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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후기 및 공지 : <코스모폴리스> (돈 드릴로)

작성자
노심초사
작성일
2019-04-06 13:39
조회
357
머리를 자르러 간다,는 그 말은 핑계일지 모릅니다. 처음에 저는 그 말의 뜻이 head cut인지 haircut인지 잠시 오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얼마나 중요할까 싶기도 합니다. (*증권가에서 haircut이 증권회사 소유 증권의 평가절하를 의미하는 말로 패커가 투자에 실패할 것임을 전조하고 있다는 어느 연구자의 분석은 그래도 꽤 재밌습니다.)

후기 읽는 분 중에 작품을 접하지 못한 분이 있을까, 서사를 대략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성공한 투자자이자 억만장자인 에릭 패커가 어느 날 문득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에릭이 리무진을 타고 이발소에 가는 중에 일어나는 여러 인물과의 만남이 사건의 골자를 이룹니다. 에릭은 차에서 직원들(기술팀장 샤이너, 통화분석가 마이클 친, 재정주임 제인 맬번..)과 업무를 의논하고, 도중에 건너편 택시에서 만난 부인(엘리스 쉬프린)과 만나 식사를 같이 합니다. 의사(닥터 잉그램)를 불러 검진을 받거나, 외도(큐레이터 디디, 경호원 켄트라 헤이즈)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배경이 되는 뉴욕 시내는 대통령의 방문으로 교통정체가 심각합니다. 시위가 난입하고, 리무진으로 달려드는 이들의 행진을 막는 경호원(토발)은 분주합니다. 그러는 한편, 투자를 잘못한 에릭은 폭등한 엔화로 인해 모든 재산을 탕진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발소에 간 에릭은 머리를 다듬다가 도중에 나옵니다. 그리고 에릭은 베노 레빈과 만납니다. 레빈은 한때 에릭의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둘은 긴 대화를 나눕니다. 에릭은 레빈의 손에 죽습니다.

에릭, 누구냐 넌?

흥미로운 인물은 에릭 패커입니다. 에릭은 레빈이 사는 집으로 직접 찾아가고, 거기서 어쨌든 레빈에게 죽습니다. 에릭은 다가오는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손으로 죽음에 이르는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읽힙니다. 이처럼 에릭 패커는 이번 토론의 쟁점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재산이 탕진된 후에 사후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에릭이 '그동안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잃었어 -> 괴로우니 죽어야겠어'라고 절규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릭처럼 부유한 집안 출신인 아내(엘리스)는 에릭에게 돈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달래지만, 그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그의 태도가 묘합니다. (*에릭은 앨리스 쉬프린의 계좌를 해킹하여 자신의 계좌에 입금시킨다음, 돈을 낭비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감동적이었지만 물론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영혼의 죽음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상속권을 낭비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나름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169)

이러한 에릭의 奇行은 켄트라 헤이즈와 침대에서 관계를 맺은 후에 나눈 대사에서도 발견됩니다. "나를 전기 충격기로 쏴줘. 진심이야. 나한테 쏴봐. 한번 해줘, 켄드라. 나도 느껴보고 싶어. 강한 자극이 필요해. 아직 내가 모르는 것 말이야. 전기 충격을 내 DNA에까지 미치게 해줘. 자, 해줘. 방아쇠를 당겨줘. 자, 조준. 이 무기가 가진 최고 볼트로. 해줘. 쏴. 지금." (p.158) 에릭은 '강한 자극'을 원합니다. 소설의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듯, 에릭은 돈에 집착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각의 문제에 긴밀한 관심을 둔 인물처럼 보입니다. 문란한 그의 생활에서 추구되는 자극의 차원을 이내 '고통'으로 환원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에릭이 어느 시크교도의 모습을 보며 에릭이 느낀 인상도 남다릅니다. "에릭은 없어진 손가락의 나머지 부분을 바라보았다. 인상적이고 심각한 어떤 것. 역사와 고통을 담고있는 신체의 결손" (p.34) 극장을 내려다보면서 고통을 잊는 각성제를 흡입한 댄서들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는 에릭이 던진 말도 기억납니다. "지금이야 어디 자기 나름의 고통이 없는 사람이 있나." (p.171) 리무진 운전사 이브라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구타나 고문당한 흔적을 읽어냅니다. (p.225) 베노와의 대화 중에 자신의 손을 총으로 쏴버리기도 하죠. (p.262) 대체 왜 그럴까요?

