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3주차(171017)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17-10-19 14:41
조회
159
절탁M4학기/3주차 후기(171017)/2017.10.19./윤순

이방인

알베르 카뮈(1913년~1960년)의 대표작이자 세계 문학을 논할 때 앞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인>을 드디어 이번 주에 읽고 토론하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준비한 <이방인>에 대한 5가지 질문과 답을 혜원샘의 진행으로 서로 나누었습니다.

주인공인 뫼르소와 엄마와의 관계 : 엄마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이방인>전체의 서사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고, 엄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행동거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1부와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뫼르소의 행동이 살인죄를 심판하는 재판정에서 다시 증언되며 재판의 결과인 사형을 받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2부에 죽은 엄마가 다시 등장합니다. 뫼르소는 엄마가 정확히 언제, 그리고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묻는 주변인의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하거나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가 피곤하고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는 것에 대해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엄마를 사랑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자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애도하는 어떠한 행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인들은 이러한 뫼르소의 행동에 당황하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2부 재판에서는 뫼르소와 주변인들이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서 보였던 뫼르소의 행동에 대한 증언에서 주로 뫼르소와 엄마의 관계를 추측하거나 그로 인한 뫼르소의 영혼을 심판하는 요소로 엄마가 등장합니다. 엄마와 자식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근본적으로 결정되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관계를 대표하는 부모자식간의 관계에서 도덕적, 감정적으로 어떠해야 한다는 보편적 태도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러한 기대치를 벗어나면 금방 주변사람들에게 지적을 받거나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엄마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는 보편적 도덕으로 보아도 감정 상태로 보아도 벗어나 있습니다. 뫼르소가 자신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예를 들면 피곤해서 라든가 더위를 이기기 어렵다던가 하는 감각만을 중요시해서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일까요? 아니면 그는 자신 이외에는 엄마라도 무관심해서 장례식에서 그런 태도를 취했던 걸까요? 어렵습니다.

4발의 의미 : 뫼르소는 바닷가에 레몽이라는 친구와 애인과 놀러 갔다가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뫼르소는 그가 쏜 첫 발에 아랍인이 죽었는데도 움직임이 없는 사람에게 4발의 총을 더 쏩니다. 1부의 끝부분에 나오는 뫼르소의 살인 장면은 모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숙제를 던집니다. 그는 자신과 특별한 원한이 없는 아랍인을 죽이는데, 한 발에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다음 4발의 총알을 더 발사합니다. 토론자 모두는 그 원인을 찾고 싶은데 그 어디에도 찾을 길이 막막합니다. 주인공 뫼르소의 1인칭 시점인 <이방인>은 뫼르소 자신의 내면을 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모호하다니 살인할 당시 뫼르소에게는 어떠한 감정적인 충동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이방인/민음사/p70)

그는 단지 한낮의 균형과 그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린 것을 깨달았다고만 자신의 살인을 기술합니다. 1부와 2부의 변곡점이 되고 있는 이 장면이 <이방인>전체 서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많은 의미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을 1발 쏜 것과 5발 쏜 것이 무슨 커다란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전체 서사의 맥락에서 의미를 도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민샘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자기 소외 :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주변에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엄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있는데도 알려하지 않으니까요. 일반적인 엄마를 대하는 태도와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죽음에 그의 어떠한 감정적인 표현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그에게는 엄마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고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핏줄인 엄마에게 그러할진대 다른 타인에게는 어떠할까? 라는 질문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세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그의 태도를 보면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친구인 레몽과 함께 할 때 친구를 위해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친구와 관련된 아랍인을 죽이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뫼르소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가져가려는 사람일까요? 세상에 깊숙이 개입하려는 사람일까요? 그는 자기가 자기 소외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이에 대해 선민샘은 1인칭 시점인데 어떻게 자신이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1인칭 시점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소외시킬 수는 있지만 자신을 소외시킬 수 없는 형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외’라는 것이 판단하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고 누가 보는 것인가에 따라 또 달라지는 것이라 ‘소외’를 말할 때는 이러한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 가지 죽음 : 1부 첫 장면은 요양원에서 죽은 뫼르소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자연사입니다. 그리고 1부 끝부분에서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이는 살인을 합니다. 2부의 끝에서 뫼르소는 사형을 받습니다. 마지막 죽음은 아직 집행되지 않았지만 죽음이 예상됩니다. 이러한 죽음들에서 주인공인 뫼르소는 다른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뫼르소의 태도 또한 변화합니다. 엄마의 죽음은 그래서 끝에 자신이 죽음에 처해졌을 때 그에게 다시 떠오릅니다. 저에게는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은 최종 심급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시하고 피하려하고 겉으로 말하려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어떠한 말을 할 만큼 죽음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세 가지 죽음이 중요 지점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뫼르소에게 죽음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죽음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뫼르소에게 더 감정이입을 해 보아야 겠습니다.

