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9월 9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9-05 08:35
조회
80
어느새 《맹자》 〈고자 상·하〉를 읽게 됐네요! 맹자의 성선론이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장인데요. 스피노자를 읽을 때, 코나투스와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코나투스와 성선(性善)은 스피노자와 맹자가 내재적 세계의 윤리로 가져오는 개념들입니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지 혼자 상상만 해왔는데, 이제 선생님들과 같이 읽게 되어 매우 기대됩니다. ㅎㅎ

다음 주에는 《맹자》 〈고자 상·하〉,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12~14장 읽어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맹자에서 정치는 왜 성선(性善)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지, 제도에 기대는 것만으로 불충분하다고 했는지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는 개체가 이성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실천과 정치의 참여과 분리되지 않는데요. 정치와 철학이 분리되면 미신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맹자에서도 본성을 이해하지 않는 정치가 어떤 한계에 봉착하는지도 같이 정리해주세요. 간식은 현정쌤, 후기는 진성쌤께 부탁드릴게요~

 

스피노자는 《에티카》 4부 서문에서 본성에 일치하는 것을 선(善)으로, 반대로 일치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악(惡)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때의 선악은 신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 초월적 도덕이 아니라 보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가설하는 일시적 방향입니다. 사실 《에티카》를 읽을 때 이 내용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몇 번 정도는 떠올렸던 당연한 명제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을 같이 생각하면, 선악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해가 어떤 점에서 혁명적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 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다(활동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다(활동을 겪는다)라고 말한다.” - 《에티카》 3부 정의2

양태로서 인간은 다른 양태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존상 수동(활동을 겪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경험에 고착되어 특정 정념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부적합한 인식에 따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대단한 점은, 이러한 실존 조건으로부터 윤리를 발명하는 데 있습니다. 채운쌤은 수동인지 능동인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힘의 차이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죠. 어떤 관계에서 어떤 행위가 역량을 어떻게 이행시키는지, 내가 기쁨 혹은 슬픔을 느끼게 되는 변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특정한 관계 맺음이 나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만든다면, 그로부터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덜 슬프게 되는 것까지 포함해서) 관계를 조직해야 합니다. 슬픔은 제거해야 할 정념이 아니라 역량 증대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교정돼야 할 정념인 것이죠.

강의를 듣다가 비슷한 논리를 유학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논어》 〈계씨〉 9장에서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는 최상이다. 배우면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다. 곤란함에 처하고 아는 자는 그 다음이다. 곤란한데도 배우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낮다고 여긴다(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고 말했습니다. 우쌤은 여기서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학지는 시간적 차이일 뿐 존재론적 위계를 뜻하지 않는다고 하셨었죠. 곤이학지라도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양지양능(良知良能)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에게 내재된 도(道)를 회복하기 때문이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여기서 알게 되는 대명사 지(之)는 우리가 본성에 일치하는 데 있어서 유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철학적 목표는 외부에 있는 앎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이미 작동하고 있는 ‘나’라는 개체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체적 단어, 시공간적 조건이 달라도 결국 모든 철학은 ‘나’를 이해하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채운쌤이 문장을 훔치신 스티글레르는 ‘일’과 ‘고용’을 분리합니다. 그는 러다이트 운동을 단순히 기계가 노동자의 자리를 뺏는다는 것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자신을 고용하는 관계 맺음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합니다. 기계에 종속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계가 물건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관리 감독하는 것입니다. 편리한 것 같지만, 이러한 일에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실험할 가능성이 차단됩니다. 즉, ‘나’를 세상에 ‘열어놓는’ 작업이 원천적으로 봉쇄됩니다. 인간은 이런 고립된 관계에서 무기력해집니다.

지금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고용될 것인가’가 더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그만큼 내가 세계에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를 묻는 것보다 많은 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가져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때 ‘돈이 없기 때문에 슬픔을 겪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언제까지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너무 무력하다고 느꼈던 것은 슬픔을 지금 내가 처한 관계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계기로 삼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이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나의 개체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언제, 어떤 관계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인식하는 과정이 철학이 전개되는 과정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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