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앤드류 솔로몬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는 항상 그 덧없음을 느끼는 반면 우울한 감정에 빠져 있을 때는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기분은 변하는 것이라고, 오늘의 기분은 내일이면 달라지리라 믿는다고 해도 슬픔에 빠져들 듯 행복감에는 푹 빠져들지 못한다. 내 경우, 슬픔은 늘 존재해 왔고 아직도 보다 강력한 감정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만인의 보편적인 체험은 아닐지라도 우울증이 자라나는 토대일 수는 있다. 나는 우울증에 빠지는 게 싫었지만 우울증 속에서 나 자신의 크기, 내 영혼의 최대한의 범위를 알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행복할 때는 행복감 때문에 마음이 좀 산란해진다. 행복감이 내 정신과 두뇌 속에서 활동을 원하는 어떤 부분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증으로부터의 탈출은 싫어하는 일에서 은퇴하는 것과 같아서 너무도 행복하게 들리는 그 자유시간을 받아들이기가 좀 힘이 든다. 상실의 순간에 나의 이해력은 강화되고 예리해진다. 유리로 된 물체가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기쁨은 훨씬 더 기쁘게, 고통은 훨씬 더 고통스럽게 느낀다.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이나 결핍이 필요하다.”
러시아에서는 “잠에서 깨었을 때 아무 고통이 없다면 죽은 줄 알라.”는 말이 있다. 인생이 고통뿐인 건 아니지만 격렬한 고통의 체험은 생명력의 가장 확실한 표시다. 다시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보자. “만물이 저절로 자라고, 구워진 칠면조들이 날아다니고, 연인들이 지체없이 서로를 발견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유토피아로 우리 인류가 이주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곳에서 살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권태로 죽거나 목을 매달고 어떤 사람들은 싸워서 서로 죽이는 식으로 자연이 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이다… 고통의 정반대는 권태이다.” 나는,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져선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선 안 된다고 믿는다.
-<한낮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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