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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후기 및 공지 : <자본주의 역사강의> (3, 4, 5강)

작성자
머터리
작성일
2019-03-22 21:03
조회
134
<자본주의 역사 강의>의 부제는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자본주의의 기원과 미래'입니다. 근데 왜 체제(regime)를 분석하지 않고, 체계(system)를 분석할까요. "세계체계 분석의 기본 관점은 사회주의라는 것 자체가 독립된 체계로 설립되기 어렵고,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사회주의를 흡입하는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고 주장합니다."(p.28) 즉, 한때 소련과 동구권을 비롯한 여러나라들이 사회주의라는 '체제'를 표방했지만, 사회주의의 표상은 언제나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만 설정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흡입하는 힘이 강하다고 표현하는 구절 역시 재밌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 '체제'에는 온전히 자본주의 것이라고 할만한 그 어떤 것으로만 채색되지 않습니다.

지난 후기에서 "체제라고 하면 단일적으로 본 것인데 비하여, 체계는 다양한 것의 연관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더욱 폭넓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순화 선생님께서 이해한 맥락은 세계체계 분석이 갖는 의의와 닿아있습니다. 세계체계 분석으로 자본주의를 보는 것,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를 달리 설정하는 것,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는 데 있습니다"(p.44)  이번 시간까지 읽어온 <자본주의 역사 강의>는 자본주의를 문제삼는 질문을 역사적으로 새롭게 제기하기 위한 학자들의 사유를 찬찬히 짚어보는 과정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페르낭 브로델과 칼 폴라니에 이어, 이번에는 주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지오반니 아리기의 견해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세계체계 분석의 기획과 구도를 다뤘던 3장은 월러스틴의 견해가 갖는 남다른 의미를 살피기 위한 예열의 과정처럼 보입니다.

세계체계 분석의 기획과 구도


"기존의 전제들을 완전히 뒤집어서 다시 생각하는 사고방식"(p.130)을 요하는 세계체계 분석이 맞서는 사고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근대화론 혹은 자유주의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둘은 샴쌍둥이처럼 붙어다니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를 종용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우리가 얼마나 서구와 닮아가는지, 많은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도시가 이곳저곳에 세워졌는지로 '근대'를 진단하고, 이를 발전 혹은 '진보'의 이정표로 진단합니다. 이런 판단 과정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체계 분석은 이러한 선입견에 맞섭니다.  또한 유럽중심주의에도 반기를 듭니다. 어쩌면 이것은 세계체계 분석이 맞서는 첫 번째 표적과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근대'와 '진보'의 이정표를 견인했던 집단을 서구라고 간주할 때, 결국 서구인들의 문명적, 기술적 우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근대 자본주의가 서구로부터 태동되었다고 할 때, 이는 서구합리성의 승리, 유럽 예외주의와 함께 드러나는 유럽 중심주의, 마침내 서구에서 근대가 도래한 이유는 조건상 그럴 수밖에 없더라는 '역사적 필연'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이에 세계체계 분석은 시큰둥히 답합니다. "음, 그건 일종의 (역사적) 우연(!)이었어". '역사에 예견된 필연은 없다'는 취지에서 목적론을 거부하고 구조의 관점을 도입합니다. 근대화 과정에 이러이러한 요소들이 필요하고, 앞서 제시한 기준에 못 미치면 근대가 아니다! -라는 식의 시대 규정도 단호히 거부합니다. 요소론적 접근에서 주목되었던 서구적인 모던과 더불어 비서구적인 것, 이를테면 전통과 비근대 또는 제3세계로 불렸던 것들이 우글거리는 상태를 아우릅니다.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길로 수렴되지 않는 것들의 공존은 근대를 '중심'과 '주변'이 시끌벅적하게 관계하는 장으로 보게합니다. 이것이 세계체계 분석이 근대를 '관계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심과 주변을 구분짓고 있을까요? 적어도 국가간의 체계에서 그것은 발전의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속이론은 세계체계 분석을 구성하는 이론적 계기의 하나를 이룹니다.

토론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중심과 주변의 구도를 설정한다는 것은 결국 발전의 정도에 따라 국가간의 위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긴 것이죠. 중심과 주변의 구조 설정이 종속이론에 빚지고 있음을 알 때, 앞선 질문은 종속이론 내의 요소론적 접근을 토대로 세계체계 분석의 본질을 다소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속이론을 요소론적으로 접근할 때, '중심이 주변을 착취하기 때문에 한 쪽은 발전되고 한 쪽은 저발전된 것이다 -> 따라서 주변이 중심처럼 발전하기 위해서는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발전을 해야한다!'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체계 분석이 종속이론에서 취한 핵심은 "중심부의 발전은 주변부의 발전과 바로 맞물려 있으며, 주변부의 저발전이 없으면 중심부의 발전이 없고, 중심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변부를 저발전시킬 수밖에 없다"(p.146)는 관계론적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국가가 아닌, 그들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가 문제시 됩니다. 경제적 분업구조에도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의 차이는 있습니다. 중심적인 것은 고부가가치 또는 상대적으로 더 독점되어 있는 것을 지칭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주변부, 심지어 그 둘이 섞인 반(半)주변부도 있습니다. "중심과 주변이 맞물려서 서로 수렴되지 않는 상이한 근대의 상(相)"(p.148)은 세계체계 분석이 그리는 총체적 그림입니다. 근시안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시야는 폭넓게, 한편으로는 현미경이 들여다본 세계의 모습처럼 다양한 개체들이 꿈틀대면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처럼 말이죠.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분석