감정이입을 한다고 했는데, 선민샘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작품은 뫼르소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대해 감각으로 막고 있는 패턴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뫼르소는 감정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인칭 시점인데도 뫼르소에게서 어떠한 감정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는 공포, 사랑, 두려움, 슬픔, 즐거움 등 이러한 감정적 서술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야기가 나아가는 중요 포인트를 보면 피곤, 더위, 시원함, 밝음, 어두움 등 감각에 의해 방향지어 집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주변인들에 대해 뫼르소는 동조하지 않습니다. 뫼르소에게 감정이입은 어렵겠네요.^^ 그래서 공간의 변화(자신의 방, 바다, 재판정, 감옥 등)와 온도(뜨겁고, 시원하고), 질감(거친), 소리에 따라 뫼르소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뫼르소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예술작품은 하나의 구축물이니까 그 안의 주제 또는 형식이 어떤가를 먼저 살피고 핵심 부분을 작품 전체의 맥락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것을 명심하고 글을 쓰는 것을 부탁하셨어요.

문화와 제국주의

이번 시간에는 1장인 겹치는 영토, 뒤섞이는 역사에서 괴리된 경험과 제국을 세속적 해석과 연결하기, 2장 강화된 비전의 이야기와 사회 공간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괴리된 경험 : 제국주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창조되고 해석에 의해 생겨난 것을 본질적인 무엇인가로 가정하고 그 결과 타자의 상이한 경험을 낮은 지위로 경시하게 되어 어떠한 지식이라도 다른 지식과의 관련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증진하는 것보다 앞의 본질이나 경험만을 중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괴리된 경험에서는 여러 경험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사이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 본국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다른 나라의 문화는 재질서지어졌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더 이상 영토의 지배가 사라지고 없는 지금에도 세속(일상)에 남아있습니다. 실제로 겪은 경험들은 제국 본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식민지에도 있고 본국이 식민지에 영향을 미쳐 일어나는 경험, 그리고 식민지에 의해 본국이 변화되기도 하는 경험들이 교차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을 본국의 이념에 의해 재단되어져 어떠한 경험이 생략되고 부정되기도 하는 불균형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화는 제국주의적 역학에 의존한 문화로 재탄생해야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세계 문학이 되려면 일단 유럽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고, 유럽의 질서에 편입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또한 어떠한 민족이나 나라의 이미지도 유럽이나 미국의 틀 안에서 재편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대중들은 그것을 진실로 믿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나라가 세계화의 시대에 잘 산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밑바탕에 제국주의 본국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 질서 안에서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백 년 전 쯤 비서양 세계 전역에서 제국에 대한 저항이 생긴 무렵부터 서양은 물론 과거 식민지였던 세계에서 젊은 세대 학자들이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단절의 벽을 넘어 상호 교류의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자 하는 작업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현대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계보를 다룬 작업은 아직까지 거의 없다고 사이드는 주장합니다. 사이드는 비교문학이 태동된 목적은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비교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성과 지방성을 초월하여 복수의 문화와 문학을 함게 대위법적으로 보기 위해 생겨났고, 또한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분야이다. 결국 비교 문학이라는 학문의 성립과 성립 당초의 목적이라는 것은, 자국 중심을 초월하는 전망을 확보하고, 또한 자국의 문화, 문학, 역사에 의해 주어진 보잘것없는 자기 방어적인 편린 대신 어떤 종류의 전제를 조망하는 것이었다.’(문화와 제국주의/문예출판사/p116)

