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에세이 발표 후기 및 4학기 1주차(10.17)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10-11 15:14
조회
243
이번 주에는 3학기 에세이 발표가 있었습니다. 부득이하게 한 주를 쉬기도 하고 최초로 화상 수업을 하기도 하면서 다소 어수선하고 어렵게 진행된 3학기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에세이를 쓰고 발표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인 것 같습니다. 녹음파일로, 라이브톡으로 그리고 쉬는 주간에도 모여서 한 세미나로 공부를 이어간 덕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구절을 공유하고 서로 코멘트를 주고받았던 시간 덕분인 것 같습니다(도반이 전부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과정이나 결과가 어떻든 끝까지 마무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이번 에세이에도 되돌아보고 고쳐 배울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글쓰기, 아만, 공부, 환상과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인상 깊었습니다.

‘글이 솔직한 것은, 내가 쓰려고 한 의도보다는 나의 사고습관을 더 많이 반영한다는 것이다.’ 채운샘의 코멘트 중 제게는 이 말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들렸습니다. 글은 글을 쓴 사람을 보여줍니다. 나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지만, 그 글에는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나의 의도나 내가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보다 나의 강력한 기질이 더 잘 드러납니다. 일관성 없이 가지를 뻗어 나가는 상념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럴듯하게 잘 쓰고 싶은 허영으로부터의 경직과 회피가 드러나기도 하는 등 글이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건강 상태’이지 “사실 이런 의미로 쓴 것입니다”라고 변호하게 되는 의도는 부수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늘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이번 에세이 주제로도 많이 나왔던 ‘아만’인 것 같습니다. 글이 안 써진다면 팔 할은 아만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스스로를 자기 모습보다 높게 평가합니다. 매시매초 표현하고 있는 찌질하고 저속한 모습들은 좀처럼 자기 이미지로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자기 비하를 하는 순간조차 아만은 남아 있습니다. 그때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려고 앉으면 글에 대한 표상이 한가득 떠오릅니다. 물론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지만요. 어디서 본 멋진 글, 니체의 멋진 말, 저번에 쓴 나의 글, 이 소재는 에세이 주제로는 너무 하찮은 것 같다는 생각, 사람들이 보일 반응, 우상을 쓰려면 우선 우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강박, 그건 또 도피 같다는 생각, 별로 남지 않은 시간, 좋지 않은 것 같은 몸 컨디션 등. 이렇게 머리가 꽉 차게 되어 한 마디도 못쓰게 되거나 아니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얘기를 줄줄이 쓰고 있게 됩니다. 막히거나 회피하거나. 따라서 이 표상들과 상념들에 맞서고 쳐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채운샘께서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방법은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덮고, “원래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지?”라는 이 물음에 대한 소박한 한 마디를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료는 “내가 지금 뭘 알고 있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수많은 표상들과 텍스트의 멋진 구절들이 아니라 딱 지금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만큼이 재료인 것입니다. 우리는 글이 안 써질 때 쓸데없는 것들에 의존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괜히 멋진 구절과 그럴듯한 표현들이 떠오를 뿐 막상 글은 공허합니다. 그렇게 한없이 뻣뻣하고 무거워집니다. 제가 이번 에세이를 쓸 때 겪었던 일입니다. 아니 글을 쓸 때마다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하려는 말 한 마디를 진솔하게 쓰는 것이 용기고 힘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들뢰즈가 자주 말하는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것’이 바로 그런 거라고. 기진맥진하게 있는 것 없는 것 갖다가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말을 이상하더라도 진솔하게 쓰는 것.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의 공부에 대한 코멘트였습니다. 공부는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러하듯 자기가 하고 있는 활동에도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를 하면 그것이 우리를 우월하게 하고 또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준다고 은근 기대하게 됩니다. 일터나 집에서의 인간관계도 잘 풀리고 스트레스도 사라질 거라고. 저는 공부를 하면서 저 자신이 확 달라져서 마음의 일상의 어떤 갈등도 안 겪게 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채운샘은 공부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다른 문제들이 생겨날지언정 공부는 일상을 감화시키는 해결사는 못 됩니다. 다만 철학을 하는 동안에는 이전에 문제라고 생각되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될 뿐입니다. 초점이 달라져 그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전에 자극되던 것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별로 중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어떤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죠. 그것들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출가한 것은 가족과 왕궁이 싫어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따라 배치는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중심 이동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저는 건화형 에세이 코멘트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언제 공부가 삶이 되는가?” 이 질문은 매일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공부를 하는 저희에게도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이 공부가 어디로 데려다 줄지, 이것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이 길이 맞는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채운샘은 ‘내가 공부를 안 하면 뭘 하지?’라는 생각이 당연해질 때, 그때 공부가 삶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워서, 행복해서, 의미 있고 이익이 된다고 느낄 때가 아닙니다. 행복해서 살고 불행해서 그만 사는 것이 아니듯, 맛있어서 먹고 입맛이 없어서 밥을 끊는 게 아니듯, 살지 죽을지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듯, 그냥 살기에 공부한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질 때 공부는 삶이 됩니다. 딱히 공부 말고는 더 할만한 게 없다고 생각되면 공부가 잘 안 되도 하고, 잘 될 때도 그냥 하게 됩니다. 글이 잘 안 써져도 쓰고 잘 써져도 쓰는 것. 크게 절망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면서 가는 것.

우리가 때를 읽을 수 있는 성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신이 전체 인생길에서 어떤 국면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경험도 일천한 저희로서는 더 모르기에 막연한 불안이 늘 있는 것 같습니다. 흔들림을 겪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것을 언제까지 어떻게 겪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서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옛 여행자들이 길을 몰라도 어쨌든 북극성 쪽으로는 계속 가듯이 비전을 놓지 않고 있는 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리막길이라면 다행입니다. 다시 오르막이 나올 것이니까요. 오르막길에서는 또 그렇게 좋아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가고, 저런 일이 일어나도 가고. 그렇게 한 걸음을 정성스럽게 가는 것. 또 그렇게 매 걸음을 정성스럽게 사는 것. 이런 말들이 유독 크게 들렸습니다.

3학기가 끝났네요. 이제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4학기는 우리가 읽은 니체 텍스트 중 한 권을 골라 ‘나는 니체를 어떻게 만났는가’라는 주제로 최종 에세이를 씁니다.

다음 시간(10월 17일) 공지입니다.

1. <이사람을 보라>'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까지 (~374쪽) 읽고 메모해옵니다.

2. 최종 에세이에 쓸 책을 골라 선정 이유를 적어옵니다.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체 4

  • 2020-10-11 17:23
    민호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우리조의 조장님으로 고생많으셨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수업에 참석한 날보다 못간 날이 더 많았지만
    도반님들 덕분에 에세이 데이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도반이 전부다! 들을수록 중독성 있는 말이네요.

  • 2020-10-11 18:00
    이번 크리스마스 벌써부터 기대돼요. 에세이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후덜덜. 하지만 도반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겠죠.....

  • 2020-10-11 23:25
    후기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분위기상 저도 같이 욕(ㅋㅋ)먹을꺼 같아서 말을 못했는데요... 저에겐 이번 에세이 중에서 민호쌤 4번(예술가의 이상화) 편이 귀에 쏙쏙 가슴에 콕콕. 제일 짱짱!!!

  • 2020-10-12 10:39
    후기 잘 읽었습니다. 민호샘 후기를 읽고 에세이 발표일과 니체를 공부 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발표 당일 전 좀 추태를 부려가지고ㅜㅜ... 앞으로 마지막 학기를 팀원들과 함께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져봅니다. 모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