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탁S 3학기 6주차 후기

작성자
진성
작성일
2020-09-05 22:54
조회
86
지난 주에는 맹자의 천명 사상과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해 단축 수업과 함께 화상 강의도 처음으로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1.

천명(天命)은 신과 인간의 본성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시현됩니다. 이러한 일치 속에서 삶이 펼쳐진다면 공자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규범에 어긋남이 없는(從心所慾不踰矩)’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맹자에서 선(善)은 인의예지를 통해 달성되는 것인데, 이것도 자기 내면의 충실함과 타자와의 공감이 형성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만물과의 일체성 속에서 본성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도정치의 기본입니다. 천리에 따라 산다는 것은 천명을 아는 것이고, 곧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진정한 선(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완전한 앎(이성적 이해)이 있다면 두려움이나 미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이 내린 벼슬을 하는 자(天爵)는 본성의 선함(性善), 곧 내재되어 있는 자연 본성을 이해하는 자입니다.

순임금은 자신에게 여러 악행을 저질렀던 이복동생을 끝까지 포용합니다. 순임금의 행동이 언뜻 이해 안 되기도 하지만, 악은 악으로는 교정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긍이 됩니다. 선을 통해서만이 순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기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선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후 이를 타인 또는 외부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비심 앞에서는 우리 마음속의 방어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악은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다양한 정념들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이를 이성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이 곧 지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전에는 권력의 근거가 천명이라고 했는데, 이의 성립 조건은 왕이 아니라 바로 민심입니다.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 즉 항산(恒産)을 통한 항심(恒心)으로 공동체가 잘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곧 천명을 아는 왕도정치입니다. 이럴 경우 마음으로 복종하는 상태 (心服)나 억압이 필요 없는 무위지치의 정치가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살 만하다고 느끼는 사회는 곧 각자의 코나투스(존재 역량)를 발현하는 사회와 다름 아닙니다.

2.

수동적인 정념들을 종교(기독교)에서는 억눌러야 할 것, 악으로 규정합니다. 이를 갖고 있는 인간은 결여의 존재이며, 따라서 금욕적인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도록 강제하곤 합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감각(반응)을 통해 외부와 접속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수동적인 정념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좋음(善)이란 인간 본성의 모형에 우리를 좀더 가깝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에티카 4부 서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과의 근접 여부에 따라 더 완전하거나 더 불완전한 존재일 뿐입니다. 양태적 존재로서 신체가 변용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수동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억제나 결여 기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는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반응은 수동적인 것이지만 외부(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출발점도 됩니다.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기 역량을 실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야 힘들의 차이를 느낄 수 있고, 슬픔의 정서에서 기쁨의 정서로 이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비우호적인 순간들과 수 없이 마주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동적 정념들(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촉발해 다른 행동 방식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줍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능동성 속에서 번뇌는 오히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항상 우호적이기만 한 삶은 언뜻 좋아 보이지만 우리를 무기력함으로 이끌어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을 차단합니다. 흔히 우리는 일과 고용을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고용 자체는 단지 교환 조건 하에서 자신을 협소화하고 수동적으로 만들 뿐입니다. 반면에 진정한 의미의 일은 자신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며, 할 수 있음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행위입니다. 능동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 역량(코나투스)도 강화됩니다.

진정한 덕은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무능력은 사람이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의해 인도되는 것(에티카 4부 정리37 주석1)입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 있으면 결여를 느낄 수 밖에 없고 수동적이며 무능력한 존재가 됩니다. 반면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신의 본성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면, 자기 역량이 강화되면서 능동적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의 결과는 시대의 조건 등 무수한 인과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운(Fortunae) 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스피노자는 운의 양면적인 모습에 대하여 똑같은 정신으로 기대하고 견뎌낼 것(에티카 2부 정리49 주석)을 주문합니다. 신의 본성과 일치시키는 방식이라면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와 형편에 맞춰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 곧 천명을 이루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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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7 11:03
    악은 선을 통해서만 교화할 수 있다는 얘기는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순임금처럼 타인의 악을 교정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가능한지도 궁금하고요. 상을 교화시키는 과정에서 순임금도 어떤 변용이 일어났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일지 고민해야겠어요. 풀어야 할 게 정말 많군요. 운에 맡기지 않는 삶은 정~말 부단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 같아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