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9.27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9-23 01:04
조회
108
200927 주역과 글쓰기 공지

 

에세이 전 마지막 시간인 이번 시간에 배운 괘는 함(咸)괘와 항(恒)괘입니다. <주역> 하경의 시작이기도 한 이 두 괘의 공통점은 끊임없는 운동성이라 할 수 있지요. 두 괘 모두 하괘와 상괘의 효가 짝짝꿍이 맞아 감응하고 있기에, 인간세상에서 뭔가가 생성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상경까지가 천지가 나뉘고 만물이 생겨나는 이야기라면 하경부터는 좀 더 인간사에 가깝습니다. 함괘는 남녀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항괘는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담고 있다고도 하죠. 인간 사이의 감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이 감응의 결과가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것이 함괘와 항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괘의 함(咸)은 감(感)으로 해석합니다. 물체 사이의 마주침, 그로 인한 변용의 원리를 말하는 괘라고 할 수 있지요.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정서(affect)인데요, 역량의 증대 혹은 감소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사의 서두를 함괘는 마주침과 그로 인한 운동성으로 풀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함괘가 강조하는 덕은 바로 ‘자신을 비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虛受人]’! 고정적이 물체들의 마주침은 아무것도 생성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나를 비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말은 간단한데 막상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이천은 이를 ‘사심 없음[无我]’이라고 했는데요, 이때 사심이란 나를 타자와 관계없는 독립체로 볼 때 일어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것들과의 연관관계 안에 있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뭔가를 잘 했을 때 오만에 빠지거나 잘 못했을 때 자책하게 되지요. 그런 정념에 예속되지 않기 위한 수행과 공부가 바로 ‘자기를 비우는’ 것 같습니다.
함괘에서 주인공(?)인 효는 구사효입니다. 이 효는 여기저기 왕래하며 돌아다닙니다[憧憧往來]. 그러다보니 마음의 동요는 엄청난데 자기의 확장은 일어나지 않는 효이지요. 감응이 일어나긴 하지만 확장적이지는 않은 모습이랄까요. 친구는 얻지만 깨달음은 없는, 그런 감응의 태도입니다. 이 효가 유명한 이유는 공자님이 [계사전]에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용한 맥락이 전혀 다릅니다. 효 자체는 산만하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인데, 공자님은 이걸 가져와서 천지가 끊임없이 운동하는 원리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단장취의(斷章取義)! 때문에 정이천의 주도 덩달아 무척 깁니다. 여기서 정이천은 감(感)에 대해 설명합니다. “감동함이 있으며 응함이 있고, 응하는 바가 있으며 감동함이 되며 감동하면 다시 응함이 있으니, 이 때문에 끝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며 운동만이 만물의 원리이며 변하지 않는 상도임을 설명하지요. 채운샘은 모든 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하셨어요. 64괘는 전혀 다른 상황들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하루에도 64괘가 모두 적용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운동성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하죠. 이 운동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상황의 한 국면에, 그리고 나라는 개체의 한 면에 집착하는 사심(私心)에서 좀 놓여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괘를 뒤집은 항(恒)괘 역시 핵심은 관계와 운동성입니다. 그리고 항구성을 보장해주는 것 또한 사심 없음이지요. 어느 한 국면에 매인다면 물체는 끊임없는 운동을 멈추고 말 테니까요. 점을 쳤는데 이 항괘가 나오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 오래 함께 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점쳤는데 이 괘가 나오면 오래 갈 수 있다고 하고, 개혁을 꾀하고 있는데 이 괘가 나오면 좀 어렵다는 뜻입니다. 항괘는 ‘항(恒)’이라는 글자 때문에 무척 좋은 것 같지만, 효를 들여다보면 잘못된 ‘항상됨’에서 빠져 나오라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못 든 습관을 고치기는 어렵다! 항괘의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초육효와 구삼효입니다. 초육효는 “깊은 항상됨[浚恒]”을 말하는데요, ‘깊다’고 해서 좋아 보이지만, 이는 불선에 깊이 빠져 그것이 습이 된 형상을 말합니다. 정이천은 “떳떳함만 알고 변통함을 알지 못한다”고 풀이했죠. 때[時]를 모르고, 똑같은 것에 머무르고자 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는 결국 항상 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삼효는 이를 “정고함을 지키면 부끄럽다[貞吝]”고 표현하며 “항상되지 못한 덕[不恒其德]”이라고 했습니다. 정(貞)은 글자만 보면 좋아 보이지만 괘마다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괘에서는 반드시 고수해야 하는 원칙으로 쓰이지만, 변화와 때를 말하는 괘에서 이 글자는 고집스러워서 부끄러운 태도를 의미합니다. 때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량이 무척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不恒其德”은 <논어> 자로편에서도 인용된 구절입니다. <논어>는 이런 구절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방 사람들 속담에, 사람이 항상되지 않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손 쓸 수 없다고 하던데, 일리 있는 말이다. 덕을 행함에 항심이 없으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子曰 南人有言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承之羞)"

 

그리고 덧붙여 "점을 칠 것도 없다(子曰 不占而已矣)"고 못을 박으셨죠. 이때 항상 되다는 것은 매양 도덕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고하게 지키는 것을 돌아보고 의심할 수 있는 역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쁘게도(!) 정상수업을 진행한 이번 시간에는 각자 산가지를 들고 각자의 질문에 대한 점을 쳐 보았습니다. 배웠던 괘가 나오면 그 괘로 에세이를 쓰겠다는, 일석이조(?)를 노리는 시간이었는데요, 이 무슨 운명인지 죄다 진도 바깥(?)의 괘가 나와서 무산되고, 결국 또 다른 신탁~채운샘~을 받아서 에세이에서 쓸 괘를 정했습니다. 내친김에 능동성(?)을 발휘해서 수업이 끝났는데도 지난 시간 받은 영어 괘 강독도 하고 시몽동 책도 뒤적거렸는데요 ㅎㅎ 말로는 단축수업을 부르짖지만 몸은 솔직하게 공부를 하는 주역팀입니다ㅋㅋㅋㅋ

 

다음 시간에는 에세이 개요를 갖고 만납니다. 에세이에는 힘들여 읽은 시몽동 개념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마세요~
물론 함괘와 항괘 시험도 있습니다~
+ 상괘를 끝낸 기념으로 책거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후기는 수정
간식은 은남샘

 

일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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