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8주차(9.19)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9-12 21:07
조회
135
 

 

<안티크리스트>는 그 내용의 강렬함도 인상적이지만 우리 자신에게 돌이켜 생각해 볼 부분도 많은 책인 것 같습니다. 서문에서 니체는 이 책이 동시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요, 다음 세기의 사람인 우리의 목표는 니체의 독자가 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안티크리스트>의 탁월함은 거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도’와 ‘기독교도의 심리’라는 점입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문제를 그 시대나 자기 시대의 정치적 아젠다와 같은 옳고 그름의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니체의 방법론은 언제나 ‘누가 그것을 원하는가?’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목매는 자, 그는 누구인가? 라고 물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합리/비합리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의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차원입니다. 무언가에 끌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욕망과 무의식의 구도, 몸의 배치, 사고의 습관을 말해줍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도의 심리학을 분석하는 작업은 교회에 나가고 세례를 받은 교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근대인에게 이미 작동하고 있는 힘과 의지의 유형을 분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분석·이해해보기 위해, 우리가 <안티크리스트>를 읽으며 주목해야 할 두 가지는 사제의 심리학과 무리의 심리학입니다. 원한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인 사제 본능과 무리 본능은 예수라는 독특한 성자의 삶과 죽음 앞에서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라는 사내의 특징은 “평화 안에, 온유함 안에, 적대-하지-않을 수-있음에 깃들어 있는 지복”(29절)입니다. 자신을 해하는 사람에게조차 원한을 갖지 않고, 저항하지 않을 수 있는, 다소 백치 같고 수동적이지만 완전히 자신을 비울 수 있는 힘이 그의 특징입니다. ‘세상에는 죄가 없다’, ‘누구나가 신의 자식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그가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가 살아왔고, 그가 가르쳤던 대로 죽었다―‘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35절)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자신의 실천으로,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기쁜 소식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렇게 살다 간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어려운 삶이 가능하다는 소식. 놀랍지만 그런 삶이 있고 그런 죽음이 있다는 소식. 그렇기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까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솔직해져야 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인 이 사건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일으키는 복잡하고 뒤틀린 파장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의 심리에도 솔직해질 수 있으니까요.

우선 “이런 삶이 있다!”는 복음을 전해 들은 사제들을 생각해봅시다. 스스로 신의 말씀을 대변하고 가르치던 선생이자 랍비였던 그들 사제 집단에게 그 소식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삶이 있었다고....? 그걸 했다고?”라고 되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르치던 것과 어긋나고 그들이 살면서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있어선 안 되는 예였습니다. 아무 말 없이 해내는 자에 대한 하고 있지 않은 자들의 비난과 시기, 저는 이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과 같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고, 반대로 자신과 다른 자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후자의 경우, 그 불안은 우리 마음속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를 악으로 만들어 비난하고 깎아내리거나, 반대로 천재나 영웅으로 만들어 칭송하고 찬양하며 그와 우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 놓거나. 그렇게 했을 때 우리의 마음이 그나마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으로 무기력한 자들의 심리이지요. 일부 사제들은 전자의 방식을 따른 반면, 바울과 같은 사제들은 후자의 경로를 따랐습니다. 엄청난 조작이 가해집니다. 그들은 예수가 보여준 삶과 죽음을 ‘어렵지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킴으로써! 이제 예수의 삶은 그가 전한 복음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삶과 심연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를 못밖은 자는 바로 사제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으라는 ‘전도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그 처럼 사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를 따르고, 자신들의 구세주로 모셨던 사도들의 마음에 일어났을 사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대개는 남을 해치고 속이는 천민에게만 사용되었던 십자가”(40절)에 말이지요. 그는 죽는 순간까지 별다른 저항이나 충고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장 혹독한 시험을 공개적으로 치르면서 자기의 가르침을 입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죠. 자신들이 수년간 따라다니며(심지어 배와 그물을 버리고) 모시던 선지자가 그렇게 맥없이 죽어버렸을 때 사도들에게 든 마음은 아마도 허탈함 혹은 배신감 같은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쫓아다닌 것인가?하는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을 것이고, 존경과 선망은 그 허망한 임종 앞에서 미움과 복수심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모욕감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스승, 친한 친구나 가족, 아니면 자신의 이미지가 당한 모욕을 우리 자신의 모욕으로 느낍니다. 사실 그 대상이 어떻든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감정이 상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예수는 용서하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용서를 가르친 위대한 선지자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 누가, 왜 그를 죽였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 악한들을 비하할수록 예수의 죽음이 정당화되고 자신들의 처지가 완화됩니다. 그렇게 예수는 한없이 억울하고 부당하게 당해버린 희생양이 됩니다. 그리고 부활 관념과 메시아 관념이 그 원한과 뒤섞여, 예수는 훗날 복수를 위해 다시 돌아올 거라는 약속이 예정됩니다.

예수의 생에 대한 이런 심리학적 조작의 배후에는 권력을 원하는 사제들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억눌린 자들, 약한 자들은 그와 같은 복수가 자신들을 위해서 행해질 것이라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 복수와 심판의 소식에 대한 열렬한 전도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믿지 않았던 것을 그의 교설을 전해 받은 바보들은 믿었”(42절)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제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권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행사할 무리를 원했습니다. 그 무리는 바로 ‘병들고 짐 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는 우리를 중심으로 돈다”고 말하면서 우리, 실패한 우리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반응했습니다. 이 대중의 무기력 속 원한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는 자들을 원하는지, 언제 우리가 기적을 행하는 자의 존재를 원하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서 혹시 사제의 의지나 대중의 본능이 작동하지는 않는지 고도의 심리 분석을 가해야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길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티크리스트>를 그 안내서로 읽어가 봅시다~!

다음 주(9월 19일)는 마지막 공통과제가 있습니다. <안티크리스트>를 끝까지 읽고(~320쪽) 지금 우리 사회(그리고 나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병적인 심리구조는 무엇인지 써보는 것입니다. 혐오와 배제의 문제, 무기력과 온갖 자극 수단들의 문제 등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학기 에세이 공지입니다.

주제 : 우리 시대(그리고 나 자신)의 우상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것을 어떻게 우상화하는가?

-우상화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진단 및 분석하고 그로부터 어떻게 자기 구원이 가능할지에 대해 쓰기.

9월 26일에는 에세이 개요를 준비해 주시고, 발표는 10월 10일에 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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