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4학기 5주차(11.14)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11-12 22:12
조회
165
최종 에세이를 쓰는 4학기가 어느새 절반이 지나가 버렸네요! 이제 남은 것은 배운 것을 잘 버무려 써가는 일뿐! 다음 시간까지는 에세이 서문을 써옵니다. 자기 자신이 발견한, 그리고 조원들의 몇 간의 코멘트와 지난 시간 채운샘의 코멘트를 곰곰 되새기며, 대단치 않아도 ‘난 이래서 이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문제를 정리해 봅니다. 분량은 1.5장 정도로 촘촘히 써보고, 본문에 들어가야 할 내용들의 얼개도 짤 수 있으면 짜 옵니다.

이번 시간에는 조별 개인과제 토론이 있었고, 이후 개인별 문제의식에 대해 채운샘의 긴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저에게도 해당되는 몇 가지 코멘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역시나 에세이를 시작하기 전에 저희는 이상한 상태, ‘문제 없음의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이대로도 행복한데 굳이 문제를 꼬집어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아니면 문제가 있을 텐데 문제를 못/않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건가? 하는 의문으로 그 문제 없음을 문제의식으로 삼아보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 ‘문제’란 뭘까요? 우리가 ‘문제 없다’고 말할 때 전제되는 문제 있는 상태를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그것을 지금 당장 괴롭거나 장애가 되고 있는 고통이나 불편함으로 간주합니다. 말 그대로 남들 혹은 이전의 처지와 비교했을 때의 결여나 쉽게 파악 가능한 곤경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문제는 정말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트러블, 즉 힘든 사건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고고’(苦苦)라고 합니다. 그런 손에 잡히는 트러블이 없는 경우는 꽤 많습니다.

하지만 철학에서의 문제 혹은 문제화는 그렇게 일차원적인 고통이나 곤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과 우리 의식 간의 간극과 연관이 있습니다. 존재의 본질은 생성하고 변화함입니다. 자연의 그 무엇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고 우리가 아는 법칙에 온전히 가둬지지 않고 빠져나갑니다. 똑같아 보이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 태어남과 죽음의 반복도 한 번도 동일한 것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은 고정시키고 포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파악합니다. 그 변화의 한 단면을 실체화하고 고정점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 간극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며,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화를 냅니다. 불교식으로는 변하는 것에 대한 고통인 ‘괴고’(壞苦)와 뭔가가 있다고 하는 데서 수반되는 고통인 ‘행고’(行苦)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포착하는 의식과 빠져나가는 자연(즉 세계의 모든 것).

그러니까 문제를 찾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유전하는 만물 위에 관념과 표상과 개념을 끊임없이 찍어내는 우리 의식의 견고한 습관일 것입니다. 당장 내 일상의 괴로움과 상처도 좋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즉 어떤 국면에서 나는 나의 개념틀 혹은 와꾸(?)를 세계라고 믿어버리는지, 어떤 몰이해로부터 내가 반복적으로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를 캐치해내는 것. 그것을 캐치하고 자신의 상태를 바꿀 수 있을 때, 마치 생명이 온도를 문제화하고 대사를 조절해 항온을 유지시키듯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건강을 발명할 수 있습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기억하며 곰곰 자기 자신을 문제화 해 봅시다.

또 기억에 남았던 말씀은 인정 욕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채운샘은 우리가 아직도 얼마나 헤겔적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해 썼습니다. 니체의 주인과 노예 개념은 헤겔의 패러디이자 극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헤겔에게서 주인과 노예의 구분은 매우 기이하면서도 우리와 닮아 있어서 놀랍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누구든 타자와 구별되는 의식을 갖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 의식을 갖기 위해서조차 우리는 타자를 필요로 합니다. 노예는 겁이 많아서 자기 의식을 지키지 못하고 누군가의 지배를 받아들입니다. 주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의식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투쟁 끝에 그것을 보존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주인에게는 그런 보존을 위해서조차 지배당하는 노예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즉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타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인은 자기 안에 타자의 시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의식은 곧 내면화된 타자의 의식이지요. ‘부정의 노동’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긍정. 그런 한에서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니체는 그런 자를 노예라고 말했습니다.

니체에게서 주인의 의미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타자의 인정 여부가 그의 가치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것들에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즉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한 저울 위에 놓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30쪽)합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하는데 왜 타인을 경유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의 표현과 확장이기에 그는 다른 이들에 대한 부정이나 그 부정된 자들의 인정이 아니라 그들로부터의 ‘거리의 파토스’를 원합니다. 차이를 향유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다르다는 것, 즉 저들에게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기쁨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르다는 것이 공포가 아니고, 그들을 자신과 혹은 자신을 그들과 동일하게 만들고자 하지도 않으며, 그 다른 이들에게서 배우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3조에서 니체 유고를 읽다가 발견한 나누고 싶은 구절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코멘트에서도 잠깐 나왔던 니체에게서의 강함과 약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인 것 같습니다.

“강함을 측정하는 척도 : 반대되는 가치평가 아래 살 수 있으며, 그것을 영원히 다시 원하는 것.”(<유고(1887년 가을 ~ 1888년 3월)>, 9[1], 9쪽)

“얼마만큼 우리가 가상성과 거짓의 필연성을 몰락하지 않고도 시인할 수 있는지가 힘의 척도라는 것.”(같은 책, 9[42], 26쪽)

“대립과 반대 충동의 종합은 한 인간이 가진 전체 힘의 표시다 : 그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유고(1885년 가을 ~ 1887년 가을)>, 1[4], 11쪽)

니체에게 강함이란 세계를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충동이나 가치평가로 통일시키는 것도, 자기 자신을 실재와 진실로만 채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반대되는 가치평가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고, 가상과 거짓, 즉 무의미로서의 세계의 필연성을 체념이나 허무 없이 시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음이 강함입니다. 뭔가 내가 아는 강함과 다르다는 느낌은 오는데 제 생각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고 여전히 아리송하네요. 남은 5주 동안 생각을 밀어 붙여, ‘생성이다, 긍정이다’라는 말로 에세이를 마치지 않도록, 니체에 대한 저희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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