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1주차 강의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20-08-01 11:59
조회
86
절탁S/3학기 1주차 후기/2020.8.1./윤순

 

절탁S에서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신학정치론』, 『정치론』과 동양사상을 횡단하며 정치를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1학기에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와 노자를 2학기에는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한비자를 공부하고, 이제 3학기 드디어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표현 문제』와 맹자를 읽을 예정입니다. 이렇게 알차고 세밀하게 스피노자와 정치를 마주치며 사유할 수 있는 과정이 있을까요? 스피노자의 책들도 만만치 않지만, 스피노자를 새롭게 등장시킨 발리바르, 마트롱, 들뢰즈의 책들 역시 우리가 한 번 읽고 이해하기에는 버겁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 공부를 함께 하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20세기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입니다. 그의 해석은 스피노자를 벗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변주하며 풍부하게 종합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들뢰즈만의 용어와 개념이 새롭게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들뢰즈의 이러한 낯선 용어들과 마주치며 『스피노자의 표현 문제』 읽게 됩니다. 그의 용어와 개념은 낯설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어려움을 조금 완화할 수 있는 채운샘의 들뢰즈 철학 입문강의가 이번 시간에 있었습니다. 입문이지만 입문이 아닌 듯 느껴지기는 하지만 제가 이해한 만큼 강의 내용을 적어보겠습니다.

 

구성되는 주체, 변화하는 구조(일의성, 동시성)

들뢰즈 세대(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 갖는 공통점은 서양근대철학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서양근대철학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데카르트가 규정하고 있는 ‘생각하는 나 자신의 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잇는 서양의 주류 철학을 말합니다. 나 자신의 확실성을 보증해주는 것은 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데카르트 철학은 인간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신으로 되돌아갑니다. 철학에서 현대성의 문턱에 있는 사람은 칸트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며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사유했을 때,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들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들뢰즈나 푸코는 자신의 철학에서 칸트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의 지평’을 연구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초월론적 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이 라면, 당장 알 수도 없는 신을 이해하는 작업보다는 인간을 출현시킨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집니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질문은 ‘인간의 고정된 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주체가 출발점이 아니라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주체의 전 단계는 무엇)?’ 입니다. 들뢰즈는 인간이 감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초월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지만, 초월적 신을 믿는 것과는 다른 감각의 지평 너머에 존재하지 않는 초월론적 지평, 즉 경험한 것을 경험하게 하는 장을 묻습니다. 그래서 모순된 용어처럼 보이지만 들뢰즈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 초월론적 경험론입니다. 우리의 경험에서는 조건적 지평을 알 수 없지만, 주체(경험)를 출현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건적 지평은 매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이지 신비주의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조건 지어진 차원과 조건 짓는 차원, 경험된 차원과 경험되게 하는 차원, 결과의 차원과 원인의 차원은 분리될 수 있을까요? 근대철학에서는 토대와 현상을 분리합니다. 근대철학의 인과율에서는 나타난 차원은 나타나게 하는 차원보다 더 작습니다. 원인은 더 큰데, 나타나는 결과는 한정적입니다. 원인이 되는 조건들에서 나타난 결과는 부분적입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하고 영원한 신은 상대적이고 유한하고 한정적인 인간을 낳습니다. 흔히 생각하듯 나쁜 시험 결과는 내가 더 열심히 준비를 했거나 운이 좋았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는 늘 분리되어 있고, 불일치합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묻습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하고 영원한 신, 즉 완전한 신이 만드는 것이 어떻게 불완전한 것들이 되는가? 라고 말이죠.

세계도 변하고 관념도 변하는데 왜 우리는 고정된 나와 관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고정된 옳은 관념이 있다는 것은 집착에서 비롯된 무지입니다. 칸트는 인식의 발생을 말합니다. 그는 ‘무엇이 사유를 발생하게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나의 신체나 정신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변이하며 달라집니다. 칸트는 사유를 동적으로 파악합니다. 이를 이어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은 ‘어떻게 주체나 대상을 설정하지 않고 사유하는가’를 묻습니다. 주체나 대상이 아닌 지점으로부터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동양사상(주역, 불교 등)은 애초에 고정된 주체와 대상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연기나 중국사상의 도와 같은 개념은 변이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들뢰즈의 철학을 20세기 스피노자주의라고 평가합니다. 여기에서 스피노자주의는 반인간주의(반자아, 반주체)입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여는 첫머리는 ‘1부 신에 대하여’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충분히 신중심주의(신비주의)로 읽힐 수도 있는데, 이 책의 기술 형식은 정의, 정리, 증명, 주석을 포함하는 기하학적 방법입니다. 신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신을 기하하적 방법으로 증명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읽게 되면 우리는 처음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모순되어 보이는 이 책의 기하학적 형식과 신으로부터 출발은 인간중심주의(자아, 주체, 나 자신)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사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윤리학』이 종교인 신으로 되돌아가 모든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책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은 신에서 출발하지만 대부분 인간의 정념 메커니즘을 증명하는데 할애되고 있습니다. 『윤리학』에는 신도 나오고 인간도 나오지만 초월적 신, 주체인 인간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원인으로 활동하는 신과 변용되고 변용하는 양태인 인간이 나옵니다. 스피노자 철학의 이런 점이 들뢰즈나 푸코의 질문(‘어떻게 주체나 대상을 설정하지 않고 사유하는가’)에 대해 깊숙한 층위에서의 빛으로 작용합니다.

들뢰즈는 주관도 객관도 아닌 주체(애벌레 주체)를 가져옵니다. 하나로 환원되지 않은 변화 그 자체로서의 주체는 차이를 통해 일자로 나타납니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구조의 산물입니다.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이기 때문에 주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사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조에 의해 규정되기만 하는 것이 주체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한계입니다. 들뢰즈는 경험과 조건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경험을 바꾸려는 노력(수련)들이 조건(구조)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일치되는 평면, 즉 일의성의 평면을 사유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는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을 함께 사유하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되었지만 다른 관계를 구성하려는 시도들에 의해 구조(조건) 또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론에서는 다른 관계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는 자 또한 조건에 의해 매번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주체가 세계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주체를 규정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주체도 세계도 변화합니다.

우리가 매번 다른 순간을 윤리적(차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관성적(동일성)으로 받아들이면 권태를 느끼게 됩니다. 시간 속에서 존재의 변형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시간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권태가 느껴지는 상태에서 우리는 삶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조건에 의해 매번 구성되는 것이 나라면 내가 혼자 무엇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 조건들이 좋으면 기쁜 나로 매번 나타나겠지만 내가 혼자 좋은 사람들로 조직된 공동체 즉 조건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어떤 신체들과 어떤 체를 조직할 것인가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나의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공동체에서만 실존할 수 있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하는 신의 변용들은 신이라고 말해지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으로 표현되고 있는 능산적 자연의 작용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표현 문제』에서 이러한 신과 양태의 관계, 양태와 양태의 관계를 자신의 개념(일의성, 내재성)으로 종합하여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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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2 20:19
    마트롱이 감동한 그 들뢰즈의 사유를 배울 수 있게 되는군요! 차이와 반복을 조금 맛봐도 뿅갔는데 표현 문제에서는 얼마나 뿅가게 될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