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3학기 7주차(9.12)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9-09 12:44
조회
127
니체를 공부하다보면 ‘능동’이라는 말을 참 자주 쓰게 됩니다. 능동적으로 사유한다거나, 능동적 힘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이 말을 습관적으로 쓰다 보니 니체적 의미의 능동을 상식으로 덧씌우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능동’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굉장히 활동적이고 진취적이고 무언가를 마구 생산해내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니체가 활동적인 인간들을 비판하거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문화적 우월성과 동일시하는 독일을 비판하는 것, 나아가 니체가 비판한 그리스도교도들이야말로 전 세계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한 적극적인 인간들이라는 것 등등이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상식을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그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들뢰즈는 모두 수동에서 출발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이때의 신체란 단순히 우리의 (정신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몸만이 아니라 부단히 무언가를 겪고 있는 것으로서의 신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어떤 순간에도, 시간을 아무리 미세하게 쪼개도 고정되어 있는 법이 없습니다. 질량이란 그 자체로 운동 중인 에너지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신체는 의식이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부단히 무언가를 겪고, 또 다른 것들과 힘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겪음이 신체의 본질인 것이죠. 니체와 스피노자는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신체성으로부터 의식, 정신, 관념, 발생을 사유합니다.

니체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부단한 겪음의 과정 속에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능동적인 힘을 사용한다’ 같은 말은 이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로 능동적인 힘이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는 능동과 수동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떤 힘도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 복종하고 명령하는 것은 한 화폐의 두 모습이다”(《권력의지》Ⅱ, 91)라는 니체의 말이나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말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규정당하는 동시에 규정합니다. 사회계약론에서와 같은 힘의 양도와 권리의 포기 같은 것은 실제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종하는 힘은 복종 속에서조차 힘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능동적인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수동이라는 조건 속에서 능동성을 구성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방식으로 겪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르게 겪을 것인지를 질문함으로써. 여기서 긍정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겪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전지적 능동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무엇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겪음’을 긍정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능동은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무언가를 해내거나 노오력 해서 원하던 바를 이뤄내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은 예측할 수 없이 닥쳐오는 것들을 잘 겪어내는 것입니다. 겪음을 긍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연해야 합니다. 마치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형하며 생성을 이어가는 자연처럼 말이죠. 능동이란 결국 높은 변용능력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합기도는 생존능력을 기르는 무술이라고요.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생을 지속할 수 있는 단단함 같은 것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요.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나 힘 또한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긍정이란 두 번째 긍정을 불러올 때만 의미를 갖습니다. A에 대한 긍정이 A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적대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긍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니체적 의미의 긍정은 우치다가 말하는 종류의 생존능력과 비슷합니다. 긍정하는 자에게 그 자체로 나쁜 마주침은 없습니다. 푸코가 말하듯 우리에게 억압이나 제한처럼 작용하는 것조차도 항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우리는 억압이나 제한과의 관계 속에서도, 오히려 그러한 겪음으로부터 촉발되어, 상황에 규정되지 않는 다른 품행들을 구성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를 회피함 없이 직면하는 것,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첫 번째 긍정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외부적 조건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는 자기 변환의 실험을 가져가는 것은 두 번째 긍정이겠죠. 이때 문제 상황을 직시하는 것(첫 번째 긍정)은 다른 실험의 가능성(두 번째 긍정)을 열어주고, 외부적 조건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기 위한 실험과 시도들은 다시 문제 상황 자체를 그 필연적 조건 안에서 긍정하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긍정과 능동의 힘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떤 억압 속에서도, 어떠한 문제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그것을 긍정하며 나아가기를 시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언제 우상을 만들어내게 될까요? 바로 이러한 긍정과 능동의 역량을 발휘해내기에는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에서입니다. 과잉으로서의 삶과 일치되지 못하는, 삶의 넘치는 힘과 더불어 변환할 용기와 능력이 없는 상태. 이러한 상태 속에서 우리는 당장에 자신을 이끌어주고 위안을 주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니체가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삶에 대한 부정, 자기 경험과 자기 조건에 안주하려는 욕망 같은 것들인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무언가를 우상으로 만드는 방식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채운샘은 모든 우상은 자기 자신, 자기 경험에 대한 실체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자신을 한 번 기쁘게 했던 것과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에 대한 분별이 습관화되고 고착화되면 그것이 곧 우상에 다름 아닙니다. 《안티 크리스트》를 읽으며 우리가 우상을 만들어내는 방식들, 우리가 스스로의 예속을 욕망하게 되는 메커니즘들을 파고드는 시도를 해보아야겠습니다.

다음주에는 《안티 크리스트》를 46번까지, 그리고 《니체와 철학》의 5장 3번(‘신은 죽었다’)을 읽고 니체의 기독교 비판의 핵심을 정리해서 올려주시면 됩니다. 니체가 기독교 비판을 통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과제를 작성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전체 2

  • 2020-09-11 14:25
    능동과 긍정에 대해 갖고 있던 안이한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잘 겪는 능력으로서의 능동. 앞의 상태에 규정당하도록 방치하지 않는 다음 훈련으로서의 긍정.

  • 2020-09-12 00:22
    긍정과 부정을 동시적으로 생각하니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는 부정해야만 한다"고 했던 건화샘 최애 구절이 뭔 소린지 감이 오는 것 같았어요. 새로운 힘을 긍정할 때에만 비판은 힘을 얻는다는 것. 부정은 긍정의 조건이면서 긍정은 부정의 결과가 되기도 한다는 것. 근데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인용한 "어떤 기도도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부정도 훼손하지 못하는 존재의 지고한 성좌, 존재의 영원한 긍정, 나는 영원히 너의 긍정이다."(디오니소스 찬가) 이거 뭔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멋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