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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차 후기 및 공지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I)

작성자
노심초사
작성일
2019-04-18 14:26
조회
147
“우리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획득에의 충동, 이윤과 화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화폐에 대한 추구 그 자체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 이 충동은 웨이터, 의사, 마부, 예술가, 창녀, 부패관리, 군인, 귀족, 십자군 도박꾼, 거지 등에게도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왔다. 아마도 이 충동은 그 객관적 가능성이 있는 혹은 있었던 곳이라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종류와 조건의 인간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소박한 생각이 단적으로 포기되어야 함은 문화사 초기에 가르쳐져야 한다.”(문예출판사, 11)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환경적 조건을 가능한 낯설게 바라보기란 어렵습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서 독일인의 신분으로 살아왔던 베버였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기류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것의 독특한 측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베버가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기술적인 생산 수단에 따른 형식과 규칙, 계산 가능한 법적 체계와 행정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우리가 가진 합리성에 관한 표상과 별반 배치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베버는 서구 문화의 ‘특수하고 독특한’ 합리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신비적 명상의 합리화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생활, 기술, 과학적 탐구, 군사 훈련, 법과 행정 등에 대한 합리화가 있다. 게다가 이러한 분야의 각각은 매우 다른 궁극적 가치와 목적에 따라 합리화될 수 있으며, 한 관점에서 합리적인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19)

합리성의 비합리성, 형용모순처럼 들리는 이 말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경험될까요? 토론 중에 나왔던 민호쌤의 경험담에 저도 공감했습니다. 대학교에 가면 대학생활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이런저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일찌감치 취업준비를 해야 하고, 스펙을 쌓아야하고, 공모전에 응모하고 ... 그 말들이 깨나 합리적인 방침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실천을 위한 절차까지 친절하게 제공된 그 말, 알고 보면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요. ‘그게 다, 잘살기 위해 하는 말이야’라는 핀잔은 어째서 뒤늦게야 새어나오게 되었을까요. 뭔가 앞뒤가 바뀐 것 같은, 본말이 전도된 것 같은 이상함. 이후 논의에서 베버가 본격적으로 지적하듯이,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둘러싼 맥락은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살아온 대로 살고 그에 필요한 만큼 벌려고 하는데, 어째서 돈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소명’이 되었을까?-하는 것입니다. 베버에 의하면, 근대 자본주의는 필요한 만큼 벌고 살아온 대로 사는 ‘전통주의’적 태도와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출현시켰다는 것입니다..

감각
“... 이것이 바로 ‘전통주의’라 불리는 태도의 한 사례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본성상’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 단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살고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려고 한다. 근대 자본주의가 노동 강도의 제고를 통해 인간의 노동 ‘생산성’을 제고시키기 시작했던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전 자본주의적 경제노동의 이러한 동기가 갖는 무한히 끈질긴 저항에 부딪혔다. … (중략) … 왜냐하면 이런 일에는 발달된 책임감 자체가 불가결한 뿐 아니라 적어도 작업 ‘중’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 즉 어떻게 하면 되도록 편안하고 적게 일해서 정해진 보수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떠나 그 일이 마치 절대적인 자기 목적 ―‘직업(소명)’ ― 인 양 여기는 것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50-52)

