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7월 17일 세미나 후기

작성자
수늬
작성일
2017-07-21 14:44
조회
222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켰다.”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 위기의 기념비라고 불리는 이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대해 니체가 한 말이다. 아직 마지막 장과 2권이 남아 있지만 읽을수록 이 말들이 얼마나 샅샅이, 깊숙이, 날카롭게 파고드는 말인지를 다시금 느낀다. 솔직히 《비극의 탄생》의 흥분과 《반시대적 고찰》의 감탄이 이 책으로 넘어오면서 많이 가라앉아 버렸었다. 단편적이고 잠언적인 형식, 장으로 크게 묶여 있긴 해도 긴밀한 논리성이 뚝뚝 끊겨 있는듯한 연결 구조, 그리고 조금 느슨해져버린 내 마음에도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발제를 하고 후기를 쓰려니 다시 두근거림이 살아남을 느낀다. 니체의 날카로운 ‘쟁기날’(《인간적인~》의 첫 번째 초안에 니체가 붙인 제목, 나중에 바뀜) 소리를 들어버린 것이다. 감히 찔렸다고는 못하겠고~~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나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그것에는 도덕과 더불어 국가라는 제도도 있었다. 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에서 도덕에 대해 ‘정념이 만든 환상’일 뿐이고 ‘우리 안의 야수에게 물려 찢기지 않기 위한 필연적인 거짓말’이라고 말했던 니체는 종교와 문화를 지나 이제 국가에 대해 날을 세운다. 니체가 바라보는 국가는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 후견인적 역할을 지속해오다가 계몽시대의 민주국가에 이르러 ‘국민의 의지를 위한 도구’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다르게 사유된다. 신성한 그 무엇으로 우러러보았던 숭배의 대상이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의 한 기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국가 붕괴의 역사적 형식으로서 우리는 국가의 무의미성을 역사 속에서 서서히 느껴갈 것이다. 언젠가 국가보다 더 합목적적인 발명들이 국가를 이겨낼 것이지만 인간의 타고난 영리함과 이기심이 당분간은 그것을 존속시킬 것이다. 「종교와 정부」라 이름 붙여진 472장은 무려 6페이지로 길게 이어지면서 이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그 앞뒤로 펼쳐진 국가에 대한 여러 단상들을 참고해가며 니체의 해석을 따라가 보았지만 우리의 논의는 이런 식으로 거칠게 정리될 것 같다.

또 사회주의에 대한 여러 언급이 나오는데 니체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으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사회주의가 국가 체제의 모습으로 역사에서 출현하기도 전에 니체는 벌써 그것의 탄생과 사멸, 본질까지도 예고한다. 사회주의가 왜 전제주의의 동생인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고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회주의에게 개인은 자연의 부당한 사치이며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사회주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박아두고 국가 권력의 위험성을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지만 언젠가 그 맹렬한 함성도 사라질 것이다. 반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고 그로부터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붕괴했으니 예언의 정확성이 놀라우면서도 인간을 총체적, 유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철저히 홀로선 개인으로 보았던 니체다운 해석이라 할만하다. 중요한 것은 이상하게 빨려드는 그의 설득력인데 이를테면 이런 부분들이다. “피지배 계급의 사회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바와 같이 권리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정의의 발로가 아니며 욕망의 발로이다.”(451장) “부당한 생각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숨어 있다. 그들은 소유한 자들보다 더 선하지도 않고 도덕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452장)

