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7후기

작성자
동글
작성일
2020-09-14 15:27
조회
78
  1. 성인과 본성


 

이번 시간엔 『맹자』 <고자>장을 공부했다. 이 장은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는 장이다. 맹자는 인간 본성의 모델로 성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스피노자의 현자와 비슷한 존재다. 성인과 현자는 모두 영웅적 상과는 다르다. 성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스피노자가 말한 현자와는 어떻게 연관시켜 볼 수 있을까? 정치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동양에서는 성인의 전형으로 공자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자는 실제로 정치를 한 사람은 아니다. 공자는 직접 정치를 한 것도 아닌데 정치인처럼 의미화 되는 경향이 있다. 공자가 정치를 안 했어도, 평상복을 입고 다녔어도, 거의 왕과 다름없이 여겨져 소왕(素王)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니까 관복을 입지 않은 왕, 이런 의미이다. 그럴 때 정치에 있어서 공자의 위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공자가 왕에게 등용이 되건 안 되건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행사한다. 어떤 그런 존재들. 군자 혹은 성인. 그것이 동양의 정치에서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유가의 존재론적 근거는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중용은 성선에 관한 문제를 이끌어내기 좋은 텍스트이다. 우리는 선이나 성에 대해서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의 틀이 있다. 예를 들면 서양에는 현대의 과학자들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본성은 백지장 같은 것이다. 빈서판이라고 비유를 한다. 본성은 빈서판 같아서 후천적으로 살아가면서 채워 넣는다는 관점 하나, 또 하나는 본성은 양피지 같다고 보는 것이다. 본성 자체에 진화의 흔적이 남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입력된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양피지는 후천적인 것과 연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에서 성은 생이다. 이 본성이 인간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광의적인 생명력을 의미한다. 모두가 내재하고 있는 어떤 잠재성 혹은 근원적 생명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을 코나투스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스피노자에게 코나투스란, 생명이 자기의 생명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기본적인 힘이다. 만약에 그런 힘을 생명이 가지고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은 낳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살려고 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性을 코나투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샘은 말씀하셨다. 그럼 생명이 선하다고 하는 맹자 논지에서 선함은 생명의 근원적을 내재한 위대한 것이 된다. 위대함이란 도덕적 가치 판단은 없는, 생명력의 끝임없는 계승, 운동성에 있다. 결국 善은 본성의 계승을 말한다.

그래서 善한 마음을 가진 仁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내재하고 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은 생명 전체와 내가 연결되어 있음에서 나오는 근원적 마음이다. 의와 예도 구체적 관계성 안에서 내가 그걸 이해하는 만큼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맹자가 말하는 성선은 인의예지다. 인간에게 인의예지가 있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자유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이다.

수동은 기본적으로 겪음이다. 겪는다는 것만으로도 마주침은 일어난다. 그런데 수동은 정념을 동반하기에 이 정서적인 변용을 어떤 방식으로 능동화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능동화는 결국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다. 내가 겪은 사건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그래서 수동이 문제가 아니라 수동을 능동화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사건을 능동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적합한 원인에 의해 일어난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적합한 원인에 의해’는 내가 그 원인에 이미 참여하면서 어떤 것을 겪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합한 원인에 의해서 사물이나 사건이 일어나는 실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능동적이 된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기쁨이라든가 슬픔이라는 수동적 정서로부터해방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능동성의 발휘를 시중(時中)으로 말해 볼 수 있다. 시중은 때를 읽는 능력(權道)으로 때를 읽을 줄 모르면 聖人일 수가 없다. 보통의 중생은 우주의 이치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이치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번 변용된 방식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정황을 잊어버린다. 時中은 그때그때 조건 속에 투철하다. 자신이 그 조건과 하나가 된다. 때, 형세, 조건 이런 걸 읽을 수 있음이 권이다. 善을 행하는 것은 모든 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그 정황에 맞아야 한다. 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내약기정 즉가이위선)의 정황에 맞는 한에서 내가 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선이다. 맹자는 성선, 선악의 문제를 그 모든 상황과 무관한 초월적 원리로 얘기하지 않고, 굉장히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다.

 

2.앎과 신체

인간의 정신은 신체의 변용을 발생의 원인으로 해서 관념들이 생겨난다. 인간의 정신의 특징은 관념이 관념 자체를 생산해낸다. 인간의 정신은 관념의 자동장치가 있다, 이것 때문에 몇 가지의 관념이 형성되면 그것을 연결해가지고 어마어마한 관념의 덩어리를 형성한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역량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번뇌가 그래서 만들어진다. 번뇌가 만들어져 아주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신체변용 대로만 관념이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이것이 즉각적으로 일치하지 않다. 신체와 정신에 이 평행은 일종의 비대칭적 평행이 된다. 우리에게 잉여적인 관념이 형성 된다. 그런 잉여적인 관념에 의해서 동시에 우리의 신체가 무얼 욕망하기도 하고 무얼 욕망하지 않게도 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는 게 그냥 관념을 형성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킨다. 관념이 욕망을 생기게 하고, 그런 식의 욕망 자체가 우리의 신체에 어떤 행위를 또 추동한다. 그럼 그런 식으로 신체적인 마주침이나 변용이 우리에게 관념을 형성한다.

신체성은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은 형태가 없어서 기체적이고 자유롭다. 신체성이 앎을 구성해내는 동시에 우리가 앎을 구성해내는 이 작용 자체가 우리의 신체성을 지속하게도 하고 한다. 인간의 번뇌는 생각의 잉여인데, 번뇌는 우리를 힘들게도 하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를 단련할 수 있다. 자기를 훈련시킨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바로 잡으려는 욕망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신체성은 앎을 형성하는 내용이다. 실천에 앞서 앎이 있지 않다. 각자 다른 신체성이 각자 다른 앎을 구성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

신체와 정신이 합일을 이룬 인간은 자기에 대한 믿음, 자기에 대한 긍정이 있다.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부처님은 중생의 슬픔과 번뇌를 한 방울도 닦아줄 수가 없다. 그건 자기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이 하는 거다. 나의 신체를 단련하는 것과 자신의 앎을 구성하는 힘을 동시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 그러려면 우리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유학에서는 정치를 ‘양’자로 많이 쓴다. 길러낸다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신체, 먹이는 차원 즉 물질적인 것이고 두 번째가 정신적인 교화, ‘기르다’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함축한다. 그래서 올바르게 길러지기만 하면 자라지 않는 물건이 없다.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 조건만 어느 정도 갖춰주면 다 자랄 수 있다. 기른다는 것은 나의 몸과 정신을 함께 기르는 문제이고, 인한 정치 역시 몸과 마음을 제대로 함양하는 가운데 이루어짐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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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4 16:43
    정치적 지도자로 어떤 유형이 뽑히는지도 시대적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의 정치적 인물은 대체로 '스타'인데, 맹자나 스피노자가 생각한 정치적 인물은 '철학하는 사람'이죠. 맹자와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주로 통치자들에게 이런 유형의 정치인이 되라고 요구했다면, 지금은 우리 스스로 어떤 유형의 정치인을 뽑을 것인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태어나 맹자와 스피노자 같은 텍스트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전에는 대중지성이란 단어가 밍밍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맹자, 스피노자에서 적극적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