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4주차 후기 및 공지 : <자본주의 역사 강의> (6, 7, 8, 9강)

작성자
머터리
작성일
2019-03-30 15:04
조회
138
山 넘어 山! '강의'가 후반에 다다를수록 진땀이 났습니다. 친절하게 경어체를 쓰면서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는 저자님의 바람과 다르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 알쏭달쏭한 경제학적 개념들이 이리저리 난립하다보면 어느덧 흐름을 놓치기 일쑤였답니다. (혹자는 '이거 완전 독자에게 멕이는(?) 말투가 아니냐'라고 탄식했다는 후문..) 뭐, 푸념은 여기까지. 어려워도 각자 이해한만큼 읽고 얘기나눴습니다.

패권의 순환 : 영국에서 미국으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 아리기는 근대세계체계는 지금까지 총 네 번의 순환을 거쳤다고 설명합니다. 이 중, 비교적 최근 상황에 가까운 영국과 미국의 헤게모니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전에 우리는 월러스틴의 '뒤집기 작업'이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우리의 통념에 뿌리내린 다양한 '혁명 신화'를 깨부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먼저 오랫동안 근대정치의 기본 모델을 이뤘던 시민계급의 등장, 즉 '부르주아혁명론'입니다. 월러스틴은 귀족이 부르주아지와 대립적인 계급이었다는 것과 사회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분화되어왔다는 입장을 비판합니다. 사회적인 분화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주입하고, 귀족계급에 대한 단절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는 근대적 관념은 결국 신화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르주아혁명 신화의 모델로 회자되어온 '프랑스혁명' 또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30~40년 간의 긴 시간대 상에서 프랑스혁명이 제도적으로 근본적인 단절을 야기했다고 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의 신화도 영국 헤게모니의 기원적 설명에 사후적으로 종속될 뿐, 실제적으로는 다수의 산업혁명들이 유럽사회에 있었기에 비판 받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생을 정세적인 틀에서 바라보는 월러스틴에게 자본주의의 출현이 과연 '진보'였는가 역시 의문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죠. (자세한 함의를 짚어보실 분은 pp.164-175 쪽을 읽어보세요) 월러스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아리기에게 영국 헤게모니의 발생은 산업혁명으로 규정된 '산업자본주의'에 갇히지 않습니다. '상업제국주의'와 '영토제국주의'로 규정되는 편이 적절한 것입니다. 당시 영국의 내세운 군사력(해군)과 자유주의 무역질서에 기반한 세계무역망, 세계를 통합한 금본위제 등이 영국 헤게모니의 근간을 이룹니다.

패권의 바통은 미국이 이어받습니다. 미국 헤게모니는 법인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모델을 형성하는데, 냉전-브레턴우즈 체제-군사력의 우위를 통해 확대됩니다. 이때 브레턴우즈 체제는 금과 달러를 연계한 본위제(*일국의 화폐제도의 근간이 되는 기초적인 화폐를 본위화폐라고 하며, 이 본위화폐의 가치를 정하는 법률 제도 또는 경제적 질서를 '본위제도'라고 합니다. 금본위제는 화폐 단위의 가치와 금의 일정 가치가 등가관계를 맺는 본위제도입니다.)로써, 이 체제가 유지되려면 미국 경제가 안정적이고 달러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미국 경제의 하락세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에 이어서 금융화를 유행시킵니다. 금융은 경제주체 사이, 즉 자금의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에 돈이 금융상품-예금, 보험, 주식, 채권-을 매개로 거래되는 것을 뜻합니다. 금융화를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증권화와 자산유동화을 포함하면서 금융업의 사고방식이 기업과 경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마찬가지로 본문에 금융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애를 먹었습니다. 자금의 유동이 특징인 금융경제는 실물재화와 서비스, 돈이 직접적으로 유통되는 실물경제와 구별됩니다. 7강의 발제를 맡은 민호쌤은 직관적으로 '돈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금융적 팽창 하에서는 세계적인 포섭과 배제에도 변화가 관찰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국가간체계의 균열 조짐들은 미국 주도하의 세계체계에서 포섭될 수 없는 부분의 증가와 성장 지역과 배제된 지역의 분화를 촉진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사회양극화나 사회적 불안정성이 증가합니다.

