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3학기 9주차(09.26)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9-23 12:58
조회
120
채운샘은 두 종류의 난민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전이나 재해나 빈곤 등의 이유로 자신이 살던 터전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 세금을 아끼고자 전 세계를 떠도는 슈퍼리치들입니다. 특정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사회와 연계되었던 자본주의 초기의 부르주아들과 달리, 지금의 ‘다른 데의 계급’(elsewhere class, 프랑코 베라르디)은 특정한 영토적 공동체의 미래에는 무관심하며 오직 이익에 따라 내일이라도 당장 비즈니스를 지구상의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해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최상위 계층과 최하위 계층이 모두 자기 삶의 영토를 잃어버린 상황. 저는 이러한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안정’이나 ‘행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도록 강제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이러한 세계에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고 진보적인 가치들을 지지하면서 물질적·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조건 속에서 이러한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에 대한 온건한 이상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거나 그 자체로 허위와 기만으로 얼룩진 것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요? 우리가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도,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소비하며 살아도 그것은 생태위기를 가속화하고 지구 반대편의 노동자들의 착취에 기여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나아가 자기중심을 잡고 살아가지 않는 한 부단히 크고 작은 중독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착취하게 됩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직면한 시대가 “흥청망청 술에 젖어 지내는 아버지 때문에 가산이 거덜 나서 자녀들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의무를 지게 된 그 밤으로 기억되었으면”(《전문가들의 사회》, 16쪽)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지금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앞가림을 하고 적당히 책임감 있게 도덕적으로 사는 것 이상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리치의 말로는 우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의무를 지게 된 것이고, 채운샘의 말로는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선업을 쌓아야 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정신 차리고 살기 위해 우리는 살짝 미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상식을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니체의 철학의 철학이 지니는 비판적 힘은, 그의 사유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이 세계가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자연주의적입니다. 그의 사유는 인간적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카오스적 필연성으로서의 우주, 그 자체로 어떤 의미나 목적도 부여되어 있지 않은 내재적 자연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인 것이죠. 그러나 이것이, 니체가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의 숭고함 같은 것에 착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자연’이나 ‘필연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원의 무의미성’을 조건 짓는 바탕 같은 것입니다. 니체는 '토대 없음groundlessness'에 대한 사유로부터, 지금 우리가 어떠한 해석과 가치평가를 통해 현실을 출현시키고 있는지를 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토대 없음, 근거 없음, 바닥 없음을 직면하면서 어떤 이상에도 의존함 없이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가치나 한 가지 관점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와 관점들이 어떠한 토대도 없이 발생하고 또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니체의 비판은 어떤 절대성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니체가 ‘믿음’을 그토록 비판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니체가 문제 삼았던 것은 믿음의 허위적 성격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삶의 토대 없음을 직면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편협한 인과를 초과하는 우주의 생성과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역량을 부정하려는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있어서 안다는 것, 알고자 한다는 것은 특정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자 함에는 다른 지평으로 시선을 돌리는 활동을 수반됩니다. 알고자 한다는 것은 특정한 가치나 관점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토대 없는 이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이기도 하죠.

에세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지점에서 자기 자신이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지, 어떤 지점에서 더 이상 알고자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현동적 역량을 부정하는지,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순간에 안티-니체가 되고 있는지를 질문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는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를 다시 정리하고,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에세이 개요를 써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희진샘과 정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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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5 09:25
    평범하게 살아도 파괴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정신차리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살짝 미칠 필요가 있다는 말이 공감됩니다. 상식과 평범과 '행복' 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카르마를 만들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런 평범성의 토대와 싸우지 않고서는 '되는 대로 방치'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