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4학기 9주차(12.12)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12-08 15:50
조회
258
 

훌쩍 다가와 버렸습니다. 다음 시간이 벌써 대망의 초고 쓰기! 2년 동안 혹은 1년 동안 니체 전집을 다 읽고 ‘나는 어떻게 니체를 만났는가’라는 주제의 최종 에세이 쓰기가 어느새 코앞이네요... 다시 어수선한 시국에도 다들 힘내서 쓰고 계실 거라 믿고 이번 시간 채운샘께서는 에세이 코멘트를 줄이시고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개념들을 제가 들은 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분석과 해부라는 용어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습니다. 에세이를 쓰면서 저희는 자기 자신을 분석한다거나 해부한다거나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먼저, 그러나 분석이든 해부든 그것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여기서 분석되거나 해부당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이라고 칭해지는 것은 우리의 몸일까요? 당연히 물리적인 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아, 즉 과거로부터 내가 겪어오고 나라고 잘 알고 있는 어떤 인간성 같은 것일까요? 그런데 그런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민호라는 인간의 특성 혹은 과거는 저의 기억 속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 기억 속에는 다른 모양과 색깔로 조각조각 남아있겠죠. 문제는 그런 기억이라는 것이 별로 신뢰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날은 전혀 없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제멋대로 왜곡되어 중간 중간 덧붙여지고, 누락되고, 또 지금의 문제들이 끼어 들어가서 얼룩덜룩, 들쑥날쑥하게 흘러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의 기분, 날씨, 포만감, 건강상태에 따라 과거의 색채는 다르게 칠해집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라는 대상은 외따로 실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것입니다.

분석과 해부의 차이는 여기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분석(특히 정신분석)은 자신의 현재를 과거라는 원인의 결과물로 보기 위해 과거를 분석합니다. 지금 너의 불안은 유년기에 아버지와의 그 사건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정신분석학자는 신화와 무의식을 동원해 원인을 마련코자합니다. 반면 니체나 루쉰에게서 사용되는 해부라는 표현은 지금의 나를 과거와 연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해체하고자 하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이미 자기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여러 기억과 그 인식의 습관들, 단순화되고 변조된 방식으로 이어붙인 인과 관계의 다발들을 풀어내는 것이 바로 해부이지요. 에세이에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해석할 때, 고발할 수 있는 원인을 찾는 분석보다는, 드러난 그 문제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조건들을 탐구하는 해부를 시도할 때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하는 비판의 도주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제가 시급합니다..ㅎㅎ).

채운샘은 인간의 의식의 한계(혹은 탁월함)은 불연속을 불연속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위에서 적었듯 우리의 기억은 얼룩덜룩, 아른아른, 깜빡깜빡합니다. 종이에 적어놓은 글과 같이 한참 뒤에 봐도 그 모양 그 색깔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채운샘은 우리의 기억속의 사건이 정말 있었던 건가하는 물음과 함께 정말로 명멸하고 있음을 느끼신다고 했습니다. 클로소프스키는 이렇게 썼죠.

“최초에는 명멸하는 기억뿐이다. 그 기억은 일상적 기호의 지시작용들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그 지시작용들은 변화하는 자극들에 따라서 개입하며, 우리의 상태의 불연속성 전체를 은폐하는 고유한 연쇄들을 가져온다.”(<니체와 악순환>, 65쪽)

“우리는 일상적 기호의 코드에 비한다면 불연속적 상태들의 연속에 불과하고, 이 연속에 대해 언어의 불변성은 우리를 속인다. 우리가 이 코드에 의존하는 만큼 위는 우리 자신의 연속성을 고안하지만, 우리는 사실상 불연속적인 것으로 살아갈 뿐이다.”(같은 책, 67쪽)

이 불연속 혹은 명멸이라는 개념을 니체는 충동들의 수와 강도, 증강과 감소,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충동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영향을 공급받는 법칙은 저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즉 어떠한 충동이 언제 어떻게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지 저희는 전혀 알 수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매번 다른 상태로, 띄엄띄엄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충동들이 바로 ‘이성의 후견인’이라고 표현합니다. “거의 비슷한 텍스트가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 즉 창작하는 이성이 동일한 신경의 자극에 대해 오늘과 내일, 전혀 다른 원인들을 마음속에 그려낸다는 것은 이 이성의 후견인이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데 근거한다.”(<아침놀>, 119절)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나’라고 느끼는 어떤 연속성은 끊임없는 불연속들을 의식이라는 접합체가 엉성하게 이어붙인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자세히 보면 그 이음매는 헐겁고 마감처리도 조잡하지만, 너무나 습관적으로 반복된 탓에 우리는 스스로의 명멸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언어, 이름, 가족관념, 학교, 직장 등의 정체성들과 문화적 관습들과 더불어 저는 어제나 지난달과 같은 성민호이자 내일과 내년에도 같을 성민호가 됩니다. 따라서 자아라는 것은 습관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은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생각은 어제와 95퍼센트 동일하다고 합니다! 놀랍지만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매일 같은 곳에서 잠에 들고 깨며, 같은 동선을 지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며, 비슷한 음식을 먹습니다. 이런 섭생의 동일성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형성하지 않을 겨를이 있을까요? 사실 자아가 견고한 것은 자아를 만드는 습관이 견고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문제 삼을 때, 적어도 우리 스스로에게 ‘난 너무 자아가 강해’ 혹은 ‘자아는 나쁜 것’이라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정상병’이라는 주제도 이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조건 속에서 자기 이미지와 정체성을 형성한 저희는 다수적인 경향들로 여겨진 정상성을 타자를 평가하고 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비정상, 병, 광기, 소수, 악으로 취급하지요. 하지만 들뢰즈의 번개 펠릭스 가타리에 따르면 그러한 정상성에 대한 집착 자체가 병입니다. 그는 ‘정상병’을 메이저리티의 불치병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병이란 무엇일까요?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어딘가에 매달려 있음, 다른 것으로부터 영향 받고 변형될 수 없음, 모순되는 것을 참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태도들이 그에 부합하지요. 현상에서 의도와 의미가 없는 것을 고통보다도 더 괴로워하는 태도(즉 목적론), 비슷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유비적 사고, 언제나 하지 않을 수도 있음과 할 수도 있었음이라는 잉여를 덧붙이는 자유의지와 가능성의 사고방식, 선악의 규정성, 가족 등의 독점적 관계 영토, 언어 등. 정상성은 이런 것들의 가치로 실재성을 포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놓은 포장을 질문하지도 질문을 일으키는 것들을 참아내지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병입니다. 정상은 언제나 여럿이고 동일합니다. 그러나 비정상은 톨스토이가 단정한 불행한 가족처럼 모두 다른 형태이지요. 매이지 않기에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고 다양할 수 있는 것이죠.

지난 시간 후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는 에세이 초고를 써오셔야 됩니다.

-금요일 밤까지 꼭 숙제 방에 올려주세요! 뭐가 나오든 이번 주는 일상을 잘 다스려 끝까지 써보아요(저도 갈길이 멉니다...)!! 같이 힘을 내봅시다~!

-간식은 저와 은옥샘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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