3장의 구체화된 설명은 4장에서 이어집니다. 월러스틴의 요지는 근대세계체계는 곧 자본주의 세계경제이고, 이는 중심과 주변 사이의 '기축적 분업 원리'(*하나의 축에 의해 나눠진 분업, 여기서 축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축, p.184 참고)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심과 주변을 가로짓는 기준(축)은 뭘까요? 무엇을 얼마나 '독점'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고부가가치, 고이윤으로 대표되는 선도산업을 독점하는 중심지역은 자유경쟁에 노출된 주변지역과 구별됩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독점(혹은 준독점)은 국가에 의해 지탱되고, 따라서 국가체계에도 중심과 주변, 편의상 말해보면 '강한 국가'와 '약한 국가'가 있습니다. 강한 국가는 독점을 향한 경쟁에서 우위에 있고, 자국의 논리를 타국에 강요할 수 있습니다. (p.250) 덧붙이자면, 강한 국가도 약한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중심과 주변의 분할은 다수 제도들의 집합(시장, 경쟁하는 기업들, 다수 국가, 가계, 계급, 신분집단)으로서 세계경제를 보게 합니다.

특히 '가계'household에 관해 설명한 부분이 흥미롭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중심과 주변 구도가 확인됩니다. 예컨대, 누군가 한 명만 임금소득을 받고 나머지 구성원은 다양한 비임금소득에 의존하거나, 임시적 고용 형태의 일자리를 얻으면서 소득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겠지요. (p.196) 중심과 주변의 관계론적 구도에서는 자본주의의 전개가 반드시 임금에 관련된 부분에만 한정될 수 없다는 논지가 적용됩니다. 즉,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ex.가사노동)이 노동자 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문제까지 고려해야된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이반 일리치가 문제를 제기했던 '그림자 노동'이 생각났다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가사노동이나 직장 통근의 경우, 현대 산업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임금노동 현상에 가려져서 제대로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노동, 이른바 '그림자 노동'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앞선 것에 임금이 부여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반 일리치의 견해는 더 나아갑니다. 오히려 사람의 노동이 임금이나 보수에 얽매이는 세태, 노동 자체가 상품처럼 조명되는 경향 자체를 비판한 것입니다.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을 언젠가 읽어봐야겠습니다..!) 그 밖에도 근대세계체계를 관통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저항 요소들(ex.반체계운동)을 포섭해들이면서 위협을 거두는 것이 지난 번에 읽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그것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 더 잘 굴러갈 수 있다”(<자본주의 리얼리즘>, p.31)는 피셔의 통찰은 날카롭습니다.

지오반니 아리기: 세계체계와 세계헤게모니

5장에서 아리기는 월러스틴의 논의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여, 월러스틴이 주장했던 세계체계론을 한층 보완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먼저 자본주의의 기원에 관해서 월러스틴은 16세기 무렵을 주시하는데, 아라기가 보기에 이것은 자본주의가 농업 내부의 분화에서 발생한다는 견해('농업자본주의론')를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아리기는 '상업자본주의론'을 바탕으로, 세계헤게모니 순환의 출발점을 15세기-16세기 무렵으로 파악합니다.) 또한 월러스틴은 영주제가 붕괴한 이후에 영주들이 이전의 방식으로 지배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망했기에) 대자본가로 변신해 자본주의의 도래를 촉진했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절망변신론'이 갖는 난점은 자본주의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목적론적 설명을 도입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p.239)

아리기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제노바 순환(15세기-16세기 초)을 거쳐, 네덜란드 패권기(16세기 말-18세기), 영국 패권기(18세기 후-20세기 초), 미국 패권기(19세기 말-현재)를 거치면서 순환해왔는데, 각각의 시기는 패권(헤게모니)을 가진 국가가 주도하는 독특한 축적체계('체계적 축적순환')를 갖습니다. 체계적 축적순환은 하나의 세계헤게모니를 지속시키는 경제적인 토대가 되며, 국가간체계와 결합합니다. 이때 모순이 발생하는데, 본래 주어진 국경을 넘어 외부로 팽창하려는 힘을 가진 자본주의와, 내부적으로 힘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영토주의의 결합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국적으로 자본주의적 논리는 외려 국가간체계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리기의 독특한 견해입니다.

체계적 축적순환의 상승국면과 하강국면을 실물적 팽창과 금융적 팽창으로 구분하면서 설명을 이어가는 아라기의 견해가 굉장히 구체적으로 (또한 어렵게 ^^;) 느껴집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윤율 하락과 시스템 유지 비용의 증대로 위기를 맞고, 한 체계는 새로운 국가-기업 복합체가 주도하는 경쟁력 있는 다른 축적체계로 대체된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성장의 끝없는 욕망은 이윤추구보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비용이 커지는 상황의 도래, 배보다 배꼽이 커진 상황을 야기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든 세계적 축적체계가 최종적 붕괴를 맞기 전 금융부문이 팽창하면서 일시적인 호황(벨 에포크, belle époque)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음, 기존 헤게모니 질서에 카오스가 엄습하게 됩니다. 혼돈은 이전까지의 질서에서 통용된 생산구도를 더 이상 소용없게 만듭니다. 마치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거칠게 내뿜는 마지막 생기처럼, 자본주의적 세계체계가 갖는 주기에 내재된 유한함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마무리 & 공지

월러스틴과 아리기처럼 자본주의 현상을 역사적으로 조망하려는 노력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과 확장, 종말이라는 생애주기를 갖고 있다는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수백년 동안 지속되어온 세계체계이자 저항과 반대의 운동까지도 포섭하는 무서운 근대자본주의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좀처럼 실감나지 않지만, 실감에 한층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계속 읽어봐야겠습니다. 다음 시간 발제는 진우님(6강), 민호님(7강), 건화님(8강)을 포함해서 제가 9강을 맡았습니다. 간식은 은섭 선생님이 준비해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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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25 14:27
    체계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잘 되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