건화쌤이 말했듯,  베버의 문제의식은 니체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예컨대 어떻게 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서, 감각이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 무관심한 직관이 열망에 찬 의지에서, 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 진리가 오류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서문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발생학적으로 연구해보기 위한 시동을 겁니다. 자본주의의 표상을 ‘단지 더 많은 화폐에의 추구’로 규정하지 않는 베버의 발언이 우리의 이목을 끕니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를 탐색한 베버는 ‘종교개혁’을 단지 종교적 범주 안에서 적용되는 변화, 이를테면 그것을 믿는 신자들에 한정된 교리체계의 변화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즉 종교개혁은 삶 전반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까지의 삶의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대체함을 뜻한다. 물론 이는 극도로 순응적이고 실제적으로는 당시에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며 여러 면에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던 지배를, 대대적으로 사생활과 공적 생활에 파고들어 모든 삶의 영위를 매우 부담스럽고 진지하게 통제하는 것으로 대체한 것이다”(28) 후기를 쓰며 이 대목을 곰곰이 짚어보니, ‘종교’를 이해한 베버의 시각이 예리합니다. 종교개혁을 어떤 통치적 힘이 일상의 세밀한 부분까지 스며든 계기로 이해한 것은, 근대를 종교의 영향이 쇠퇴한 세속적 시대로 규정하는 시각에 대한 반발이자, 종교성을 삶의 구체적 양태에서 파악하려는 시도인 것 같습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자본주의 ‘정신’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의 행동양식에 내재된 종교성, 말하자면 하나의 종교로서 자본주의를 보게끔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토론에서 <문장을 훔치다>에 인용된 벤야민(‘종교로서의 자본주의’)과 종교개혁을 바라본 니체의 관점이 잠깐씩 언급되었습니다. 당시에 종교개혁자들이 걸었던 슬로건은 누구든지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만인 사제설’)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성직자를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키고 “고통받는 자를 지배하는 자신의 기교를 과신하는”자로, “건강한 자는 모두 반드시 병들게 되고, 병자는 모두 반드시 유순하게” 만드는 자로 묘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으로 사람들은 사제를 거치지 않고 신과 교감할 수 있되, 니체적 의미에서 더욱 교묘해진 ‘노예적 통치술’이 발명된 것이 아닐까요. 책을 읽으면서 이 점을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과 연관시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톨릭에 대해 우리가 갖는 표상 중의 하나는 바로 금욕주의입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 윤리, 즉 프로테스탄티즘은 흔히 가톨릭과 비교할 때 더 ‘세속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의미를 지닌 종교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특징과 근대 자본주의적 문화 사이의 내적인 친화성은 ‘세속성’이 아니라 순수한 종교적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따라서 ‘독특한 합리성’ 내지 ‘합리적 비합리성’ 따위의 말은 오히려 자본주의 정신에 깃든 종교성을 문제로 삼습니다. 여기서 ‘정신’은 “윤리적 색채”를 띤 일종의 격률입니다. 베버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인상적인 설교에서 발견된 자본주의 정신의 윤리성을 파악합니다. 이러한 윤리의 ‘최고선’은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것”(44)이죠. 여기서부터 베버는 돈벌이 자체가 목적이 된 삶, 전도된 삶의 양식을 발견합니다.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마라”, “신용이 돈임을 잊지마라”, “신용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행위도 조심해야 한다” ...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는 프랭클린의 격언은 비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기술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전도된 ‘감각’에 드리워져있는 종교적 표상을 지목합니다. (44) 그러면서 베버는 ‘무분별하고 아무런 규범과도 내면적 관련이 없는 영리 활동’은 역사의 모든 시대에 존재했지만, 이처럼 영리 활동에 관한 윤리화된 격률이 적용된 생활양식은 근대 자본주의의 에토스를 특징짓는 현상임을 간파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전통주의적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조직 형태’로 전환되었을까요? 베버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합리화 과정'이 일종의 역사적인 단절을 동반했다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선대업에 종사하는 업자들을 지배하던 전통주의적 에토스가 자본주의적 조직형태를 띠기 시작했을 순간을 베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감각
"그러나 이러한 평온함은 갑자기 파괴되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즉 선대업에 종사하는 어느 가족의 한 청년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와 자신의 필요에 맞는 직물공을 엄선하고, 그들의 의존성과 통제를 점차 강화시켜서 그들을 농민에서 노동자로 교육시키는 한편, 다른 면으로는 최종 구매자인 소매업자와 가능한 한 직접 접촉하여 판매를 손수 행하며, 고객을 직접 구하여 그들을 매년 규칙적으로 방문하여 특히 생산물의 품질을 전적으로 그들의 요구와 희망에 적응시키고, 그들의 '구미에 맞게'하는 동시에 '박리다매'의 원칙을 실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그러한 '합리화 과정'이 수반하기 마련인 결과가 여기서도 즉시 나타났다. 즉 상승하지 못하는 자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자 목가적 분위기는 붕괴하고, 상당한 재산이 모아져도 이자를 노리는 대부로 사용되지 않고 재차 사업에 투자되었다. 안락하고 쾌적한 옛 생활방식은 박정한 냉혹함에 굴복했다." (57)

베버의 역사적 관점은 역사를 흔히 발전적이고 단계적으로 사유했다고 알려진 마르크스와는 다른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자본주의 기업가의 ‘이념형’을 둘러싼 이견들도 토론에서 얘기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기업가의 ‘이념형’은 몇몇 탁월한 실례에서 나타나듯이 비천하건 세련되건 그러한 벼락부자 근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념형의 기업가는 과시, 불필요한 낭비, 권력의 고의적 사용 등을 꺼리며 자기가 받는 사회적 존경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 그의 생활태도는 달리 말해 … 일종의 금욕주의적 특징이 있다.”(60) 여기서 기업가의 이념형은 과시적인 의례를 통해 명예와 존경을 중요시했던 부족사회에서의 추장과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견이 있었고, 한편으로 어떤 기업가는 기부를 통해 얻은 사회적인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반문이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이념형에서 두드러진 '금욕주의적 특징'에 주목해야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개인을 위한 재산의 사용보다, "완벽한 직무완수라는 비합리적 감각"에 치중하는 인물형에서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기업인들이 떠올랐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2부의 1장(~1.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까지 읽고 토론합니다.
발제는 저와 순화 선생님, 간식은 은섭 선생님이 준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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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8 19:54
    합리성의 비합리성도 그렇고 역사를 단계적 방식이나 인과론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베버님은 정말 멋지시더라구요
    곧 등장할 마르크스에 대한 설명은 어떨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