'동아시아 체계'에 주목하라!

백승욱씨는 아리기의 견해를 토대로 미국의 위기적 상황을 장기적 헤게모니 교체의 관점에서 전망합니다. 금융화 시대로 대표되는 기존 축적체제가 저물고 새로운 생산의 중심이 등장하는 지역으로 동아시아(중국~일본의 영향권)를 지목합니다. 현재의 금융화 시대에 제조업 생산이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곳이 바로 동아시아밖에 없다는 것이죠. 물론 월러스틴이 분석한 '16세기 이후 근대자본주의 세계체계'라는 틀로는 동아시아의 특수성이 온전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에 아리기는 '동아시아 장기지속론'을 통해 미국 헤게모니를 잇는 동아시아 세계 체계의 부상을 이해합니다. 동아시아의 장기지속이 시작된 500년의 시간대에는 서로 다른 시간의 구분선이 작동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일본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와 조공을 매개로 주요 물자들의 교역이 이뤄지던 '조공 네트워크'가 하나고, 그 다음은 동아시아 전체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시간대이자 일본(서구적 자본주의로 편입)과 중국(제국 이후 민족국가로 변환)이라는 두 개의 축이 형성되는 시간대이며, 마지막으로 냉전체제 후 일본이 다시 부흥하고, 이와 함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이 등장하는 시간대가 그렇습니다. '미국-일본의 축'과 '미국-중국의 축'이 동아시아의 지정학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이고, 한반도 변수가 두 축 사이에 중요한 변수로써 작동할 잠재력을 지닌다는 분석에도 주목하게 됩니다. 8장 발제를 맡았던 건화쌤은 평소에 '유교 문화권'이나 '한자 문화권'처럼 막연했던 동아시아에 관한 상상적 인식이 일본 또는 중국을 중심으로한 경제적 네트워크, 국제적 분업구조에 의해 장기적으로 통합되어있다는 분석이 흥미로웠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8장은 특히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국제정세적 동향 분석이 주된 장이었습니다. 한때 강한 패권을 유지한 미국과 오늘날 중국 간의 대립각(티벳문제, 인권문제)은 알고보면 얼마나 긴밀한 지정학적 상호작용에 의한 제스쳐인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여러 제국들이 분할되고 해체되었던 아랍 지역과 달리, 자본주의 이후에도 제국의 경계를 유지하여 민족국가로 변모한 중국에 대한 설명(p.409)에서 오행상으로 토(土)의 기운에 들어맞는 나라가 아닌가하는 여담(?)도 나왔습니다. 토는 이질적인 계절의 기운을 종합하는 간절기이자, 다른 오행을 품은 오행이기 때문이죠.

너희가 '운동'을 아느냐?

그렇다면 급변하는 자본주의 세계체계 하에서 노동 문제에 관한 앞으로의 전망도 가능할까요? 반대로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노동이나 노동운동을 생각할 때, 그것은 대체로 어떤 담론에서 머물고 있나요. '단결, 투쟁'이라는 굳건한 구호 아래서 요구되는 노동문제란 결국 '임금(배분)'의 문제와 다를바 없습니다. 9장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스미스적 시장관'에 관한 설명이었습니다. 다음의 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평등하지 않다. 특히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조건은 비대칭적이다. 자본가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고 노동자들은 분산되어 상호 대체 가능한 노동력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분산되어있을 때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고, 노동자들은 조직을 통해 단결해서 자본가들에 대해서 협상력을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란 그런 불평등을 가지고 있다.” (제 1편 8장, '노동의 임금')

