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6주차(9.5)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9-02 22:46
조회
125
 

 

지난주 니체 수업은 휴강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조별 토론 없이 강의가 진행된 단축 수업을 했습니다. 아직 영상 프로그램(Zoom)이 준비되지 않아 강의는 녹취록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집에 계심에도 과제를 올리시고 녹음파일을 들으며 함께 공부하고 계신 쌤들, 마지막까지 함께 정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번 공통과제 주제는 니체의 자유 개념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자유를 되물어보기였습니다. <우상의 황혼>의 후반부에서 니체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자유의 이미지와는 다른 자유에 대해 말합니다.

“자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 책임에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 우리를 분리시키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 노고와 난관과 궁핍과 심지어는 삶에 대해서까지도 냉담해지는 것. 자신의 문제를 위해 인간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177쪽)

이 아리송한 말들을 어떻게 해석해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채운샘이 이야기해주신 들뢰즈의 ‘서퍼’의 이미지로부터 니체의 자유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서퍼는 매번 다른 파고와 파장으로 다가오는 파도 위에서 보드의 중심을 새롭게 잡아야 합니다. 이전 파도에서 잡았던 중심에 머무는 한 무너져 물에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끊임없이 기존의 중심화하는 힘으로부터 탈주하는 minor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람, 물, 보드와의 관계를 매번 새롭게 문제화할 수 있는 자입니다. 매번 새로운 문제화이기에 매번 다른 해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 관계에 들어서서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 저는 이런 서퍼의 태도가 니체가 말하는 자기 책임에의 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모든 미세한 차이들을 방치하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을 해석하고 그 해석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떠나는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로부터의 자유’와 ‘~를 향한 자유’의 차이가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 이미지는 보통 어떤 억압과 규제로부터 풀려나는 해방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푸코가 말했듯 그런 자유는 자유롭기 위해서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먼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유는 ‘억압이 사라진’ 조건부로서 일종의 상상된 목적으로 설정됩니다. 우리는 그런 자유를 요청하고 갈망하지요. 그러나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길들여짐의 증거입니다. 달라고 하고 빼앗아와야 한다는 발상은 노예의 전유물이지요. 그 상황종속적 특성이 자유롭지 못함을 반증합니다. 니체의 자유는 그와 반대입니다. 니체는 자유가 “위에 머무르기 위해서 치르는 노력에 의해서”(178쪽) 측정된다고 말합니다. 그의 자유는 풀려남이 아니라 들어감, 해방이 아니라 참여입니다. 자유의 본능은 “자기 자신에 권위와 훈육의 극대화를 요구하는 무자비하고도 끔찍한 본능”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위해 자신에게 새로운 습관과 계율을 부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에 복종하는 만큼이 그의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자유는 언제나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에는 이와 비슷한 자유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일리치는 12세기 수도사들의 삶의 태도를 분석하며 ‘바카레(vacare)’라는 독특한 용어를 설명합니다.

“바카레는 ‘정해졌거나 자유로워진다’라는 뜻이다. 기독교 저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얻는 해방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의지로 택하는 자유다. 이 용어는 속박이나 생활 방식의 낡은 습관에서 해방되거나 거기서 달아나는 것보다는 새로운 생활 방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강조한다.”(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94쪽)

독특한 점은 정해진다는 의미와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바카레라는 용어는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도리어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무언가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의지가 아니라 원하고 긍정하는 의지인 것이죠. 이 대목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스승에게 보였던 자발적 복종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더 잘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이 되기 위해 스승에게 복종했습니다. 더 고귀하고 강한 삶의 방식들, 계율과 의무들에 참여하고 따르고자 할 때 구현되는 차원의 자유가 있는 것이지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이 사회적 부나 명예, 무절제의 쾌락을 억지로 거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더 욕망하는 것에 참여하고, 그들에게 더 기쁨을 주는 일들을 행할 뿐입니다. 그럼으로써 일정한 생활 습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 이것을 니체는(그리고 일리치와 푸코는) 자유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니체의 자유 개념은 일종의 계율 없이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올바른 자리는 몸, 품행, 섭생, 생리학이며 나머지는 이것들에 뒤따른다”(189쪽)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는 “자기 앞에서라도 자기를 ‘되는 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에서 구성됩니다. 고귀한 계율에 참여하는 것으로 구성되는 자유. 그리고 그러한 계율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중심을 극복하는 것을 비전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전과 수행에 대해서도 니체는 말합니다. “목표를 원하면, 수단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181쪽) 공부하는 우리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수단을 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똑같은 방식의 문제화, 똑같은 방식의 해(solution)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 뿐입니다. 품행, 몸, 습관, 관계성, 감각, 이것들을 되는 대로 방치하지 않을 수 있는 기예의 발명. 그것이 니체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시도해야 할 수행일 것입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안티크리스트> 26절(~249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옵니다. 24절을 중심으로,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어떤 것을 우상으로 만들었고 왜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가며 우상화의 힘의지와 심리에 대해 써옵니다.

요약 과제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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