에릭 페커의 몸(전립선) 안에 내재한 비대칭성에서 '클리나멘'의 속성을 상기했던 건화쌤의 말이 기억에 납니다. 클리나멘은 한 마디로 관성적 운동에서 벗어나는 탈주로서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에릭이 이끌리는 신체훼손과 고통, 파산과 맞물린 불확정성, 죽음의 사태를 포함한 비대칭성 또한 질서의 일부라면 그것은 클리나멘적인 요인을 내재하고 있는 질서가 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에릭은 비대칭적인 흐름을 거부없이 수용하거나, 그것을 포함시킨 질서를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에릭은 고통과 죽음의 외부성을 욕망하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코드 안으로 편입합니다.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자본주의의 탈영토화-재영토화 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죽음의 스펙터클

에릭은 금융자본주의 질서의 어떤 정점에 이른 인물입니다. 그는 시시각각 변동하는 금융자본의 흐름, 통화의 변동에 담긴 고유한 리듬을 관찰합니다. 억만장자인 에릭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데이터 자체에 혼이 담겨 있고, 그것에 담긴 생명성의 역동적인 측면을 파악하는 것(p.43)입니다. 흔히 성공한 투자자에게는 자기만의 노하우,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다고 하죠. 베노 레빈이 에릭에게 말하는 대목이 떠오릅니다. "너는 균형만 찾았지. 아름다운 균형을. 등변에 좌우대칭.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나는 너를 알고 있어. 너는 일본 엔의 변동을 그것이 경련을 일으키고 변덕을 부리는 흐름 속에서 추적했어야만 하지. 작은 변덕. 형태가 기묘한 것."(p.266) 토론에서 이에 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때 '대칭성'을 이익추구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리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생각해보면 에릭이 추구한 '질서'에는 파산과 파멸, 심지어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죽음의 순간까지 기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민호쌤 발제문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시위라는 무질서의 흐름, 위협, 불안전함이 늘 공존하지만 결국 다시 질서나 리듬으로 합류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시위대들 또한 자본주의적 질서, 혹은 '스미스적 시장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에릭의 얼굴에 파이를 던진 어떤 남자의 곁에는 기자들이 플래시를 번쩍입니다. 레스토랑을 습격한 이들의 행동도 퍼포먼스처럼 보입니다. 소요하는 시위대의 난입이 리무진을 훼손시키지만 그 내부로 침입하지 못한다는 역설은, 그의 죽음이 사실상 자발적으로 이뤄졌다는 맥락과 더불어 기존의 계급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을 돌출합니다. 에릭에게 고전적 부르주아라는 낙인은 뭔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에릭이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검진받는 몸("자신이 보고있는 것은 심장을 컴퓨터 처리한 화상인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심장 그 자체의 영상인 것일까? ... 갈비뼈 아래 있는 자신의 생명을 화상처리 장치로 본다는 것. 자신 밖에서 계속 고동치는 생명", p.69)을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그에게 익숙한 몸은 정보화되고 데이터로 산출된 몸입니다. 에릭이 바깥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은 대부분 나열된 정보들의 차용과 (개입이 제거된) 관찰자적 시점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컨대, 에릭의 의식적인 흐름은 뜬금없이 식물의 학명이나 특정 단어의 어원적 유래를 파편적으로 떠올리고, 인물에 관한 인상을 신분과 이력에 한정하여 서술하거나, 외부를 건조하게 기술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정보로 환원시킬 수 있는 신체성에 익숙한 에릭에게 타인의 훼손된 신체는 흔적에 내재된 고유한 역사성, 단순히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개체성을 환기합니다. 그것이 죽음의 외부성을 욕망하는, 외부의 것을 내부적으로 다시 포섭하려는 문제로 귀결되었다는 것이죠. 세계를 수동적으로 관망하던 그에게 최소한의 능동성이 발휘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감각적 차원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나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에릭에게 돈은 순수한 정보의 흐름에 불과하고, 흐름은 끊임없는 운동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킨스키와의 대화에서 자본주의 사상의 특질, 즉 '필연적 파괴'를 동반한 "창조적 충동'으로 설명됩니다. "낡은 산업은 가차 없이 제거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장은 강제로 만든다. 오래된 시장은 재개척한다. 과거를 파괴하고 미래를 창조한다." (p.131) 이렇듯 자본주의적 질서에는 파산과 죽음이 내재한다고 볼 여지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에릭을 고전적인 부르주아가 아닌, 21세기 금융자본의 화신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기묘한 말일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에릭의 베팅은 '세계의 붕괴'를 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스펙터클>을 썼던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금융 게임의 전제가 사물이 말살될수록(즉 공장이 폐쇄되고 일자리가 없어지며 사람이 주고 도시가 해체될수록) 투자한 돈의 가치가 올라 간다는 것이라면, 금융을 통한 부당 이익 창출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붕괴에 대한 베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금융은 사회적 게임의 핵심에 적극적으로 자살을 들어 앉힌다는 점에서 이상적 형태의 범죄다."

