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9. 6 주역과 글쓰기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9-10 20:18
조회
135
저는 《주역》이 두 개씩 괘를 묶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어떨 때는 음양이 정반대인 두 개의 괘를 보여주고(之卦), 어떨 때는 위아래가 뒤집힌 두 개의 괘를 보여줍니다(倒顚卦). 이 배합에 어떤 규칙이 있을까 싶어서 살펴봤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처음 건괘와 곤괘를 제외하고 6개의 괘(수뢰둔, 산수몽, 수천수, 천수송, 지수사, 수지비)에 모두 수(水)가 들어가서 ‘인생 초창기를 험난함으로 표현하는 걸까?’라고도 생각했는데, 뒤에 딱히 공통된 괘로 묶이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저렇게 읽어보려 하는데 순조롭게(?) 실패 중입니다.

채운쌤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얘기지만, 괘를 읽을 때는 괘의 배치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괘의 배치 속에서 각 효들이 어떤 위상을 갖게 되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괘가 어떤 시대를 가리키는지 보인다고 하셨죠. 저는 지금까지 읽은 모든 괘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단순히 인간이 빠질 수 있는 공통된 탐욕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이번에 읽은 산뢰이(山雷頤)괘와 택풍대과(澤風大過)괘는 지금 시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괘인 것 같습니다.

이괘와 대과괘는 음양이 서로 정반대인 두 개의 괘입니다. 따라서 두 괘가 그리는 상황, 세상에 자신을 펼쳐내는 방식도 정반대입니다. 이괘는 자신과 타인을 양육하는 것을 말하고, 대과괘는 과잉되게 사는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 군자가 취해야 할 과잉된 행동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두 괘에서 모두 정(貞), 사사로움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 원칙을 강조합니다. 물론 주역의 모든 괘가 정(貞)을 강조하지만, 이괘와 대과괘에서는 특히 우리에게 자기 원칙이 강조되는 상황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폭언(暴言)과 폭식(暴食)의 시대

이괘는 위로는 간괘와 아래로는 진괘로 이루어졌습니다. 괘의 배치를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이괘에서는 간괘와 진괘를 병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치고(艮), 움직이는(動) 이괘의 상에서 움직이고, 멈춤의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입(혹은 턱)을 이괘의 상으로 규정했습니다. 정이천은 ‘이’를 ‘기르다’ 양(養)자로 해석합니다. 수천수괘에서도 기다림(需)을 양육(養)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이괘의 양육이 수천수괘의 양육과 뭐가 다를까 생각했는데, 괘가 그리는 상황을 살펴보니 엄청 다르겠더라고요.

수괘에서 성장하기 위해 주위의 것을 마구 흡수하는 양육을 말한다면, 이괘는 그동안 마구 내뱉던 말들을 신중히 하고, 마구 먹던 것들을 절제하는 양육을 말합니다. 이괘의 윤리는 “말을 신중히 하고, 음식을 절제한다(愼言語 節飮食)”였죠. 수괘와 달리 상황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채운쌤은 신중함(愼)과 절제(節)를 ‘해야 할 것을 책임지면서 하기’로 풀어주셨습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말에 관해서 눌언(訥言)을 강조했는데요. 이때의 눌언은 실제로 더듬거리며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신중하게 말하는 것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유가에서 ‘말하기’는 나와의 관계에서의 진실성,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믿음 위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이괘의 양육은 수신(修身)의 느낌이 강합니다.

‘수신’은 단순히 내 몸에 좋은 것을 채워 넣는다거나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다릅니다. 내 몸에 무엇이 적합한지 실제로 양육하려면, 사람은 무엇으로 양육되는지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동반돼야 합니다. 그래서 ‘양육하고 입에 채워 넣을 실질적인 것을 스스로 구함을 봅니다.(觀頤 自求口實).’ 그런데 주역의 성인은 단지 자신을 양육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양육하는 것이 자신이 잘나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임을 이해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양육되었던 것처럼 백성들을 양육합니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백성들을 때에 맞게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농사철에 농사를 짓게 하고, 겨울에 전쟁하지 않는 것. 흉년에는 곳간을 풀고,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鰥寡獨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모두 성인의 양육에 포함됩니다.

