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9.20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9-16 14:24
조회
169
200920 주역과 글쓰기 공지

드디어 <주역> 상경이 끝났습니다. 그동안 시험을 보고, 글로 써보고, 낭송하고, 강독하며 어찌어찌 읽어나가니 어느새 이 두꺼운 책이 끝났네요. 와!! 상전은 총 서른 개의 괘로 되어 있으니까 앞으로 서른네 개의 괘를 읽으면 <주역>을 다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서른 개일까요? 채운샘께 여쭤보니 물과 불이라는 구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문명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여기서 한 번 끊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설이 있는데, 그냥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누어져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주역> 괘의 순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냥 서괘전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마는 것이죠.^^;; 채운샘은 <주역>을 읽을 때 해석의 일관성도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괘들이 무슨 스토리로 배열되어 있는지, 각각의 괘들은 64괘 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난 다음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죠.아무튼 괘를 서른 개 하고 났더니 에세이를 쓰기도 전에(!) 다음 괘들을 어떻게 한 학기 안에 읽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결국 다음 학기부터는 세 개, 네 개씩 괘를 읽어나갈 것 같습니다... 암기력을 최대한 발휘해 보도록 하지요ㅠ 우선 이전에 읽은 서른 개의 괘들과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3학기 마지막 괘 해석을 해 보도록 합시다. 계속 나아가는 감괘의 성질을 본받아^^

다른 중첩괘와 달리, 감괘는 특이하게도 괘 이름 앞에 습(習)이 붙습니다. 감(坎)은 구덩이라는 뜻입니다. 습(習)이 붙은 이유는 위험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구덩이에 빠졌다고 해서 괘가 마냥 흉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감괘의 괘사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미더워라(有孚), 그리고 행(行)하라. 물은 끊임없이 나아가고, 그러면서도 구덩이란 구덩이는 모두 메우는 성실함이 있습니다. 감괘는 위험에 빠져 옴짝달싹 못할 때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괘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물이 그 험난함을 벗어나는 방법은? 다른 물이 와서 구덩이를 마저 채워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따라서 구덩이에 빠졌더라도 믿음을 갖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책거리(?)로 받은,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 1873~1930)이 번역한 감괘와 리괘를 함께 읽었습니다. 영어선생님이 멤버 중에 계시니 이런 일도 할 수 있군요~ 이 번역본에서는 감괘를 abysmal, 심연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감괘의 물을 “협곡의 물”로 표현합니다. 협곡의 물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많은 부침을 겪습니다. 하지만 위험에 처한다는 것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습(習)이 감괘에 붙은 이유는 거듭된 위험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물의 연속성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감괘는 한없이 불안하고 암담한 위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혹은 너무 익숙하져서 절대 고칠 수 없는 고질병으로 굳어지게 되거나요.
감괘의 효사들은 각종 위기상황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상황을 보여주는 효는 육삼효입니다. 위험한데 거듭 위험이 덮치니 오히려 그 험한 것에 의지[枕] 된 모습입니다. 오도가도 못하니 그냥 뭉개고 있는 것이죠. 만약 점을 쳤는데 감괘 육삼효가 나오면 암담할 겁니다. 하지만 <주역>의 흉한 상황, 혹은 아무것도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효가 나왔을 때는 그 흉함 자체에 주목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효는 그것이 왜 흉한지 말해주기 때문이죠. 감괘 육삼효가 나온다면, 내가 어떤 위기를 맞아도 마냥 손 놓고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고 반성하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흉함도 없다는 것을 <주역>은 늘 말하고 있습니다.