놀랍게도 이것은 경제학의 아버지, 자본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건설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합니다. 일찍이 마르크스도 자신이 계급투쟁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었다고 하죠. '노동자와 자본가의 비대칭성', '불균등한 지위', '단결의 불가피한 필요성', '불평등한 구조에 관한 계급투쟁'의 형태는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시장관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사실! 저자는 폴라니를 계기로 삼아서 자본주의 아래 모든 문제를 '분배'의 여부로 보려는 관점의 전회를 기술합니다. 부당한 대우와 몫의 문제로 노동문제를 한정시키지 않고, 노동자라는 '근대적 주체'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를 질문하는 것! (폴라니는 이것을 '탈구'(dislocation) 내지 '사회로부터의 뿌리뽑힘', '질적 단절'로 표현합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운동의 두 가지 정의를 '임금제도 안에서의 운동'과 '임금제도 자체를 철폐하려는 운동'으로 구분한 것도 도움이 되겠지요. 개인적으로 <설국열차>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앞칸의 월포드와 뒷칸의 커티스가 대립하는 가운데, 이것은 마치 지배계급과 대결하는 피지배계급의 구도이자, 역설적으로 이들의 '갈등'이 '열차'라는 '시장'을 끝없이 운행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동력의 주체들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우 투쟁은 갈등일 수는 있어도 적대일 수는 없"다는 충격은 "노동계급 형성의 역사는 곧 해방의 서사라는 유토피아에 기대어 서술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p.475)로 이어집니다. 앞 칸이냐, 뒷 칸이냐의 문제보다 달리는 열차 그 자체를 화두로 삼았던 폴라니의 통찰은 이후 아리기가 이어받습니다.

그럼, 노동운동의 행방은?

아리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저술한 <공산당 선언>을 검토하면서, 노동운동의 관한 두 가지 대립된 테제를 발견합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점점 더 궁핍해지고, 사회는 양극화한다는 것"('궁핍화 테제')이 첫 번째이고,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를 내부로부터 만들어낸다는 것"('사회적 권력테제')이 두 번째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를 양극화하고 궁핍화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발전시키지만, 동시에 그러한 작용이 내부로부터 자멸하게 되는 힘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마르크스가 노동운동에 대해 낙관적 견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부여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지나치게 통일된 집단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리기는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단일한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리기는 역사적 검토를 통해서 노동계급의 사회적 권력이 형성된 곳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조직이 힘이 없었고, 마르크스주의 조직이 형성된 곳에는 노동계급의 사회적 권력이 없었음을 확인합니다. 단적인 예로, 파리꼬뮌(*1871년 3월 28일-5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운동) 이후에 파업이 많았던 영국과 미국에서 노동계급 정당이 부재했고, 오히려 파업이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에서 노동계급 정당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례가 제시된 것이죠.

아리기가 1948년 이후로 현실화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즉 조직노동의 위기에서 가속된 '운동의 위기'를 진단한 것도 '중심과 주변의 문제'와 '국가간체계의 문제'를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에 관한 몇 가지 전망들을 제시합니다. 운동의 진원지가 동아시아로 이동할 가능성, 노동계급을 이루던 표상('관료화된 국가와 기업에 속한 노동자', 중심부의 백인 남성 노동자로 대표됨)의 변화,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이 향후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경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죠.  그리고 노동운동의 역사가 정치적 계기, 특히 전쟁과 맞물려왔다는 진술을 근거로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한때 전쟁은 '벨 에포크' 또는 '경제적 붕괴'를 기점으로 양극화와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노동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되, 민족적 사명을 띤 근대적 주체로 만들어서 이들을 전장에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노동자에게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체성을 기입하지 않습니다. 규모 또한 이전과 달리 대대적으로 벌리지 않는 대신, 주도국의 입장에서 '자동화'된 전쟁은 자국의 인명손실을 최소로 하되, 상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변모하게 되죠. 토론 중, 유발 하라리의 견해도 언급되었습니다. 하라리가 말하길, 오늘날 전쟁은 이전과 달리 대가가 매우 커졌고, 비용이 치솟은 반면에 이익은 작아졌다는 것이죠.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p.526) 하라리의 생각도 '세계체계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 같습니다.

