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9.13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0-09-09 02:21
조회
99
주역과 글쓰기 시작 전은 꽤 살벌합니다. 지난번에 배운 괘사와 효사 시험을 보거든요. 시작 직전까지 맹렬히 시험공부 모드에 돌입해 있지요. 틀리면 효사 하나당 벌금이 ㅇ0ㅇ!! 하나 아깝게 틀리면 내적눈물 만 리터씩 흘리곤 합니다...흑흑ㅠㅠ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바뀌었는데요, 바로 만점을 맞으신 태미샘께서 만점턱(?)을 돌리신 겁니다(만점 맞으실 걸 미리 아셨는지?!). 바로 다종다양한 무늬의 손수건들! 핸드타월은 물론 목에 매면 패션 아이템이 됩니다. 만점턱...꽤 괜찮은 제도 같습니다. 다음번 시험에서 만점 받을 예정(?)이신 분들도 뭔가 준비하시길~ ㅎㅎ
또 이번 시간은 주역과 글쓰기 최초로(!) 단축수업을 했습니다. 평소보다 두 시간 빨리 끝난 것을 기념해서 내친김에 수정의 별자리 수업까지 들었네요.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부른 소소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ㅎㅎ

<주역>은 어느새 상전을 거의 다 읽어갑니다. 막바지쯤 되니까 신기한 괘 모양도 보게 됩니다. 바로 산뢰이(山雷頤)와 택풍대과(澤風大過)괘입니다. 산뢰이는 맨 위와 맨 아래가 양효이고 안쪽으로는 모두 음효인 괘입니다. 뒤집어도 산뢰이는 모양이 변하지 않지요. 따라서 산뢰이의 짝은 그 지괘인 택풍대과입니다. 위아래가 음효이고 안쪽으로 양효가 차 있는 모양이지요. <주역>은 괘 모양에서 유추한 괘사와 효사로 이루어진 텍스트다보니 이런 조합들이 있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습니다ㅎㅎ 이런 조합들은 상성이 극단적으로 반대일 것 같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이괘와 대과괘를 보면 절제하고 삼가는 군자와,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영웅적인?) 성인 조합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괘의 이(頤)는 입을 상징합니다. 맨 위와 맨 아래 효가 다물리는 턱을 상징하고 안쪽에 있는 음효가 비어 있는 입 안을 상징하지요. 입은 뭔가를 먹는 기능도 있지만 말을 하는 기능도 하는, 물질과 정신을 생산하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이괘의 상전에 따르면 군자는 이괘의 형상을 보고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한다(愼言語 節飮食)”는 교훈을 얻었다고 하지요. 말하고 먹는 것은 곧 양육과 관련됩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인간은 외부와 교류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기관이 바로 입인 것입니다. 이괘는 양육하기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기르는 것과 자신이 길러지는 것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른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를 함양하는 것을 동반하는 것이죠. 그 첫 번째 원칙이 바로 삼가고 절제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말하고 먹는 것을 삼가느냐는 것입니다. 삼간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사실 절제가 아니죠. 뭘 얼마만큼 먹고 말하느냐를 단속할 줄 아는 것이 절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괘에서 가장 찔리는(?) 효는 초구효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효는 두 개뿐인 양효 중 하나이면서 턱을 늘어뜨리고 있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효사는 이렇습니다.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서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 거북이는 최소한의 양분만 섭취하고도 오래 생존할 수 있어서 양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턱을 늘어뜨리고 있는 이유는 육사효와 응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초구효는 응하는 것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입니다. 턱을 늘어뜨려서야 다른 누구를 기르기는커녕 자신조차 기를 수 없습니다. 자고로 턱은 열심히 움직여서 뭔가를 씹고 소화하는 기관이니까요. 효사는 그걸 하지 않는 것 자체를 흉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생은 뭔가 몸에 좋은 걸 먹어서 얻어지는 보상 같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움직이는 만큼이라는 것을 이괘 초구효는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괘 다음으로 나오는 괘는 그 지괘인 대과괘입니다. 상만 보면 양효가 가운데에 득시글하니 힘이 넘쳐 보이지요. 하지만 그 넘치는 힘 때문에 전체적으로 오버하는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처음과 끝은 음효인데 가운데에 양효만 있어서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운 모습이고요. 따라서 대과괘는 뿌리가 허약한 들보의 형상입니다. 근본은 상실되고, 전체적으로 기운 넘치는 것들은 날뛰고 있는 개판 5분 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요.

대과괘의 재밌는 점은 이런 오버하는 상황을 보는 성인의 태도입니다. 한마디로 오버에는 오버로 대응한다! 맞불작전이라고 할까요? 워낙 큰 힘들이 날뛰고 있는 시대에 성인이 평소처럼 온화하니 잘 어루만지며 정치하려고 하면 그건 때에 맞지 않는 거라고 대과괘는 말합니다. 힘에는 더 큰 힘으로 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죠. 이때 성인의 오버와 범인의 오버를 가르는 것은 역시 자기 원칙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자기 원칙을 잡고 세태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그가 대과의 때를 잘 건너갈 수 있다고 대과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초육효에서 드러난 대로, 땅바닥에 그냥 털썩 앉지 않습니다. 앉는 데도 일일이 풀로 방석을 짜서 앉는 범상치 않은 오버(!)를 보여주지요. 그 극단적인 신중함과 철저함이 대과의 때를 건너는 힘인 것입니다.

이괘와 대과괘는 사실 지금이야말로 계속 상기하면 좋은 괘들인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복권, 주식,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한탕’에 온갖 기대가 몰리는 때에는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게 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성과도 적고 하찮아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과의 시대이지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괘는 절제를, 대과는 극단적일 만큼의 원칙 고수를 충고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단 한 순간의 시류를 타서 한탕주의를 꿈꾸는 것은 내 역량을 기르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몽동은 알듯말듯 합니다... 우선 시몽동은 존재와 생성이 대립된다는 전통적인 사유를 벗어나 그것을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시몽동의 전략은 개체가 구성되는 원리로서의 생성과 그 결과로서의 구성된 개체가 아니라 개체화 과정 자체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주목하자면, 어떤 원리의 발현 결과로서의 고정된 존재란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은 매번 다른 것으로 변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몽동은 이를 변환이라고 하는데요, 하나의 물질이 다른 물질을 변이시키는 과정입니다. 모든 물질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자기구성적 역동성이라 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이의 결과와 구조화된 과정이 동시적이라는 것.

이것은 하나의 개체가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개체는 계속해서 상전이 중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주역과 글쓰기 같은 경우 신입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요. 별자리 수업도 듣고, 단축수업도 하고(?) 등등...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개체는 전체를 바꾸는 것에 대해 전혀 작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나를 바꾸려면 그러기 위해서도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변환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잘했어/못했어’와 같은 자찬과 반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 다른 시도를 하도록 만드는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감(坎)괘와 리(離)괘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시몽동, 개체화 이론의 이해> 1장까지 읽고 노트 정리 해 옵니다.

간식은 정옥샘
후기는 규창

일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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