중화리(重火離)괘는 괘 이름이 신기합니다. ‘붙는다’ ‘붙든다’라는 뜻의 ‘리(離)’는 다른 물질과의 관계 안에서 타오를 수 있는 불의 성질을 암시합니다. 리(☲)는 위아래로 양이지만 안쪽으로는 음입니다. 불은 뜨겁고, 태우고,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습니다. 항상 다른 것과 마주해야, 접촉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지요. 따라서 불에 리(離)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정말 고도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이 만물을 밝히는(明) 불은 문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이치에 따라 살도록 잘 기르는 순덕(順德)의 괘이지요. 괘사를 보면 암소를 기르듯 하면 길하다[畜牝牛吉]고 나옵니다. 암소는 기본적으로 순하지만 잘못 길들이면 갑자기 돌변해서 날뛰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도 순덕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땅의 일부이니까요. 이 순덕을 잘 기르는 것을 리괘는 문명이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빛내는 교화와 양육을 문명이라고 보는 것이죠. 상전에서는 문명을 계승하는 것[繼明]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다고 한들 계승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 문명입니다. 문명과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승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바로 이 찬란한 문명을 자기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님을 알 때입니다. 자신을 과거와 미래의 연속성 안에서 성찰할 수 있을 때 계승도 가능한 것입니다.
리괘의 구삼효는 자기를 비우는 이치가 드러나는 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사는 이렇습니다. “해가 기울어져 걸려 있으니, 장구를 두드리고 노래를 하지 않으면 크게 늙어감을 슬퍼하는 것이니 흉한 일이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 여기서 질(耋)은 여든 살을 뜻합니다. 옛날 그림에는 고양이와 나비가 그려져 있는 게 많은데, ‘모질도(耄耋圖)’, ‘모접도(耄蝶圖)’라고 합니다. 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늙음과 발음이 비슷한 고양이나 나비를 그려 넣는 것입니다. 기대수명이 짧았던 옛날에 여든 이상을 가리키는 ‘耋’ 같은 글자는 정말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의미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늙는 것을 슬퍼하는 일은 생에 대한 이치를 모를 때나 하는 일이라고, 구삼효는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연속성 안에서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볼 때 사람은 늙어감을 슬퍼한다고 말이죠. 구삼효는 늙어감이 아니라 그것을 슬퍼함을 흉이라고 합니다. 자기로 꽉 찬 인식에 빠져 있으면 문명의 핵심인 계승은 요원한 일이 될 테니까요. 문명을 잘 이어받았다면, 자신의 삶의 연속성을 생각하며 잘 이어줄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리괘의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시몽동의 사유는 리괘가 말하는 관계로서의 개체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읽는 괘는 모두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보편성이 있는데, 그러면서 음효와 양효가 구조화된 방식은 서로 다르다는 특이성이 있습니다. 시몽동 식으로 말하면 퍼텐셜 에너지의 구조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가령 도전괘의 경우, 구조는 비슷해 보이지만 음과 양의 위치가 달라졌기 떄문에 완전히 의미가 달라집니다. 또 같은 두 번째 음효들인데도, 64괘 안에서 같은 육이효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시몽동은 개체가 관계라는 것이 개체가 관계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와 너라는 고정된 항들이 맺는 관계가 아니라, 개체항 자체가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시몽동은 개체의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경계에서 생산된다고 합니다. “개체는 자기 내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계’에서 구성되고 생성된다.” 이때 개체는 항상 외부와의 관계성을 함축한 상태에서만 존재합니다. 관계는 항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것. 이를 염두에 둔다면 개체의 능동성은 그의 주체성이 아니라 얼마나 상황의 원인으로 참여하는가에 달려있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괘를 직접 뽑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에세이와 관련된 질문거리와 산가지를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목욕재계는 필수!! 3학기 에세이를 한번 하늘에 맡겨 봅시다 ㅎㅎ

<주역>은 택산함(澤山咸), 뇌풍항(雷風恒) 읽고 공통과제 써 오시면 됩니다.
<주역전의> 상권, 이번에 나눠드린 감괘와 리괘 영역본 가져 오시구요~

후기는 태미샘, 간식은 수정입니다~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4

  • 2020-09-16 15:01
    상경=자연의 만상, 하경=인간사의 만상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 그냥 그렇게 나뉘었을 수 있다는 건 '설'이 아니고(더구나 '두번째 설'은 더 아니고) 웃자고 하는 얘기.(물론 이게 진실일 수도^^)

  • 2020-09-17 18:49
    '협곡의 물'이 자강불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운동이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자강불식의 연속적 운동성도 끊임없이 상황을 인식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죠. 하지만 자강불식을 해야 할 동력이랄까? 그런 거를 제 삶에서 어떻게 가져올까 싶었어요. 가끔 '굳이 자강불식하지 않아도 살기에 충분한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어딘가 웅덩이로 고여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심하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경각심 같은 게 생겼습니다. 여튼,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듭니다~

  • 2020-09-17 19:44
    어떡하든 온전히 혼자서 험함에서 빠져 나오려 하거나 저 혼자만 빛나려는 마음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지 감괘와 리괘를 읽으며 또 한 수 배웁니다. 나는 자신에 의해서만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관계들에 의해 살아지고 있다는 것은 참 안심이 됩니다. 상경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또 한번의 "캬!"포인트 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음 학기에 몇 개의 괘를 하든 저는 두 개만 외우겠다고 채부장님께 말씀 드려놨으니 그리 아시고~ 반장샘 벌금 정산에 참고해주셔요.

  • 2020-09-18 14:17
    상황의 원인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뭔가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과 같은 말인가요?
    저도 2개의 괘 외우기가 능력의 한계치입니다. 그러니까 제 벌금 정산에도 참고해주셔요. 하지만 저는 소심하니까 나모지는 1, 2월 방학 때 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