육사효 “전도되어 길러주기를 구하여 길하나, 범이 상대를 탐탐히 노려보듯이 하며 그 하고자함이 좇고 좇아 계속되면 허물이 없으리라(六四 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는 구절이 그러한 성인의 정치를 보여줍니다. 정이천은 ‘호시탐탐 기욕축축’ 구절을 통치자가 위엄을 가지고 항상된 마음으로 통치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채운쌤은 다른 해석을 소개해주시면서, ‘호시탐탐’을 ‘양육 받지 못한 백성들이 통치자를 노려보는 것’이라고 하셨죠. 성인은 백성들이 ‘호시탐탐’하게 되는 구체적 실정을 제거하는 정치를 펼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상전의 “위의 베풂이 빛나기 때문이다”는 구절도 더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시대의 폭언과 폭식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들뢰즈는 ‘입’이라는 신체 기관의 복합적 기능에 했는데요. ‘입’은 음식을 소화하는 물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말하기라는 비물질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방식과 음식을 섭취하는 방식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저희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말하기의 신중함이나 식생활의 절제 같은 것을 딱히 ‘윤리’로 삼지 않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설정합니다. 가령, 말하기를 조심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고,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다이어트를 위해서입니다. 모두 특정 결과를 상정한 수단으로서의 투기적 행위들입니다.

형의 직장생활을 떠올려 보면, 지금 직장인들이 처한 조건에서 신중함이나 절제를 발휘하기란 무척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직장인들의 애환은 자신이 바라는 만큼 월급 액수가 높지 않다는 것과 더럽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다녀야 한다는 비참한 현실에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에는 상사나 자신의 일과 관련된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면서 폭식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폭식은 단순히 많이 먹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서 반응적으로 먹게 되는 행위인 것 같습니다. 특히 속이 쓰릴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죠. 이런 조건에서는 폭식과 폭언을 쉽게 그만둘 수 없습니다. 신중함과 절제를 발휘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과잉이 정상화된 시대

대과괘는 위로는 태괘와 아래로는 손괘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괘에서 초구효와 상구효 두 개의 양효가 강하게 자리했다면, 대과괘에서는 반대로 초육효와 상육효가 그 안에 자리한 양효들에게 휘어지고 있는 형상입니다. 괘사에서도 대과괘를 “들보가 휘어졌다(棟橈)”고 말합니다. 저는 정이천이 대과(大過)를 대사(大事)로 해석해서, ‘대과’는 일반인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은 했는데요. 그런데 대과괘의 상황은 무엇이고, 여기서 ‘대과’란 무엇일지 생각이 안 나가더라고요.

