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9월 16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9-11 17:10
조회
104
채운쌤은 이번 학기 에세이 주제를 미리 말씀해주셨는데요. 스피노자의 정치학 개념으로 맹자의 왕도정치를 해석하는 것 입니다. 스피노자 덕분에 맹자도 재밌게 읽고, 맹자 덕분에 스피노자를 되새길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데요. 일단 지레 겁부터 먹게 되네요. ㅋㅋ;; 이번에도 평소대로 끙끙거리면서 재밌게(?) 준비해봐요!

다음 주 공지입니다~ 《맹자》 〈진심 상·〉와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15~17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맹자의 성인과 스피노자의 현자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현자를 단순히 ‘깨어있는 사람’으로만 정리하지 않고 ‘현자들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맹자의 성인도 모두가 요순의 도를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즉, 통치를 당위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나죠. 그리고 둘 다 자신의 인격적 수양과 타자에 대한 통치가 분리되지 않는데요. 이 둘을 잘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쉽지 않을 것 같네요. 특히 최근에 합류하신 진성쌤과 명순쌤에게는 더 쉽지 않겠네요. 두 분은 성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태도를 정리해오시면 될 것 같아요. 후기는 영님쌤, 간식은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맹자의 성선(性善)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할지는 참 어렵습니다. 토론하면서는 스피노자가 4부 서문에 썼던 ‘본성에 부합하며 살기 위한 모델’과 비슷하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연결고리들을 얘기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해석의 길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확실한 건, 맹자는 본성에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할 어떤 것이 미리 있다고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선(善)은 악(惡)과 반대된 도덕적 성향이 아니라 우주의 운동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쓰였습니다. 가령, 《주역》 〈계사전 상〉 5장에서는 “그것을 끊이지 않도록 이어가는 것은 선(善)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성(性)이다(繼之者善 成之者性).”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명사 지(之)는 주로 우주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데요. ‘선’은 우주의 운동이 끊이지 않도록 이어가는 운동성에 관한 글자고, ‘성’은 끊이지 않는 우주의 운동으로 인해 형성된 실재성에 관한 글자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선’은 우주의 운동에 부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실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역하면, ‘본성은 그레이트하다’가 될까요? ㅎ

맹자의 이러한 성선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좀 더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본질’에서도 다르다고 봤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본질이 있고 그에 상응하게 실재하게 된다고 생각했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실존할 때 그에 상응하는 본질도 구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맹자의 본성도 씨앗이라기보다 구성적인 것(成)으로 봐야 합니다. 채운쌤은 맹자의 성선설을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처한 조건 속에서 자유를 구성할 역량이 내재되어있다’는 것으로 풀어주셨죠. 그런데 이 내재됨을 구성적인 것, 개체가 실존하는 만큼 이미 발휘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요? 마트롱은 3종의 직관적 인식이 1종의 상상적 인식에 씨앗의 형태로 내재해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어느 정도 우리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는 데 적합한 형태로 세상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이죠. 맹자의 ‘성선’도 모든 인간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이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3종의 직관적 인식이 1종의 상상적 인식에 잠재한다고 해도 정념적 예속을 지복(至福)이라 하지 않듯이, 소인의 마음씀도 그 자체로 ‘인의예지’의 실천으로 볼 수는 없겠죠.

채운쌤은 〈고자 상〉 6장의 “내약기정 즉가이위선의 내소위선야(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구절을 가지고 ‘성선’의 실정적 측면을 강조하셨습니다. 보통 이 구절에서 기정(其情)을 ‘타고난 마음’으로 해석하는데요. 정(情)은 이미 발현된 실정, 구체적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체적 상황과 같이 했다면, 선(善)이라 할 수 있으니 이른바 '선'이라 할 수 있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니까 ‘선과’ ‘불선’의 문제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자유롭게 만드느냐 아니냐 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더 강하게 다가오네요. 맹자의 ‘성선’을 더 윤리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구절들에 대해서도 좀 더 세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스피노자와 함께 읽으면서 전보다 동양 텍스트를 더 급진적으로 읽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번역하는 과정이 있지 않으면 여전히 고루하게 읽을 수밖에 없군요.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전체 2

  • 2020-09-11 18:07
    "내약기정 즉가이위선의" 뒤에 "그것을 선이라 한다"를 붙여야지. 정은 '정황'이고. 그러니까 선은 '구체적 상황(기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이 아니라. '기정'의 뜻이 타고난 역량이 발휘된 거라고 보면 이상하지. 구절 하나를 빼먹으니 비약이 생기는 것.

    • 2020-09-11 19:14
      이런이런.. 수정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