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10.10 절차탁마 M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0-13 19:54
조회
139
171010 절차탁마M 후기



1. <어둠의 심연>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를 읽고 다시 본 <어둠의 심연>은 처음과 많이 달랐습니다. 저번주까지만 하더라도 모험심 있고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던 말로는 비겁한 구경꾼이 되었고, 문명의 위선을 고발하던 커츠는 무성한 소문과 달리 잔인한 제국주의자의 민낯을 보여주는 인물이 되었죠.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정말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게 문학인 것 같습니다. 분명 몇 번을 읽어도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데 전혀 다르게 보인단 말이죠.

이번 시간부터는 1교시는 자유토론을 하기로 했습니다. 공통과제를 다 같이 읽고 서로 코멘트를 해주었는데요, 주로 말로에 대한 글을 써오셨고, 커츠에 대한 글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들려오는 것은 소문뿐인 커츠보다는 말로가 더 접근하기 쉬웠기 때문일까요?



사이드의 존재감(!): 말로는 어떤 사람인가. 사이드의 시선을 따라가면, 말로는 아프리카의 ‘어둠’까지 들어갔으면서 결국 발견한 것은 백인 커츠 뿐인 사람이었죠. 하지만 다른 유럽인들에 비하면 ‘그들’을 단순히 야만으로 매도하지 않고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걸 보면 말로는 그나마 나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둠의 심연>을 두고 영문학계에서 갑론을박이 뜨거웠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해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번 주의 토론은 저번 주의 우리와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사이드님(!)이 보신다면 이것도 나름 제 안의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해주실까요?^^



구경꾼 말로: 우선 말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붙일 수 있는 말은 ‘구경꾼’입니다. 그는 아프리카까지 갔는데 그런 것 치고는 정말 하는 일이 없지요. 심지어 말로가 그렇게 깔보던 엘도라도 탐험대만큼의 포부도 없어요. 그저 커츠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있을 뿐이지만 그 동기도 불명확하고 심지어 커츠를 만나도 별로 하는 게 없습니다. 보영쌤은 이런 커츠를 두고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라고 해석했지요. 확실히 사이드의 영향인지 말로의 시점이 건방져 보이기도(?) 합니다. 윤순 쌤은 말로가 여행자, 즉 현지의 체험을 전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만 확인하다 온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런데 여행자, 관찰자의 시선을 고수하는 것은 뭐가 문제일까요. 현지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이 못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좋은 거 아닐까요? 하지만 이럴 때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 봅니다. “사이드라면 뭐라고 했을까?”사이드라면 ‘그들’을 ‘암흑’으로 규정하고 그곳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말로의 여정은 그가 그렇게 비판하는 제국주의의 배를 탔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힘을 행사하고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모르쇠로 하고 있다면, 그건 안전한 곳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비겁한 사람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요?



무시된 경험: 콘래드는 실제로 콩고를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쓴 것은 <어둠의 심연>이지요. 이 책은 아프리카를 ‘암흑’이라고 하면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분명 ‘암흑’이라고 할 때는 말로, 그리고 콘래드의 윤리적 태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낯선 공간과 사람에 대해 외지인의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아는 척 하는 것도 오만이지요. 하지만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과연 외지인의 겸손일까요? 사이드는 어쩐지 ‘몰라도 되는 것 역시 권력이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대상을 깎아내리는 것과 숭배하고 신비화하는 것 모두 정복의 욕망을 자극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어둠: 사이드는 탈탈 털고 있지만^^ 그래도 콘래드는 <어둠의 심연>에서 제국주의 자체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말로가 가지는 시대에 대한 거리감, 말로가 이야기 하는 층위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시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것이죠. 말로는 분명 제국주의자의 면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빛을 아프리카의 어둠에 비추겠다는 제국주의의 위선과 잔인성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죠. 그리고 말로는 아프리카에 깊숙이 다가간 커츠의 기록을 가지면서 그 진상을 알고 또 말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의 심연>은 말로의 성장, 변화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커츠의 목소리: 커츠에 대해서는 지은쌤이 썼습니다. 커츠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그의 목소리에 대한 글이었는데요. 목소리란 중요한 요소입니다. 발화 지점이 있다는 거니까요. 즉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목소리’라는 요소의 의미입니다. 말로는 알 수 없는 ‘어둠’을 향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소리의 시작지점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냅니다. 하지만 그 진상은? 분명 무성한 소문처럼 커츠는 상아를 모으는 데는 일인자입니다. 그의 ‘사상’이라는 것도 아주 크고 높은 이상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커츠의 마지막 말은 ‘끔찍하다’는 외마디였습니다. 무엇이 끔찍하다는 걸까요? 원주민을 착취하고 그들을 공포로 지배하는 일? 아니면 하는 일에 비해 너무나 그럴듯하게 포장된 그의 명성? 분명한 건 제국주의란 목소리와 실상 사이의 갭이 어마무지한 것 같습니다.