"금융자본주의는 끊임없는 탈영토화의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이 유발한 공포는 일상생활의 불안정성, 노동시장의 폭력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전염된다. 이 공포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정체성과 소속감을 얻고자 하는사람들에 의한 공격적 재영토화라는 반작용을 유발하는데 소속감만이 보호의 한 형태인 안식처와 닮은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속이란 정신의 기만적인 투사, 현혹하는 감정,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 행위로만 소속을 증명할 수 있기에, 금융자본주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탈영토화, 그리고 정체성의 왕국에서 일어나는 재영토화가 결합된 효과는 영원한 전쟁 상태를 유발한다."

못다한 이야기들

이 시대에 만연한 범죄와 자살 그리고 광기의 문제는 금융자본주의의 부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베라르디의 말이 이목을 끕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일상 속에 공포와 불안정성을 주입하고,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는 이들에게 공격적 반작용을 유발합니다. 이에 관해서 그 날 이야기를 나눴지만 후기에 못다쓴 생각이 많습니다. 베노 레빈과 에릭 파커의 대결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 종수와 벤의 구도와 비교했던 건화쌤의 설명, 소설의 독특한 문체를 분열증적 특징과 연관지어 얘기했던 것도 기억나구요. 후기를 정리하면서 이번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영화(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 <코스모폴리스>, 2013)를 보고서 뒤늦게 들었던 이런 저런 생각들도 좀 더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몇 가지가 기억에 남았는데, 영화의 오프닝/엔딩 장면에서 잭슨 폴락과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나온게 인상에 남았습니다. 금융독재를 '추상의 지배', '수학적 잔혹성의 지배'로 표현했던 베라르디의 말을 힌트삼아서, 주인공의 독점욕과 자살의지가 연결되는 지점을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번 후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 다음부터는 목요일까지 후기를 꼭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보고, 얘기 나눕니다.
간식은 순화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체 4

  • 2019-04-06 14:19
    에릭이 고전적 부르주아가 아니라 금융자본의 화신이라면 그의 죽음에 대해 더 생각해볼 거리가 많겠어요. 노심초사 선생님의 못대한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주 목요일이 기다려지네용. ^^

  • 2019-04-06 19:40
    역시 소설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앞에 읽은 책들이 <코스모폴리스>를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걸 느껴서 좋았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은 또 어떨지 궁금하네요.

  • 2019-04-07 10:18
    노심초사하신 만큼 엄청난 후기네요! 아리송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 이렇게 저렇게 해볼 수 있는 얘기가 많았던 소설 같아요. 여전히 아리송한 채였지만. 후기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 2019-04-08 20:11
    영화도 재밌었는데 소설은 역시 더 세밀하게 생각할 지점이 많네요. 세계의 붕괴에 배팅하는 에릭이 죽음을 자초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도 뭔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