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 Q 2학기 1주차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17-04-29 22:23
조회
219
드디어 그를 만났습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소문으로만 듣던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는 그와 직접 만난 건 아닙니다. 그건 예정보다 뒤로 미루어졌고 이번 시간엔 꽤나 멋진 사람들이 그를 애정과 존경을 듬뿍 담아 소개해주었습니다. 그와의 만남 전에 사전 정보도 얻고 그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이 상승한 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소개를 해준 남자들도 참 멋지지만,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던 그는 스.피.노.자.입니다.

아... 스피노자... 플라톤도 무정한 시대를 살았었지만, 스피노자 그의 삶도 참 절절합니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의 고민과 문제의식에서 나오듯이 스피노자야말로 철저히 그 시대를 살았고 그래서 더 반시대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스피노자의 시대인 17세기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위시한 근대철학의 시작이자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시기이며 종교개혁 후 교왕과 왕의 권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대였지요. 들뢰즈의 말처럼 한 철학자의 철학적 전회가 파문이나 살해 기도인 경우는 얼마나 드문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알 듯 말 듯합니다.

 

18세기까지 스피노자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숙명론과 허무주의적 해석이 주를 이룹니다. 스피노자 철학이 부각된 건 60년대 프랑스에서였는데요, 당시는 구조주의 시대였습니다. 그 구조주의 맥락에서 스피노자가 연결될 수 있었던 건 ‘주체란 구성된다는 것’.

우리는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것, 감각한 것, 한정적으로 경험한 것을 통해서 얻은 인식인 ‘상상적 인식’을 가지고 세계를 만듭니다. 이런 이미지나 표상에 의존하는 인식을 가지고 출발하기 때문에 주체는 출발점에 있는 게 아닙니다. 편견과 부적합성, 상상적인 것들로부터 인식하는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 지점을 고민합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고 진짜를 인식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플라톤과 달리 상상적인 것들이 가짜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아니라면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더 고차원적인 인식을 향해 이행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스피노자는 문제화하고 있습니다. ‘주체가 출발점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인식에 의해서 주체는 구성된다’는 주체의 정합성에 대한 부정, 인간주의에 대한 반대의 측면을 구조주의자들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것이지요.

이 당시는 또 사회주의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일던 시기기도 합니다. 맑시즘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던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성 모색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스피노자가 완전히 상이한 정치론을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헤겔의 스피노자 해석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는 네그리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던 건 이미 알고 있던 개념들이었습니다. ‘생성’이나 ‘존재’를 기존에 갖고 있던 관념으로 읽으면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 문제는 <에티카>를 읽는 내내 유념해야 할 점이기도 하지요. 채운쌤께서는 스피노자가 새로 발명한 개념은 하나도 없고 원래 있던 개념을 가지고 와서 변용해서 쓴 것이라서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우리에겐 더욱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게 스피노자의 독특함이라고요. <에티카>를 읽는 내내 ‘자연’ ‘신’ ‘실체’ 등등 기존에 알고 있는 관념 등에 끄달리지 않고 개념 하나하나를 활용해보는 것 그것이 큰 실험이자 도전이 될 숙제라고 느껴집니다.

네그리의 글에 나오는 생성이란 헤겔의 변증법적 생성을 말합니다. 헤겔은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죠. 그 내적 모순이라는 부정성을 다시 한 번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지양으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운동이 일어나고, 이 운동이 절대정신의 외화라는 지점을 향해 가는 헤겔의 사유는 총체화와 목적론의 사유이자 직선적인 시간 구도 안에 위치합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으로 규정하는 헤겔과 달리 스피노자 철학은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지상의 존재 중에 완전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불구나 불완전성은 항상 정상성이나 완전성이라는 외부의 기준이 존재할 때 생기는 것이지요. 스피노자 철학은 존재의 지평 너머에 어떤 초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벽한 내재성의 사유입니다. 드러나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 네그리는 그걸 ‘존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네그리는 스피노자적인 진리는 행위하면서 펼쳐지는 것이고 그 진리는 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네그리는 대중, 피플과는 다른 자기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상이한 역량들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대중운동을 생각해 내고, ‘다중’이라고 개념화합니다. 그러나 ‘다중’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지점이 스피노자에게 있더라도 스피노자는 대중에 대해서 규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아주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촉발될 수도 있지만 거꾸로 가장 반동적인 방식으로 변환할 수 있는 욕망도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들로 보았지요.