하지만 비교문학은 목적대로 발전할 수 없었고, 본국과 다른 문학은 제국의 문학이론에 의해 재질서되고 재평가되는 작업이 비교문학의 주요 연구 활동이 됩니다. 왜냐하면 비교 문학 태동 시기가 유럽 제국주의 절정기였기 때문에 제국주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이드는 비교 문학의 진행된 과정의 궤적을 보면 현대의 문화와 정치에 제국주의가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국을 세속적 해석과 연결시키기 : 서양 기독교 질서를 수호하는 수많은 서양 문학 작품이 곧 20세기 화두로 떠오른 세계 문학의 핵심이었고, 세계 문학 연구에는 “서양에 위치하는 관찰자만이 일종의 초연한 객관적 자세로 세계의 문학적 산물을 실제로 관망할 수 있다”는 의식이 녹아 있는데 이는 곧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특권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이들 작품에 비서양 세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비교문학 연구는 ‘정신적 통일’같은 이상을 상정했고, 그로써 오히려 제국주의 시스템을 은폐하고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전근대에는 공간을 비교할 수 있는 지표가 없었는데 제국주의 시대에 지표가 생긴 것입니다. 이 지표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위계를 탄생하게 합니다. 제국에 의해 통일된 지표가 밑바탕에 있는 서양의 많은 문학 작품들은 제국주의 시스템을 은폐하고 있으면서 제국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특히 제인 오스틴의<맨스필드 파크>와 같은 대중 소설 작품은 제국주의 질서를 일상에까지 전파했습니다. 사이드는 이러한 절대적인 서양 관찰자의 권위를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독해법, 즉 대위법에 따른 읽기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위법적으로 읽는 일은 곧 ‘이야기되는 종주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배되는 타자의 역사, 즉 지배적인 담론이 그것에 대해 (또한 그것과 함께) 작용하는 역사 쌍방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문화와 제국주의p129) 즉, 하나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에는 다양한 요소가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런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고전을 읽을 때에도 그 안에서 제국주의적 주제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하고, 제국과 문화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연구해야하고,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상호 의존성을 분명히 인식하는 방향으로 과거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와 사회 공간 : 2장 강화된 비전 도입에서 사이드는 소설의 태도와 언급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 특히 영국 소설에서 제국에 대한 암시가 많이 나타났는데, 사이드는 이러한 암시가 바로 태도와 언급의 구조를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소설이 어떻게 제국주의의 비전을 강화시키는지 보여줌으로써 유럽인들에게 내면화된 제국과의 권력구조를 폭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국을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을 보면, 소설에서 언급하는 식민지는 유럽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찾아오는 곳 등의 표상으로만 작용합니다. 소설은 한정적 독자(유럽인)만 염두에 두고 있어서 현지인의 상황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합니다. 까뮈의 <이방인>에서도 죽임을 당한 아랍인의 입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이드는 이러한 점을 우리가 파악했다면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찾아 언급된 부분과 함께 쌍방으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이 침묵을 강요당함으로써 주변화되고 왜곡되어 표상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보다 입체적으로 소설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 그리는 콩고는 아프리카니즘이라는 관념 및 통념의 반영으로 표상되어진 것입니다. 소설 속 화자는 영국인들이 제국을 바라본 시각을 가지고 식민지를 그저 착취하는데에 그치는 로마 또는 벨기에와 달리 영국은 그러한 ‘악행’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관념’이 있다고 합니다.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들이 영국을 ‘속죄’해줄 것이라는 언급은 식민지 나라의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제거한 채 영국 또는 서양에서만 유효한 개념들을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꾸미는 영국의 태도를 말해줍니다. 사이드는 이를 두고 통렬히 비판합니다.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자기를 존중할 뿐”이고 “스스로 날조한 기원에 근거”하는 것이라고.(p161)

제국주의 시대에 대제국을 이룬 영국에서 먼저 태어난 소설은 그 시대에 배경이 되는 “대영제국”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소설에 나타나는 언급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국’인 영국은 상세하고 면밀하게 조사되고 널리 알려지는 반면 ‘해외’지역들은 간결하게 한 번 언급되고 말아버립니다. 이러한 언급구조와 영국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언급하는 영국은 다른 나라(식민지)를 상호 교류하는 나라로 묘사하지 않고 다만 관리하는 영국의 부분으로 취급한다. 소설에서 이러한 권력구조를 고스란히 내면화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사이드는 주장합니다.
전체 2

  • 2017-10-21 11:41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는 독자마저 뫼르소가 무심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보게 하는 것 같아요...
    내면화 된 제국질서, 그리고 실제로 기능하는 위계는 생각보다 더 깊숙히 저희 일상을 침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잡해요 ;ㅂ;

  • 2017-10-21 17:57
    20세기에 도착한 우리입니다! 뫼르소는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를 법정에 세우는 인물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우리의 글을 심판대에!! 으흐흐흐~ 부들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