권리의 평등,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배. 익히 들어왔고 지금도 많이 듣는다. 한때 (어쩌면 지금도)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넘버원을 차지할 말이다. 니체는 이 말의 옳고 그름 이전에 이 말에 대한 우리의 맹목성을 우선 파고든다. 권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정의인가? 니체가 태연한 얼굴로 안경을 걷어 올리며 가늘게 눈을 뜨고 묻는다면 멈칫멈칫할 것 같다. 권리의 평등 뒤에 숨은 우리 안의 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한 자들에 대해 도덕적인 우선권을 가질 만큼 우리는 더 선한가?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그들과 같은 힘을 가졌을 때(멀리 갈 것 없이 지금 내가 남보다 조금 더 가진 힘 또는 그 힘과 닿을 수 있는 관계망이 있다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진 자에게 보아온 것과 같은 부정과 폭력을 쓰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당황하는 우리에게 니체가 ‘…거봐’하며 말한다. “우리는 폭력, 노예제도, 기만, 오류의 낡은 문화를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상태의 상속자이며 게다가 그 모든 과거의 유착물인 우리 자신을 그것에서 떨어지도록 명령할 수 없으며 개별적인 한 부분을 빼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우리다. “야수에게, 마침내 그 야수가 울부짖을 때까지 피 묻은 고기 덩어리를 가까이에서 보여주고 도로 가져올 경우 : 그대들은 이 울부짖는 소리가 정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니체의 과격한 언사에도 마음의 항의가 생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권리의 평등 또는 정의’를 말할 수 있는 계급이 있(었)다. ‘희생과 거절로 정의를 실행하는 지배 계급’. (《인간적인~》의 서문에서 말하는 ‘위계질서의 문제’가 이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높은 가문 출신으로 유전에 의해 점점 상승된 두 가지 기술을 갖고 있다. ‘명령할 수 있는 기술’과 ‘긍지를 가진 복종의 기술’을 지닌 그들. 초인간적인 그 무엇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숭배하고 복종하면서 더욱 고귀해지는 혈통의 그들에게는 우리로서는 믿기 힘든 ‘종속’이 있었다. 그 종속의 토대가 되었던 무조건적 권위와 궁극적 진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교섭, 협정, 계약과 같은 것들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단지 상호 계약에 따른 조건들 아래서만’, ‘이기심을 유보하고서만’ 종속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니체가 줄곧 찬양해마지 않는 고대 그리스의 귀족들과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 영웅들이 떠오른다. 적이라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행위가 비겁할 때 미워하던 그들. 주어진 운명을 당당하고 명예롭게 겪어내는 것이 영웅의 태도라 여겼던 그들. 그런 영웅끼리는 비록 적의 운명으로 만났다할지라도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으로 존중했던 그들. 고귀한 명령과 복종은 더 이상 우리의 문화풍토에서는 자라날 수 없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하지만 그의 맥락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이르면 긍정적이기만 했던 나의 ‘평등’ 관념을 향해 던지는 니체의 쟁기질이 수긍된다. 더 나아가 차이를 용납하지 않은 평등, 고귀하고 강한 자(니체적 개념에서)에 대해 약자가 외치는 증오와 복수로서의 평등(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말들의 맥락도 오해나 저항 없이 다가온다. 모두를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높이는 약자의 방식이 평등일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 끄덕이게 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이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그의 서문을 읽어 보니 처음 읽었을 때 밑줄을 그은 구절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너는 너의 주인이며 동시에 네 자신의 미덕의 주인이 되어야만 했다. 과거에는 미덕이 너의 주인이었다 ; 그러나 그 미덕은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너의 도구여야 한다. 너는 너의 찬성과 반대에 대한 지배력을 터득하여 너의 더 높은 목적에 필요할 때마다 그 미덕을 붙이거나 떼내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했던 것이다.” 도구로 쓰지 못하고 내가 그것의 도구가 되어 버린 미덕. 그 미덕에 도덕과 국가와 종교와 문화에 대한 나의 오래고 낡은 가치들이 있다. 니체가 그토록 강조하는 ‘관점주의 것을 터득’하지 못한 채 오랜 가치들이 보여주는 것만을 믿은 나에게, 니체는 삶이 ‘끊임없이 부수어가면서 의문을 제기하는 그런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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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22 09:36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어쩐지 후기의 기준을 높여놓으신 느낌이??ㅎㅎ 미덕의 주인이 되는 것.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