2. <문화와 제국주의>



제국의 시대: 사이드는 영문학사에서 내로라하는 문학을 모두 들고 와서 제국주의가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연구가 발표되었을 때 난리도 아니었다고 해요. ‘저게 교수 시켜주니까!’라는 반응? 사이드는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 난민이었지요. 유년기를 대개 이집트에서 보냈고요. 그런 사이드는 제1세계의 시민권이 있다고 해서 마냥 ‘평등’을 영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이드는 제국주의를 무작정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도 나름대로 이점이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모국어 공간을 모두가 떠나서 다른 땅으로 이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모두가 움직였습니다. 그로 인해 ‘원래’그러한 본성 같은 것을 희석시켰지요. 사이드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어머니의 영향력에 대해 강조했습니다만 마지막 결론은 그 모국어의 습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아니라면 땅과 함께 묶였겠지요. 민족성, 본성과 같은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앎의 축적: 제국주의가 나를 구속하는 관념의 영토를 떠나게 하면 좋은 게 아닌가?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국주의 문제란 선민쌤 표현을 따르면 참 ‘가관’입니다 =_= 제국주의는 방대한 앎의 축적의 시대입니다. ‘지배’하는 서구 열강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들을 연구하여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지요. 인류학을 위시한 식민지 연구는 객관적인 학문의 모습을 하고 피지배국가를 규정하고 재단했고요. 여기서 문화상대주의가 만능 해결책일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양성, 우리와 그들은 ‘다르다’는 것의 기준 자체가 모두 제국주의의 산물이니까요. 이렇게 축적된 앎이 사실은 허구적이라는 것을 밝히려면 피지배국가는 지배자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이 질서를 따르려고 해도 일단 그들의 언어를 배워 䃲등 시민’이 되어야 하고, 부정하려 해도 일단 질서에 편입해야 한다니, 정말 가관이죠=_=



대위법: 사이드는 대위법적 독해를 권합니다. 대위법이란 복수의 주선율이 서로 ‘밀당’을 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국의 텍스트란 <어둠의 심연>에서 보았듯 주선율이 하나뿐입니다. 제국주의자의 시선, 제국의 서사, 아프리카에서 만나는 또 다른 제국주의자의 이야기이죠. 사이드는 여기서 침묵을 또 하나의 주선율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빠진 주선율을 역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 소설에 있는 침묵이 될 수도 있고 식민지 시대 이후 그것을 경험하고 영어를 배워 증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사이드는 여러 텍스트가 (설령 시차가 있더라도) 제국주의의 지배와 그에 저항하는 시점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암흑’으로 처리된 지점을 봐야, 제국주의 서사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이죠.



이념의 프레임: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라는 경험주의가 있습니다. 이건 맞기도 하고 또 공감도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주의는 내가 느낀 경험의 특수성을 나의 주체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건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구도와 비슷하지요. 나의 경험은 단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복합적인 상호 교류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결과가 바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것을 무시하고 ‘나에 대해’혹은 ‘너에 대해’말한다는 것은 ‘나’혹은 ‘너’를 대상화 시키고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프레임, 대상에 대한 앎을 선취하여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규정하는 것. 사이드는 이러한 태도를 경계합니다. 자연적인, 원래 그랬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나는 ~하다’라고 말할 때 내가 과연 어떤 이념의 프레임 속에 있는지 보라고요.



어제 뉴스를 보는데 미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까지는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이유가 참 농담 같았습니다. 유네스코가 ‘반유대적’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0ㅁ0 다른 이유로 면피할 생각도 없다는 게 놀라우면서 사이드가 말한 대로 우리는 아직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시간은

-<문화와 제국주의> [강화된 비전] 1-3 읽어옵니다. 발제는 수업시간에 정한대로.

-<이방인> 읽고 5가지 질문과 답 써옵니다.

-간식은 보영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2

  • 2017-10-14 15:03
    딱! 그 느낌! 저번 주의 '우리'와 싸우는 이번 주의 '우리'. 반복되면서 우리 안의 제국주의를 공격해들어오는 갖가지 독해!
    특히 각자의 자리에서 발견하게 되는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계속 박차를 가해보아요!

  • 2017-10-15 10:45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제국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 지난 2주였어요. 나도 말로처럼 세상이 이상하다며 구경만하고있었던건 아닐까.. 그것도 한편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고 그건 결국 동참아닐까 싶기도하고.. 남은 수업시간동안 제국을 허물수 있는 대위법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지 곰곰히 연구하고 실험하는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말로가 말했듯이 내 삶의 에센스를 내가 겪은대로 전달할 수 없을지라도... 어떻게든 전하려는 시도와 어떻게든 들어보려는 시도가 중요한것같기도 하고..?! 혼란스럽지만 해야할것같은 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