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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차 후기 및 공지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II)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4-25 00:33
조회
120

옛날처럼 귀천을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 없을지라도, 오늘날 직업의 의미는 제법 남다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매번 하는 장래 희망 조사, 갖가지 적성검사, 직업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토론 중에 나왔던 말이지만, 우리에게 직업이란 당연히 ‘먹고사는 문제’이면서 무엇보다 ‘자기’를 능력껏 ‘구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여겨지곤 합니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직업은 자아를 실현하는 장이 된 것일까요? ‘밥벌이’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 직업 개념에 의문을 가졌던 것은 베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업에 관한 독특한 관념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지, 이번 시간에 우리는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탄티즘 직업윤리의 형성을 살펴보고 얘기 나눴습니다.


영어로 Calling은 흔히 ‘부르는 소리’, ‘점호’, ‘호출’을 뜻하지만, ‘천직’을 뜻하기도 합니다. [타고난 직업이나 신분]을 뜻하는 말인 천직(天職)에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가 배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직업에 먹고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었을까요? 베버가 찾은 답인즉, ‘소명’으로서의 직업의식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 이후의 직업 개념에 내포된 종교적 의미는 가톨릭적 태도와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고유한 표식이 됩니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세속적 직업노동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종교 생활이란 곧 수도승적인 생활방식을 뜻했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 마르틴 루터의 등장으로 세속적인 직업 활동 역시 신에게서 받은 ‘현세적 의무’로 해석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마련됩니다. 물론 루터의 관점에 처음부터 도덕적 관점이 들어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루터는 세속적 노동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신앙생활을 해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수행해야 할 자연적 활동으로 봤습니다. 그러다가 가톨릭과의 대립으로 자신의 믿음(‘오직 신앙뿐’)을 더욱 전면적으로 관철할 필요를 느끼자, 직업의 중요성이 점증되어간 것이죠.

 
“즉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모든 경우에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만이 신의 뜻이고,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단적으로 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직업 생활에 대한 이러한 도덕적 규정이 종교개혁, 특히 루터의 영향력 있는 업적 중 하나라는 사실은 실제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침내 상식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문예출판사, 69).

직업 생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마르틴 루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써 개인들이 직업은 점점 ‘섭리’적인 맥락에서 읽히게 됩니다. 섭리 사상에는 창조주가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다스린다는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개인이 처한 모든 환경은 신의 뜻이고, 직업은 신의 특별한 명령이므로 모든 이는 자신의 처한 삶의 지위(신분과 직업)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죠. 아울러, 이것은 루터의 견해가 가진 한계를 보여줍니다. 단지 주어진 처지에만 수긍하게 되면, 열심히 일할 필요도, 직업을 통한 성공 신화도 별로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에 베버는 루터의 직업관이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던 칼뱅주의를 주목합니다. 베버에게 칼뱅주의의 출현은 “예상치 못하고” “원하지 않았던”, 심지어 “종교개혁이 상상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고 또 대립되기까지 했던”(77-78) 현상이었습니다. 막스 베버가 누차 강조하는 바는 자본주의 ‘정신’의 출현이 특정한 개인에 의해 창시된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 체계의 등장이 오직 종교개혁으로만 연역되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베버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의 친화성이 과연 얼마나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특정한 종교적 신앙'에 해당하는 칼뱅주의의 핵심적 교리가 ‘예정설’입니다. 이에 따르면 신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는 이치에 따라 개인들에게 정해진 운명을 미리 부과해놓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있고, 신의 이해는 상식과 법을 초월해있기에 인간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예정설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재밌는 것은, 칼뱅은 이미 정해져 있는 신의 결정을 어떻게든 확인받거나 좌우하려는 인간의 노력, 예컨대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하려는 태도를 매우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입니다. 구원을 받든 그렇지 않든 간에, 각 개인의 운명은 번복할 수 없이 예정되어있기에 뜻을 거슬러선 안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구원을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보장받을 수 없게 되자, 신과 인간을 매개해온 사제의 역할도 무의미해집니다. 더불어 세례나 성만찬과 같은 성사예식도 소용없게 됩니다. 성례에 열심히 참여하더라도 주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던 것이죠. 이제는 교회도 개인들의 구원을 도울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신조차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 죽은 것에 불과하며, 신은 영원한 과거부터 선택된 자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을 결정했기 때문이다.”(92) 결과적으로 칼뱅주의의 예정론은 개인주의를 유행시켰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내면적 고립감은 극심해집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신앙생활을 이어가지만, 신과의 관계를 한층 직접적이고 사적인 관계로 삼게 됩니다. 참고로 칼뱅에게는 자신이 간택되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신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여기서 예정설은 다시금 역설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우선 내세來世가 더 중요할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현세적 삶의 모든 관심보다 훨씬 확실했던 시대에 이러한 이론이 어떻게 감수되었는가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가 모든 신자에게 떠올랐을 테고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뒷전으로 밀어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즉 나는 선택되었는가? 선택되었다면 나는 그 선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칼뱅 자신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도구’라고 여겼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했다. (…)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찍이 그를 추종했던 베자Beza와 같은 계승자들과 특히 광범한 층의 평신도들에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이들에게는 구원의 ‘인식’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예정설이 확립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선택된 자’에 속함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되었다." (96-97)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저지른 죄가 사해질 수 있었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것은 바로 사제와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구원이 되느냐 마냐는 오직 개인적인 고민에 한정됩니다. 이제 개인적 구원의 확인 가능성에 따라서 대략 두 가지의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 치부하거나, 아니면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인들이 처한 직업적 위치에서 저마다의 능동성을 발휘하는 것이죠. 베버가 지적했던 것처럼, 전자의 경우는 구원 여부를 정서적인 측면에서 확인받고자 하는 신비주의 전통으로 계승되고, 후자의 경우가 칼뱅주의로 편입됩니다. 토론에서 민호쌤이 이따금씩 의문을 던졌듯, ‘구원 여부가 불확실한데도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살게 되었을까?’에 관해 베버가 내린 대답도 어쩌면 서문에서 밝혔던 ‘비합리의 합리화’ 과정과 연관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정확히 말해 구원의 확신―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는 가톨릭의 경우처럼 개개의 공적을 점진적으로 쌓아가는 데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선택되는가 버림받는가라는 양자택일 앞에서의 체계적인 자기 검토에 있는 것이다”(101-102) 운명을 체념하고 심판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구원의 여부를 어떻게든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자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토론에서는 칼뱅주의자의 능동성(?)과 비교될 수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만연한 '자기계발적 주체'의 특징이 간간히 언급되었습니다. 자신을 계발하고, 자기를 경영하라고 외치는 많은 구호들은, 오직 일의 성과에 매달리는 주체의 착취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주체 자신임을 환기합니다. (*한병철, <피로사회>) 맥락은 좀 다르지만, 칼뱅주의에서 비롯된 개인주의적 윤리는 일견 성과주체의 그것과 닮은 듯 보입니다. 그 밖에도 비록 정리된 대답에 이르지 못했지만, 동양종교에서는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생업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봤을까하는 물음도 종종 제기되었습니다. 이전의 <자본주의 역사 강의>에서 살짝 언급되었지만 다뤄지지 못했던, 유교와 자본주의 정신의 친화성에 대해서도 궁금해졌구요.

모쪼록 베버의 논의가 구체적인 결론을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책을 끝까지 읽고서 얘기 나누겠습니다.
발제는 건화쌤과 은섭쌤이 맡으셨습니다. 한 주 쉬고, 다다음주 화요일(5/7)에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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