마무리 & 공지

이 책에 관한 마무리 토론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스미스적 시장관에서 폴라니적 통찰로 넘어가는 계기에 관한 의견 나눔이었습니다. 요컨대, 폴라니는 적어도 열차 안에서 사고하기 보다는 열차 밖에서, 혹은 열차의 운행 자체를 멈추게 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저자가 폴라니와 세계체계 분석의 전사(前史)를 말하면서 '모호함'을 한계로 제시한 것은 자본주의를 언제까지나 '경제'의 문제로 한정하면서 서술했던 시도의 한계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를 읽는 내내 헤게모니의 순환에 관여하는 정세적인 분석에 집중하게 되는 반면,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욕망'의 관점에서 분석한 들뢰즈/가타리의 견해는 정세적 구도를 넘어서 가치론적 문제를 이끌어낸다는 것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반체계운동을 포섭하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론의 관점은 지난 후기에서 썼듯, 피셔의 분석-"자본주의는 누군가가 그것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 더 잘 굴러갈 수 있다"-과 함께 일찍이 자본주의의 '탈영토화-(재)영토화'에 관해 고찰했던 들뢰즈와 가타리를 환기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본 책의 3장에서 말했듯, '시장경제의 폭주'와 그로인한 '사회의 자기보호'라는 이중운동이 만들어낸 세 가지의 대응(파시즘, 사회주의, 뉴딜)에 관한 진단들이 폴라니 논지의 요체를 이루고 있다면, 전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와 근대세계체계를 넘어서려는 폴라니적 기획의 극단에 어쩌면 니체가 서 있지 않을까하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경제적 소유와 분배의 문제로 파악하려는 (경제적) 시도는 문제를 양적으로 환원하고, 평준화와 입법화를 통해 해결하려 합니다. 한편 이것은 '문화적인 것'을 더 많은 지식의 양적인 축적으로 이해했던 '교양인'들의 속물근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세계체계론은 자본주의에서의 중심/주변 구도에 나타난 '독점'을 지목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불균등한 힘의 구조가 있되, 그것이 고정되지 않고 순환되며 변이하기 마련임을 관계론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반면, 경제적 대안으로 도그마화된 '평등'은 평준화된 조건의 보장과 이로인해 동질화된 인간형의 등장을 바라거나, 그것을 은밀히 옹호합니다. 경제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해온 관념을 니체의 관점에서 돌이켜본다면 어떤 질문에 이를 수 있을까요?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끝으로 찬란하게 세워진 도시에 유령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마르크스가 아니라 니체적인 유령일 수 있음을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피셔는 니체적인 유령을 "무심한 방관주의가 참여와 개입을 대체"해버린 현 상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냉소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최후의 인간'이 처한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 최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정확히 이러한 (자기) 앎의 과잉 때문에 퇴폐적으로 쇠약해져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pp.19-20) 그럼에도 <자본주의 역사 강의>를 함께 읽고나서 후기를 쓰는 지금은, 이 어려운 공부가 '최후의 인간'이 아닌 '초인'에 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계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같이 읽을 책은 돈 드릴로의 소설, <코스모폴리스>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공지 사항 -

 
  • 공통과제 : <코스모폴리스> 읽고 들었던 질문과 생각을 정리해오기.

  • 간식 : 머터리


    * 개인사정이 생기신 분은 세미나 시작 전에 반장에게 꼭 알려주세요!

전체 3

  • 2019-03-30 19:26
    이전에 읽은 책(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다른 세미나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용, 영화 등등을 버무려주신 후기를 읽고 나니 세미나가 훨씬 풍성했던 것으로 기억이 (좋은 의미로) 조작되는 느낌이네요ㅋㅋ 다음주엔 이런 얘기들을 토론에서 더 많이 들려주세요~

  • 2019-03-30 19:37
    저는 <자본주의 역사강의>라는 책이 전혀 무지했던 자본주의의 역사와 맥락을 담고 있어서 너무 어려우면서도 또 큰 맥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윌러스틴과 아리기의 작업에서는 자본주의를 산업혁명 신화로, 근대를 부르주아시민혁명 신화로 퉁쳐 버리던 기존의 관념들을 깨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노동자'라는 주체가 역사적, 시대적, 환경적, 정치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임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놀라웠는데,
    이는 영국의 시기와 달리 미국 헤게모니에서 노동의 포섭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국가와 '인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많이 달라졌다는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라리의 분석처럼 지금 전쟁이 일어나기 어려운 이유가 '인간'을 동원하는 비용의 문제라는 것과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사회나 국가 속에서 해석되는 방식이 계속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경제학이 아닌 소설이나, 종교적 측면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야기 될 지 기대되네요

  • 2019-03-31 00:24
    후기만 읽기에도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니! ! 후기 속에서 청년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환히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