네그리는 정합적이고 규범적인 양상으로 권력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칭하면서 이것을 철학자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네그리는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가 인간의 관념에 있는 변증법적 생성에 맞서서 실존의 충만함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순을 통해 극복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변형력을 내재하고 있는 충만한 존재라는 것이죠. 두 번째가 절대적 필연성 여기서 말하는 필연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일어나야 하는 또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스피노자는 정신에 우월성을 두지 않는데요, 이 세계 안에 물질, 물체가 따르는 모든 법칙을 정신 또한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도 자연 안에 있으므로 신체들의 질서와 연관을 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정신이나 앎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유지요. 모든 것은 일어나는 방식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이 세계의 필연성을 알면 우연히 닥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필연의 한 계기가 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필연을 깨닫게 되면 결국 우연에 대한 긍정에 이르게 되죠. 세 번째가 생산적인 상상의 힘입니다. 조 토론에서 모두들 “세계가 윤리적인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윤리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고 얘기 나누었는데요. 윤리적인 세계와 아닌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존재가 윤리성을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을 네그리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채운쌤께선 윤리란 다른 삶에 대한 혹은 다른 실존에 대한 상상이자 우리가 자기의 존재와 다른 관계를 상상해 낼 수 없다면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번째 ‘사랑’을 네그리는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은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관시킵니다. 촉발을 하고 촉발을 받으면서 뭔가 공통적인 것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이며 네그리는 그것을 혁명에 필요한 사랑으로 가지고 옵니다. 다섯 번째가 이성에 의탁하는 영웅이죠.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인식하고 이해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정서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정신과 신체의 활동은 반드시 정서를 수반합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이성과 정서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느끼는 방식과 이해하는 방식이 하나인 분이셨죠. 스피노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 지점에 이른 분이시죠. 만일 스피노자가 불교를 만났다면 참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스피노자는 존재는 자기 안에 자기 변형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이걸 ‘역량’ ‘힘’이라고 얘기하는데요, 니체의 ‘힘’과도 같은 계열입니다. 스피노자의 최고의 적자가 니체라고 들뢰즈가 말하듯이 둘의 사유는 통하는 데가 많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범신론자들이 생각하는 정적이고 부동적인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있는 자연 자체를 말합니다.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실재를 생산할 수 있는 힘, 역량 이게 신입니다.

신체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라는 점도 둘의 공통성인데요.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도대체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이 중요하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쌤께서는 막상 <에티카>에는 ethics이 없다고 하셨죠. 에티카라는 문제가 어떻게 인식과 존재와 연관되는지를 우리가 끄집어내야 한다고요. “어떻게 윤리를 의무와 당위로 구성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이번 학기 내내 열심히 붙잡고 있어야 할 화두입니다.

들뢰즈는 두 개의 에티카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정의, 공리와 같은 기하학적 질서에 의해 쓰여진 사람들의 이성을 사용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에티카가 있고, 그 사이 사이에 있는 주석과 부록 같은 투쟁과 정념과 비판의 에티카가 있다고 말합니다.

항상 고민되는 지점이지만 표상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을 긍정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복잡한 연관 관계에 의해 모든 것들로 인해 존재한다는 연기 조건 안에서 사유한다면, 그걸 믿는 게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면 어떤 윤리를 구성할 수 있을까요? 의무와 당위로 구성되지 않는 윤리를 진정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하학적 방식으로 쓰여져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스피노자의 글쓰기도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사유의 질서가 구성되고 물질들의 질서가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의 정신도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의도가 이해됩니다. 쌤은 스피노자가 이런 식의 수학적 글쓰기 스타일을 통해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해가는 과정도 필연적으로 이해하기를 바랬다고 하셨는데 문득 스피노자의 절실함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정말 이해하기를 바라는 믿지 말고... 그의 마음이 말입니다. 스피노자의 기대에 정말 부응하고 싶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기라도 하듯 예속을 원하는가?” 전에 라이히의 책을 읽으면서 먹먹했던 이 질문을 다시 마주하면서 스피노자가 얼마나 현재적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완벽한 심신일원론을 주장한 위대한 유물론자이자 수공 기술을 갖춘 철학자-장인이자 한 번도 경험의 지평, 인간 실존의 영역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문제화할 수 있었던 지점들이 또 얼마나 우리를 설레게 만들며 고민에 빠뜨릴까요?

긴 방학 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스피노자와 씨름을 하겠지요. 중간에 우린 집합적 신체를 만들 수도 있을 듯도 합니다만.^^ 지난 학기 플라톤을 찐하게 만나고 쿨하게 헤어지려 했었으나 마지막까지 양가적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저로서는 스피노자와의 만남을 어떻게 구성해내야 할지 고민입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미련 없이 싸랑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ㅎㅎ

 

 

 
전체 3

  • 2017-04-30 13:32
    플라톤도 그렇고 스피노자도 그렇고 적당히 살만해서 철학한 사람은 없는 것 같네요. 적당히 살만한 저는 어쩌죠ㅋㅋㅋ스피노자와 제대로 씨름해보고 싶습니다

  • 2017-04-30 13:32
    새로 발명한 개념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다르게 해석했다는 것은 공부의 방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고, 기존의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건 어떻게 보면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중요한 건 개념들을 만나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러면서 자기도 같이 변하는 게 되려나요. 이번 학기에는 이걸 목표로 해봐야 겠군요....!

  • 2017-04-30 13:33
    플라톤과 헤어지고 만나는 스피노자...전에 쪼끔 읽었을 때는 존재의 역량을 계속 의식하게 되는 거 같아요...이번에는 스피노자와 찐하게 만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