채운쌤은 대과괘에서 대들보가 휘어진 것을 본말(本末)이 휘어진 것으로 해석해주셨습니다. 본말이 휘어졌다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버하는 것이죠. 우리가 오버하게 되는 까닭은 서둘러 결과를 내고 싶은 탐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꾸준히 탐욕에 사로잡히죠. 하지만 대과괘에서 말하는 오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대들보가 휘어졌다는 것은 집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심각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런 때는 보통의 방법으로 정신 차리게 해줄 수 없습니다. 집을 말아먹기 전까지 간 상황에서는 그만큼 대담한 일로 바로잡아야 하죠.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을 한 것, 탕왕과 무왕이 폭군을 방벌한 것이 그 예입니다. 이미 크게 지나친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대담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보통 사람들처럼 과잉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인의 마음은 손순(巽順)하고 화열(和悅)하죠. 보통 사람들은 마음이 과잉되어 행동까지 과잉되었다면, 성인은 그들을 바로잡기 위해 과잉된 행동을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평화로운 것이죠. 이괘에서 천하를 양육하는 성인의 역량을 그 자신을 양육하는 신중함과 절제에서 나왔는데, 대과괘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는 성인의 역량이 그대로 천하를 바로잡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대과괘의 윤리가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하여 은둔하여도 근심하지 않는다”인 것도 이해됩니다. 정치에 나가건 나가지 않건 성인은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리고 그 평안함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통찰하는 인식역량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대과괘를 읽으면서 지금 시대의 투기가 생각났습니다. 30대 청년들이 빚을 내면서까지 투기하는 지금 시대에서는 한 방을 노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졌습니다. 이러한 극단적 투기가 하나의 유행이 된 데에는 차근차근 일해도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의 영향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암담하다고 해서 남들처럼 똑같이 빚을 내면서 투기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성인이 성인인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원칙을 굳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이런 면모가 있기 때문에 성인은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남이 되는 것”이죠. 만약 지금 제가 규문에서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하고 그만두지, 뭐.’라고 타협하면서 몇 번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는 저 같이 유약한 사람에게는 규문 같은 곳에서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일종의 ‘둔세무민’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처음 《주역》 커리큘럼을 봤을 때, 사실 시몽동, 베르그손 같은 철학자들이 껴있어서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공부할 바에는 들뢰즈를 좀 더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들뢰즈를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몽동을 공부해보니 불손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저를 반성하게 됐습니다. 물리학을 따로 공부해서라도 시몽동을 이해하고 싶어졌습니다...!(이 말은 지금 많은 부분 이해를 못하고 넘어가고 있다는 얘기죠. ㅎㅎ...)

저희가 공부하는 철학들은 모두 개체를 ‘있음’이 아니라 발생적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시몽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개체를 개체가 발생하는 원리나 이미 구성된 개체로부터 이해하려는 철학들을 전복하죠. 다만 그가 사용하는 개념 대다수가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이라 이해하기 쉽지는 않네요. 그런데 다른 언어와 표현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다르게 이해하는 가능성들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채운쌤은 시몽동의 ‘상전이’ 개념으로 읽기에서 독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얘기하셨습니다. ‘상전이’는 말 그대로 상(相)이 전이하는 현상입니다. 상전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는 얼음-물-수증기입니다. 물 분자는 0도 이하에서 고체인 얼음이 되고, 0도에서 100도 사이에서는 액체인 물, 100도 이상은 기체인 수증기로 존재합니다. 물 분자는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 상이 달라집니다. 시몽동은 개체의 실존을 과포화된 용액에서 결정이 생기는 것으로 비유했었죠. 마찬가지로 텍스트 또한 어떤 해석의지와 접속하느냐에 실존이 달라집니다. 채운쌤이 《주역》은 읽는 자에 따라 점서가 될 수도 있고, 철학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신 게 생각나네요.

시몽동은 개체의 실존을 개체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는데요.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개체가 개체로 실존하는 동시에 환경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실존하도록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 이 부분이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환경을 여전히 배경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고요. 하지만 개체는 에너지 장 속에서 그러한 형태로 실존합니다. 그리고 개체를 특정한 형태로 결정한 에너지는 해소되지 않고 다른 형태로 전이하도록 개체에게 잠재됩니다. 환경은 단지 개체의 외부에서 개체화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개체 내부에서 개체가 특정 형태로 갖도록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들을 따라가보면, 시몽동에게 개체와 환경은 분리되지 않는 연합으로 맺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가타리 역시 환경을 단순히 우리의 외재적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태운동은 우리의 정서와 욕망을 새롭게 조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는데, 시몽동에게서도 비슷한 논의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몽동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겪는 문제를 다르게 제기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 1

  • 2020-09-12 15:04
    과잉을 신봉하는 자본주의 사회와 대과괘를 연결해서 보면, 이때 둔세무민은 과잉에 맞서는 큰 '오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투기가 곧 정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세태를 벗어나려면 그것이 정상이 아닌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