 일이 왕쇠강약을 살필 때 꼭 해야 할 일입니다.

◈ 다음 시간에는 <干支總論>을 시작합니다. p.245~ 262까지 공부해 오시기 바랍니다.

'陰陽順逆之說'에 대해 철초 선생이 어떤 의견을 보이셨는지 잘 살피며 읽으시기 바랍니다. 전에 나누어 드린 12운성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다음 시간 간식과 후기는 김승우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주 평안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전체 4

  • 2020-04-23 22:40
    지난 시간에 배운 것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네요. 사주는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천변만화한다는게 재밌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 같아요. 샘 오늘도 잘 듣고 갑니다.

  • 2020-04-25 08:19
    샘이 들려주시는 코로나로 달라진 맑은 세상 이야기에
    쏙 빠졌습니다ㅡ
    코로나 때문에 고통속에 피어난 꽃을 보게 된것인데ㅡ
    코로나가 인간의 욕심이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고 좀 쉬어가라! 라고 하는듯 합니다ㅡ
    동의보감에도 열심은 심장에 열받는거라고 열심히 살지 말라고 했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
    모두가 멈추고 되돌아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ㅡ
    선생님의 글들을 다른 제자들의 후기와 함께 책으로 출간하시면 좋을듯
    열심히? 가르쳐 주신 샘. 감사합니다ㅡ

  • 2020-04-25 08:53
    네ㅡ
    이제 알았어요ㅡ
    댓글에는 하트나 스마일을 넣으면
    저장이 안되는거네요ㅡ
    어떤 때는 저장이 되고. 어떤 때는 안되고ㅡ
    아ㅡ그것도 아닌가봐요? 지난번에 하트넣고도 저장했는데요?? 일단 하늘의 뜻으로ㅡ

  • 2020-04-25 08:31
    ㅎㅎㅎ 공지 제목 옆 괄호 안 숫자가 마구마구 올라간 것이 우리 효신쌤의 노력? 때문이었군요~^^ 이제 완죤 숙지하신거져? 효신쌤 그 야무진 작은 몸에서 뿜뿜 뿜어나오는 열정을 매번 확실하게 느낍니다. 한 폭의 그림같은 과제 공책, 댓글, 그리고 카톡으로 질문하실 때의 그 진지함!! 열심이 심장에 열받는 일이라 해도 열심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없겠지요? 아마 열심의 '열'이 열매의 '열'이 아닐까 저는 확신합니다.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