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9월 23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9-19 16:40
조회
92
어느새 에세이가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 주에는 스피노자의 어떤 개념과 연관해서 맹자의 왕도정치를 해석하실지 대략의 개요를 써오시면 됩니다. 대략이라고 했지만 자세할수록 좋겠죠?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를 정리할 예정입니다. 각자 간략하게 어떻게 읽었는지 정리해서 토론시간에 공유해보죠. 정수쌤이 불참하시는 만큼 좀 더 빡시게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간식은 진성쌤, 후기는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지난번 성선(性善)을 해석하는 것만큼 성인을 해석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정치를 논할 때 왜 성선이나 성인 같은 것을 얘기하는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토론하면서는 우리 자신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표가 되는 모델로서 성인이 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성인이란 자기 기질을 극복했으나, 기질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소질을 발명한 사람입니다. 맹자는 백이, 유하혜, 이윤보다 공자를 높게 평가하긴 했지만, 그들을 폄하하지는 않았습니다. 백이, 유하혜, 이윤도 나름대로 자기 조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법을 배운 자들입니다. 맹자에 따르면, 실제로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바뀌기도 합니다. 처음에 저는 이런 얘기들을 동양 정치의 공허한 유토피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맹자를 가지고 글을 쓰면서도 다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한 것은 어쩌면 정치를 이해하는 전제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성인의 존재를 정치에서의 영성으로 풀어주셨죠. 저희에게 정치는 합리의 영역, 영성은 종교적인 것, 믿음의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정치에서 사람들의 미신을 지적했듯이, 합리와 믿음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을 알아도 그와 상반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몸이 형성한 앎이 여전히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인식하는 대로 무엇을 믿고, 믿음의 체계는 세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식이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더 좋은 것을 찾아서 인식하기만 해서는 더 좋은 것을 알면서도 나쁜 것을 행하고야마는 모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트롱이 이성이 정념과 합치되지 않으면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도 우리의 느낌 자체, 실존하는 방식을 문제 삼지 않으면, 정치는 공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치에서 영성을 고민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문제제기입니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앎,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믿음의 체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지를 문제 삼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나와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말은 쉽지만, 사실 이건 매우 고된 작업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우리 자신의 실존을 고민하는 것은 무엇에 대해 두려워하고 희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신체를 고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채운쌤은 강의 중에 어느 브라질 신부의 얘기를 들려주셨는데요. 그는 ‘개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성인이라 불리지만,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의 소유를 나누자고 하면 공산주의자라고 불린다’는 내용의 얘기를 했습니다. 브라질 신부의 정치적 주장이 사람들에게 반발을 산 것은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두려움은 ‘가난’에 있습니다. 가난은 단순히 물질의 적음만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연민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나눠주는 사람은 많지만, 근본적으로 더 소유할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당장 가진 것 없는 저만 해도 자유롭게 구매하는 이 환경을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돈이 없어도 나중에는 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면 자본주의는 모두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줌으로써 소유 불가능한 자신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심는 것 같습니다.

검색해보니까 에우데르 카미라(Dom Hélder Pessoa Câmara, 1909~1999)라고 하더군요. 환하게 미소 짓는 분이시더라고요.

성선과 같은 잠재력, 성인과 같은 존재는 우리가 다른 기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정치적 개념들입니다. 맹자와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만 있다고 말합니다. 돌이켜보면, 일상적으로도 우리는 다른 기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당장 저희가 만나서 함께 토론하며 공부하는 것만 해도 그렇죠. 꼭 물질적인 것들을 주고받지 않아도 함께 공부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거든요. 그리고 이번에 들뢰즈를 읽으면서 매우 소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은 우리가 다른 존재로 이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들이 단번에 우리의 실존을 다르게 구성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떤 물체든 덜 완전한 본질의 물체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습니다.(들뢰즈, 293) 단번에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아도 가능한 정치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 1

  • 2020-09-21 17:08
    채운샘께서 영성의 회복을 현대 정치의 과제로 제시하셨을 처음부터저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맹자와 스피노자의 말씀에서 영성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영성의 어떠한 작용이 우리로 하여금 정치를 다르게 사유하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마치 맹자와 스피노자와 함께 오묘하고 신비한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